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7,주일-오전) "하나님은 충성을 보십니다." / 고전 4:1~5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 장, 279 장, 333 장, 54 장
160117_하나님은 충성을 보십니다-고한율목사.pdf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프랑스의 유명한 장군이었던 나폴레옹이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을 넘으려고 했다고 합니다. 거센 눈보라와 혹독한 추위, 험난한 산길로 말미암아 그만 많은 병사들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나폴레옹은 군사들을 독려하여 끝까지 산을 올랐고, 결국 수많은 희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산 정상에 올랐다고 합니다. 산 정상에 오른 나폴레옹이 잠시 감격해 하더니, 주변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하지요. “이 산이 아닌가보다”
물론 우스개 소리로 지어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느끼는 바가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희생을 치르고, 모든 수고를 다했다 할지라도, 그래서 산 정상에 올라왔다 하더라도, 그 곳이 원래 목표했던 곳이 아니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이처럼 허무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은 인생 마지막에 이런 일을 겪는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날에 있을 일들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우리 모든 사람들이 마지막 날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혹 여러분 중에 사람이 죽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분이 있다면 성경을 더욱 주의 깊게 보셔야 합니다.
성경은 언제나 일관되게 모든 사람은 죽게 되고, 죽은 후에는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9:2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이 확실한 것처럼, 죽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까? 무엇으로 심판을 받게 되느냐는 것이죠?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이 세상을 열심히 살아왔는데, 심판대 앞에서 그렇게 살면 안 되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면 이것은 얼마나 허망한 일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이 산이 아닌가보네’보다 훨씬 심각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산이야 다시 힘을 내서 올라가면 되지만, 죽은 후에 받게 되는 심판은 되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을 겪게 될 사람들이 분명 있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7:21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저 입으로 주여, 주여 한다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최후 심판의 기준입니다. ‘내가 평생을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왔는가?’ 이것이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준을 알지 못한 채 엉뚱한 것에 힘을 기울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7:22절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약간의 혼란을 가지게 됩니다.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고, 주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는 것, 이것들은 모두 어떤 일들입니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성령충만하고, 은사를 많이 받은 신자만이 할 수 있는 그런 특별한 일들 아닙니까? 우리는 이런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을 높이고, 진짜 사역자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어지는 7:23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예수님은 그들이 성령충만하고 능력 있는 신자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서 충격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이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정하고,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똑같이 예수님에게도 그런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선지자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귀신을 쫓아낼 때, 기적을 행할 때 보이는 것만을 보고 그 사람을 진정한 성도라고 인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선지자처럼 말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했는지, 아니면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높이고 싶어서 그랬는지를 예수님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 중심이 어떠했는지에 따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얼마나 우리에게 두려운 일입니까?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았는데, 그래서 스스로 괜찮다고 여겼는데, 재판장이신 예수님 앞에서는 기준 미달로 드러나게 된다면 이것은 얼마나 두렵고 불행한 일이 되겠습니까?
오늘 예배하는 우리 중에는 이런 불행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최후 심판대 앞에서 ‘이 산이 아닌가 보네’라고 하면 늦습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인가를 분명히 알고, 그 기준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4장 말씀이 바로 이 내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지도자였던 바울과 아볼로, 베드로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씀합니까?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겨야 합니다.
여기서 일꾼이라는 말과 맡은 자라는 말은 아주 쉽게 말하면 종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종이냐 하면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고, 오직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만 행동할 수 있는 그런 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종들에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마음 혹은 태도는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종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충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누가 구한다고 말씀합니까? 그들의 주인이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충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신의 종들을 판단하거나 평가할 때도 중요한 것은 충성입니다. 오직 충성이라는 기준으로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달란트 비유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한 집 주인이 먼 여행을 떠나는데, 세 명의 종에게 큰돈을 맡기게 됩니다. 첫 번째 종에게는 5달란트를, 두 번째 종에는 2달란트를, 마지막 종에게는 1달란트입니다.
