(01/10,주일-오전)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 고전 3:18~23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 장, 310 장, 94 장, 54 장
160110_1-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한율목사.pdf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고린도전서 1:10절부터 3:17절까지 다루었던 고린도 교회가 가진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결론입니다. 어떤 문제였습니까? 교회의 분열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네 개의 파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12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12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따르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분열되었습니다. 하지만 지도자들 때문에 분열되었다는 것은 그저 겉으로 보여 지는 이유일 뿐이고,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 세상의 지혜를 따랐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지혜를 따랐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교회 안에서도 똑같이 행동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무엇보다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를 두었기 때문에 모든 일을 자기중심으로 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세상은 항상 다툼과 분쟁으로 가득합니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던 것처럼 이 세상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이야 하나님을 모르니까 그런다고 해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인생의 주님으로 모신 사람들인데, 여전히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따르는 지도자들을 앞세워서 서로 분열되어 다투었습니까?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를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증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내가 따르는 지도자가 이런 위대한 지도자니까 나 또한 그런 위대한 사람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죠. 그러다보니까 서로 다른 지도자들을 따르는 사람들끼리 편을 가르게 되고, 서로 서로 자기들이 더 낫다는 식으로 다투게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의 분열은 지도자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어떻게 대할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까? 고린도전서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사도 바울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아가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라고 부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그들이 분명 구원받은 사람은 맞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받았지만, 여전히 육신에 속한 자, 즉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는 어린 아이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어린 아이는 말도 하지 못하는 정말 어린 유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처럼 유아와 같은 영적 수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정작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어리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의 가장 분명한 특징은 무엇입니까?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정말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며, 자격 없으며, 형편없는지를 분명히 깨닫습니다. 결코 자신을 높이거나, 자신이 한 일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의 입에서 나온 고백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1:1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을 죄인 중에도 괴수, 즉 죄인의 우두머리라고 고백합니다. 사실 디모데전서를 쓸 때 사도 바울은 이미 수 십 년간을 복음을 위해 그야말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은 후였습니다. 비록 과거에 자신이 잘못을 많이 한 것은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제는 어느 정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부심을 가져도 될 법합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을 통해 그야말로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오고, 또한 유럽 곳곳에 교회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역사가는 바울을 실고 갔던 배는 실은 유럽을 실고 가는 배였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바울이 한 일이 그만큼 위대했고, 그의 영향력 또한 엄청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신에 대해 뭐라고 고백합니까? 죄인 중에 괴수다.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형편없음, 무가치함을 고백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성숙한 신자의 모습이고 고백입니다.
또한 한국교회에서 참으로 존경받았던 한경직 목사님이 계십니다. 해방 된 이후에 북한에서 내려 온 실향민들을 중심으로 영락교회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이 분은 젊었을 때 미국 프린스턴 대학에서 유학을 한 수재였고, 또한 영락교회를 목회할 때는 교인 수가 만 명 이상이 되는 초대형 교회로 성장시켰습니다. 또한 얼마나 겸손하고 검소하셨는지 그 분의 대한 미담은 책 한 권을 써도 부족할 지경이었습니다.
정말 한국교회가 자랑스럽게 내놓을 수 있는 귀한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공로를 인정받아서 종교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템플턴상을 1992년에 한경직 목사님이 받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에 큰 영광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템플턴상을 받는 시상식 장에서 한경직 목사님이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저는 일제 강점기 때에 신사참배를 했으나 여태껏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반세기 전에 지은 우상숭배의 죄를 참회합니다”
무엇보다 자랑스럽고, 영광스러운 시상식장에서 목사님은 자신의 지난 과거의 죄를 공개적으로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부족하고, 형편없는지를 분명히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그 무엇으로 자신을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만 더 예를 들겠습니다. 우리 은곡교회가 속해 있는 예수교장로회 합신 교단이 만들어 질 때 큰 역할을 하셨던 귀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우리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교회가 모두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님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우리 은곡교회의 원로목사님이신 박윤성 목사님도 매우 가깝게 지내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무엇보다 존경받는 이유는 성경 66권에 대한 주석을 혼자서 다 쓰셨기 때문입니다. 주석이란 성경의 한 절, 한 절을 빠지지 않고 다 설명을 한 책입니다. 우리가 성경 66권을 다 읽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66권의 모든 절에 대해 해설을 다하셨으니 얼마나 큰일입니까? 박윤선 목사님은 40년 이상을 이 일에 매달려서 결국 성경 전체에 대한 주석을 완성하셨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 거의 모든 목사님의 책장에는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책이 있습니다. 정말 한국교회에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석책만 쓴 것이 아닙니다. 고신대와 총신대, 마지막에는 합신대학원에서 수많은 목회자들을 길러내셨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영향을 받은 수많은 제자들이 지금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평생을 다해 한국교회를 섬긴 존경받아 마땅한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박윤선 목사님께서 50년 동안 주님의 일을 한 것을 기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리가 마련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의 제자들과 성도들이 다 함께 모여서 사랑과 존경을 전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박윤선 목사님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하셨다고 합니다.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얼마든지 자랑할 것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존경과 칭찬을 받기에 마땅한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그가 한 고백은 “나는 83년 묵은 죄인”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아는 성도의 고백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성도가 가지는 모습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자기를 드러내고 싶어 하고, 사람들의 칭찬과 높임을 받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아직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영적으로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오늘 본문 18절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속이지 마세요. 우리는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자신을 나타내고, 높여야 괜찮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3:12절에 보면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자는 하나님께서 낮추십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사람, 자신이 얼마나 죄인이며, 가치 없으며, 형편없는지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높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고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 방식을 따라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지혜롭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방식으로 볼 때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안에서는 지혜로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서로 다투고 분쟁이 일어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서로 이기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 쪽이라도 지려고 마음먹으면 다툼은 나지 않습니다. 서로 이기려고 하니까 다툼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상대방이 오른 쪽 뺨을 치면 어떻게 하라고 하셨습니까? 왼쪽도 돌려 대라고 하셨습니다. 속옷을 빼앗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겉옷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하면 싸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예수님의 방식을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로마서 12:17절입니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그리고 20~21절에 보면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21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또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우스운 말입니다.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바보 취급당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지혜로운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가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또한 악을 선으로 이기려고 하는 것은 그 악이 별 것이 아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모든 일의 심판자가 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지혜입니다. 성도의 지혜는 이처럼 언제나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맡겨드리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과 성도는 똑같은 방식으로 삶을 살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들은 이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 방식을 쫓아가서는 안 됩니다. 이 세상의 지혜와 방식은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고, 또한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하는 헛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9~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
