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1,주일-오전)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 고전4:14~21 /고한율목사
찬송가 : 1 장, 449 장, 455 장, 54 장
160131_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한율목사.pdf
아이들이 읽는 동화 중에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가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 옷을 정말 좋아하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이 임금은 좋은 옷이 있다고 하면 반드시 구해 입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옷을 사랑하였습니다. 어느 날 그 나라에 사기꾼 두 명이 들어왔습니다. 이 사기꾼들은 그 나라 임금이 옷을 너무 좋아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옷을 만들 수 있다고 소문을 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은 곧 임금의 귀에 들어갔고, 임금은 두 사기꾼을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임금은 두 사기꾼에게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가장 좋은 옷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 때 두 사기꾼이 임금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옷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나쁜 짓을 한 사람이나, 바보에게는 이 옷이 보이지 않습니다.” 임금은 그래도 괜찮으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만들라고 부탁했습니다.
이 두 사기꾼들은 그 때부터 옷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임금이 준 돈으로 옷을 짜는 베틀을 사서 옷을 만드는 시늉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이 사기꾼들은 아무 것도 없는데 그저 옷을 만드는 흉내만 낸 것입니다.
임금은 옷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똑똑하고 믿을 만한 신하를 보내서 확인해 보도록 했습니다. 임금의 명령을 받고 두 사기꾼이 옷을 만드는 곳에 간 신하는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옷을 만드는 것 같은데, 자기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만약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말하면 자신이 나쁜 짓을 한 사람이거나 바보가 되기 때문에 신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신하는 임금에게 돌아가서, 정말로 아름다운 옷이 만들어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나쁜 짓을 한 사람이나거나 바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하의 말을 들은 임금은 점점 더 기대하면서 옷이 완성되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사기꾼들이 완성된 옷을 가지고 임금에게 왔습니다.
사기꾼들은 아무 것도 없는데도 마치 옷이 있는 것처럼 손을 내밀어 임금에게 옷을 받으려고 말했습니다. 임금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 것도 안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임금 자신이 나쁜 짓을 했거나, 바보가 되기 때문에 임금은 그렇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이라고 말하면서 그 옷을 실제로 입는 척을 하였습니다.
그 주변에 있던 신하들도 모두 너무나 아름다운 옷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고 생각한 임금은 거리에 나가서 백성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퍼레이드를 했습니다. 사실 임금은 속옷만 입은 채로 거리 퍼레이드를 한 것입니다. 하지만 속옷만 입은 임금을 본 백성들은 임금의 옷은 나쁜 짓 한 사람과 바보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모두들 가장 아름다운 옷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그렇게 퍼레이드를 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한 아이가 소리를 지르며 웃기 시작했습니다. “임금님 좀 봐라. 옷을 하나도 안 입었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이 아이의 소리를 들은 백성들은 그 때부터 웅성 웅성대면서 임금이 벌거벗었다는 사실을 서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때 임금은 자신이 사기꾼들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바보처럼 속았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보여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끝까지 벌거벗은 채로 당당하게 거리를 행진하였습니다.