이렇게 주인이 달란트를 주고 떠나자, 세 명의 종들은 그 받은 달란트를 가지고 어떻게 할지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5달란트와 2달란트를 받은 종은 그것을 가지고 장사를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1달란트를 받은 종은 만약 장사를 하다가 받은 달란트를 잃게 되면 큰 화를 당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흘러서 주인이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에 돌아온 주인은 세 종을 불러서 그간에 어떻게 했는지를 보고 받았습니다. 5달란트를 받은 종은 장사를 하여, 열심히 장사를 하여 5달란트를 남겼다고 보고했습니다. 총 10달란트가 된 것입니다. 2달란트를 받았던 종도 마찬가지로 장사를 하여, 2달란트를 남겨 총 4달란트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종이었습니다. 1달란트를 받은 종은 만약 내가 1달란트를 가지고 잘못 사용했다가 그것을 잃어버리게 되면 주인에게 야단맞을 것을 생각해서 땅 속에 숨겨 두었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받은 한 달란트를 그대로 주인에게 주었습니다. 이 때 주인이 크게 화를 냈습니다. 얼마나 화를 내었냐면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무엇이 이처럼 주인을 화나게 하였을까요?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이 다른 종들처럼 더 많은 이익을 얻지 못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주인이 다섯 달란트를 번 종과 두 달란트를 번 종에게 하신 칭찬이 똑같다는 점에서 알 수 있습니다. 주인이 뭐라고 이 두 종에게 칭찬하였습니까?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인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주인은 이 칭찬을 다섯 달란트 번 종과 두 달란트 번 종에게 똑같이 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주인이 종들에게 원한 것은 단순히 더 많은 이익을 남기는 것에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인의 뜻을 깨닫고, 그 뜻에 충성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왜 종들에게 달란트를 주었는지를 깨닫고, 그것에 충성하는 것을 주인이 기대하였다는 것이죠.
한 달란트 받은 종이 실패한 것은 더 많은 달란트를 벌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실패는 주인의 뜻이 무엇인지 몰랐고, 또한 주인이 요구하는 것이 주인의 뜻에 충성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의 실패는 곧 충성의 실패였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 모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충성입니다.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이 가장 바라십니다. 그런데 충성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충성이란 변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변하지 않고, 꾸준히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충성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알 수 있는 성경이야기가 있습니다. 구약 예레미야서 35장에 보면 레갑 족속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레갑 족속들을 성전 안에 있는 한 방에 모으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에게 포도주를 마시게 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가가 포도주를 마시라고 했지만, 레갑 족속 중 그 어느 누구도 포도주를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들이 이르되 우리는 포도주를 마시지 아니하겠노라 레갑의 아들 우리 선조 요나답이 우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와 너희 자손은 영원히 포도주를 마시지 말며 7너희가 집도 짓지 말며 파종도 하지 말며 포도원을 소유하지도 말고 너희는 평생 동안 장막에 살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머물러 사는 땅에서 너희 생명이 길리라 하였으므로”(35:6~7)
레갑 족속은 자신들의 조상이었던 요나답이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포도주뿐만 아니었습니다. 집도 짓지 않고, 포도원도 소유하지 않고, 평생 장막에 살았습니다. 단지 그들의 조상이 그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후손들이 대대로 그 말을 지켜왔던 것입니다.