우리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우리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지혜와 방식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아서는 안 되고, 자기를 자랑하고, 높이려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절대 높이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고, 하나님 앞에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겸손히 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겸손히 의지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하나님은 분명히 높이십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높아지는 길임을 아셔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않고, 하나님만을 겸손히 의지함으로 그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이 세상을 복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세상의 지혜와 방식을 따라 교회 안에서 분열하며 다투었던 성도들에게 자신을 속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또 한 가지의 명령을 줍니다. 21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의 것임이라” 두 번째 명령은 무슨 내용입니까?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너희가 따르는 바울이나 아볼로나 베드로와 같은 그런 사람들을 자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을 자랑함으로써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죠.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사도 바울은 이 명령을 통해서 우리 신앙생활 속에 있는 아주 해로운 독소를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 해로운 독소가 무엇입니까? 바로 열등감입니다.
여러분 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지도자들 때문에 서로 다투고 분쟁했을까요? 그저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를 사랑하고 존경하면 그만인데, 왜 다른 사람들과 다투고 싸웠던 것입니까? 그 원인에는 영적인 열등감이 숨어 있습니다.
사실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은혜를 받으며,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면 목회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입니까?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도록 옆에서 돕는 사람입니다. 성도들을 돕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봉사자들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목회자들을 어떻게 생각하였습니까? 조금 심하게 말하면 자신들의 주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고린도전서 3:4절입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나는 바울에게라 하는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나는 바울의 것이다’입니다.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는 말 또한 ‘나는 아볼로의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돕기 위해 세우신 목회자를 오히려 자신들의 주인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나의 신앙의 부족함이 위대한 목회자들을 통해서 채워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가진 부족함과 연약함을 위대한 목회자를 따르는 것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열등감을 감추는 것이죠.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따르는 목회자를 비방하거나 무시하면 곧 자신을 향한 공격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툼과 분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일이 흔하게 일어납니다. 작년에 우리교회 청장년부 일일 수련회를 합동신학교에서 가졌습니다. 그런데 장소를 일찍 예약했는데, 한 주 남기고 학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학교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데모를 계획하고 있어서 장소 사용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우리 교단에서 이단성이 있다고 판정을 내린 한 여자 목사가 있는데, 그것에 항의하기 위해서 300명의 교인들이 한 달간 학교 앞에서 시위를 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다행이도 시위는 단 하루 밖에 열리지 않아서 저희들은 수련회를 잘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보면서 목회자가 성도를 섬기는 봉사자가 아니라, 성도들의 주인이 되었구나 생각했습니다. 학교 앞에 시위하러 온 그 성도들은 그들의 목사를 그들의 주인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 목사가 가진 잘못을 보지 못하고, 그 목사의 말을 따라 맹종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가 이런 오류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의 열등감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위대하다고 여겨지는 목회자를 통해서 자기 열등감을 채우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 목회자를 절대화 하고, 맹종하였습니다. 그 목회자를 위해서라면 다툼과 싸움도 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 목회자를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열감등을 채우기 위해서라는 것이죠.
이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너희의 열등감을 숨기려고 사람을 내세우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고작 사람을 앞세워야만 너희가 어떤 사람인지를 확인해야 할 정도로 그런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죠.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만물이 다 너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 줄 아느냐? 얼마나 대단한 존재가 되었는 줄 아느냐? 이 세상 만물이 다 너희의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만물 안에 무엇이 포함되어 있습니까? 22절입니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바울과 아볼로는 너희의 주인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너희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바울과 아볼로 뿐입니까?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의 것, 모두가 다 너희의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23절을 보세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것이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가장 비참하고 초라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것으로 자신을 꾸미고 포장하는 것입니다. 돈으로 꾸미고, 명예나 학위, 권력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꾸미고 포장하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원래 모습이 초라하고 비참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을 때, 우리는 온 세상의 것을 가진 자들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의 소유와 자녀로 삼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또한 온 세상의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계시록 1: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우리를 무엇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합니까?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는데, 여기서 나라는 왕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를 왕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안에 있는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우리를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재물도 권력도 명예도 지식도 자랑하지 마세요. 그런 것들이 좋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런 것들로 자랑해야 할 만큼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가 그렇게 초라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존귀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랑해야 할 것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신의 존귀한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한 분만을 자랑하는 것으로 우리는 충분합니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나타내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이 주는 두 가지 명령,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것과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는 이 명령을 우리 마음에 잘 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면서도, 그러나 이 세상에 대해서는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얼마나 존귀한 존재가 되었는지를 꼭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 때, 우리는 우리의 모습 때문에 실망하거나, 혹은 자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예수님만을 자랑하며 살아가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바랍니다. 주님만을 자랑하며, 그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가 되었는가를 앎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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