레갑 족속이 이렇게 말하자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이렇게 임하였습니다. 예레미야 35:14절입니다. “레갑의 아들 요나답이 그의 자손에게 포도주를 마시지 말라 한 그 명령은 실행되도다 그들은 그 선조의 명령을 순종하여 오늘까지 마시지 아니하거늘 내가 너희에게 말하고 끊임없이 말하여도 너희는 내게 순종하지 아니하도다”
이 하나님의 말씀에는 끝까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안타까움과 함께 조상이 한 말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레갑 족속에 대한 부러움이 담겨져 있습니다. 여러분 레갑 족속이라고 해서 왜 포도주를 마시고 싶어 하지 않았겠습니까? 레갑 족속이라고 해서 왜 안정된 집을 갖고, 포도원을 가꾸어 편안한 생활을 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조상이 한 말에 충성하였습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상의 말을 끝까지 지켰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레갑 족속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고자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너희도 나의 말에 충성할 수 없겠냐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도 이처럼 대대로 지켜지는데,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왜 너희는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며, 어기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을 원하시는데,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찾기 어려운 사람들이 충성된 사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뛰어난 성경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많습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 여러 큰 은사와 은혜를 받은 사람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이끄는 그런 능력 있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변하지 않는 소나무처럼 하나님의 뜻에 묵묵히 충성하는 사람은 쉽게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충성된 사람을 찾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이 아닌 우리 기준으로 교회 안에서 봉사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준이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에게 보여 지고, 인정받고, 높임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람을 따라, 환경과 상황을 따라 움직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곳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게 얼마나 유익이 되고,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를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교회 안에 재능 있는 사람도 많고, 능력 있는 사람도 많고, 큰 성과를 내는 사람도 많이 있지만, 정작 묵묵히 충성하는 성도는 찾아보기 힘든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충성된 사람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우리가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은 작은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자기 스스로도 자신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울이 교만해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그가 대충대충 주의 일을 했다면 이 말은 교만한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언제나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항상 주의 일에 힘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자기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은 내가 아무리 잘하고 내세울 그런 것이 있어도 자랑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자신이 세운 공로로 말미암아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인정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절입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의 판단뿐만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판단하는 것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이러한 사람의 판단이 자기를 하나님 앞에 의롭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4절 하반절에 나오는 것처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이 항상 하나님 앞에서 충성할 수 있었던 이유, 사람들의 여러 비난과 판단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충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주님만이 자신의 심판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사도 바울이 주의 일을 하면서 신경 썼던 것은 사람들의 평가나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판단도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항상 신경 썼던 것은 마지막 날, 즉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있게 될 최후 심판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최후 심판 자리에서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게 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은 사람들이 몰라주고, 또한 그래서 억울하게 하고, 힘들게 한다고 해도, 바울은 마지막 날 있을 심판을 생각하면서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것입니다. 마지막 날 있을 심판은 그야말로 모든 것이 드러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담겨 있던 것조차도 환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은 항상 하나님 앞에 충성함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켰던 성도들에게는 더없는 영광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드러나서 그 사람의 충성과 주님을 향한 사람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저 보이는 모습으로만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사람들의 영광을 받았던 그 사람들은 그 자리가 수치와 부끄러움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람의 눈은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최후 심판대 앞에서 모든 것이 환하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사람을 따라, 명예를 따라, 권력을 따라, 재물을 따라 그렇게 요동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늘 묵묵히 충성하는 삶을 사시겠습니까? 물론 충성하는 삶이 쉬운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를 부인하는 것이고, 나를 죽이는 일입니다. 사람들의 오해와 판단에도 묵묵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신의 백성을 기뻐하십니다. 그 충성된 종을 정말로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분명히 최후 심판대 앞에서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인정하여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다가보면 억울할 때가 있습니다. 마음이 상할 때가 있고, 사람이나 어떤 일 때문에 괴로울 때가 분명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하나님은 충성하는 사람을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부르신 자리에서 묵묵히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이나 칭찬이 아니라, 오직 마지막 날 있을 최후 심판을 바라보면서 내게 주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충성된 백성을 통해서 오늘도 주님의 교회를 세워 가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충성된 성도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조금 부족하고, 아는 것이 많지 않아도,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많지 않아도 실망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내놓으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단 하나입니다. 충성입니다. 어느 형편과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그런 충성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충성하면 하나님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꼭 기억하고, 언제나 하나님 앞에 충성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사람 때문에, 환경 때문에, 또 무엇 때문에 변하지 않고, 오직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때문에 그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여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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