제가 이 동화를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 나오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바로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믿음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18~1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9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스스로 교만해 진 성도들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무엇보다 “말”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말을 많이 하는 것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이 많다”는 것은 말만 많이 하고,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오해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말을 한다고 해서, 우리가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나쁜 사람도 얼마든지 좋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생각을 가지고, 좋은 말을 한다고 해서 좋은 사람인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좋은 행동을 해야 좋은 사람이 됩니다. 오늘날 교회의 잘못에 대해서 비판하는 말을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물론 잘못된 일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것을 지적해야 합니다. 하지만 말만 하고,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3: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아무리 현실을 정확히 분석하여서 옳은 말을 할지라도, 사랑으로 그 말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나의 말은 그저 아무 의미 없이 울리는 소리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던 스스로 교만해진 성도들이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말만 요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말만 들으면 그들은 이미 천사와 같이 아주 신령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지난주에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그들은 이미 이 땅에서 왕이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신앙인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왕이 된 그들에게 너희가 말만 그렇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너희에게로 가면 너희의 말이 아니라, 너희의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의 본질은 말에 있지 않고, 능력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능력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벌거벗은 임금과 같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너희 스스로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옷을 입은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지만, 실상은 벌거벗었다는 것이죠. 그 삶 가운데 신앙의 능력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데, 그저 말로만 서로의 신앙을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벌거벗은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을 감추려고 서로에게 거짓말을 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이 되어 버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현실이었습니다. 신앙의 알맹이는 없고, 신앙의 껍데기만 그럴 듯한 모습입니다. 목사라는 장로라는 권사라는 안수집사라는 껍데기는 있는데, 그 안에 충성과 헌신, 사랑, 희생은 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녀서 복음의 내용은 아는 데, 삶을 변화시키는 복음의 능력은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교회의 질서와 전통에 대한 열정은 뜨거우면서 잃어버린 한 영혼에 대한 마음은 냉랭합니다. 그야말로 벌거벗은 임금님과 같은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나는 너희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자랑하는 신앙의 껍데기가 아니라, 너희의 신앙의 실체를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말씀하는 능력, 신앙의 실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우선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능력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생각하는 능력과는 분명 다른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생각한 능력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이 생각하는 능력은 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능력과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즉 사람들에게 내세울 만하고, 자랑할 만한 것들이었습니다. 단적인 예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따르는 지도자들에게 집착하였습니다. 지도자가 곧 그들이 자랑하는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지도자를 따르는 성도들과 다투고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능력은 이처럼 내세우고 자랑할 수 있는 그런 세상적 의미에서의 능력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능력은 바로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것, 예수님께서 묵묵히 십자가의 길을 끝까지 따라 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어떤 일을 신앙의 능력으로 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가난했던 우리가 부자가 되고, 병들었던 우리가 건강해 지고, 고난 가운데 빠졌던 우리가 구출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믿음 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은혜를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믿음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마태복음부터 요한복음까지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다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살라고 말씀합니까? 나처럼 물로 포도주를 만들어라,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여라, 병든 자를 고쳐라, 마귀를 쫓아내라, 이것이 진정한 신앙생활이니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씀한 적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행하신 기적을 우리도 똑같이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마가복음 16장에 보면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그런 기적적인 일들이 함께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라고 전혀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6:24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앙의 본질, 우리 성도의 삶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신앙의 본질은 이것입니다. 자기를 죽이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것이에요.
기적을 행하고, 성공을 하고, 사람들의 인정과 명성을 얻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왕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있어서,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7:13절에 보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하지만 문이 좁고 길이 험하다고 해서 다른 길로 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 길만이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해 주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넓고 편한 길이면 무엇 합니까? 만약 그 길이 우리를 멸망으로 인도한다면 우리는 그 길로 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의 말이 아니라, 능력을 알아보겠다는 것은 너희가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고 있는지를 보겠다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넓고 편한 길이 아닌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고 험한 길로 너희가 가고 있는지를 알아보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도 똑같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주님도 우리의 말이 아닌 능력을 보시겠다고 말씀합니다. 겉으로 나타나 있는 신앙의 껍데기가 아니라, 정말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묵묵히 따라가고 있는가를 보시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제가 이 땅의 생명을 다하고 우리 주님 앞에 섰을 때, 주님께서 제가 목사였다는 사실을 크게 생각할 것 같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제게 물으실 것은 이것이 될 것입니다. “그대는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랐는가?” 이것이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것을 놓치고 다른 엉뚱한 곳에 신경을 쓰고 살면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는 귀한 권면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권면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어떤 것을 아는 지식에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본질은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내가 아는 것을 너희도 알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본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바울이 나를 본받으라고 할 때 그것은 인간 바울 그 자체를 닮아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바울을 닮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고린도전서 11: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았기 때문에, 그런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았기에, 그런 자신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본받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마치 바울은 자신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 앞에 신앙의 모델로 자신을 내놓은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항상 보고 닮을 수 있는 모델입니다.
큰 바위 얼굴이라는 소설을 아시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한 아이가 어릴 때부터 마을 산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닮은 바위를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 마을에는 바위와 같은 얼굴을 한 위대한 인물이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는 전설이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매일 그 바위 얼굴을 보면서 그 사람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소설의 끝에 보면 결론이 어떻게 됩니까? 바위 얼굴을 한 사람이 실제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누구였습니까? 어릴 때부터 그 바위를 보고 자란 그 아이였습니다. 항상 사모하는 마음으로 바위 얼굴을 쳐다보다가 자신이 그 얼굴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본 적이 없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을 보면서 예수님을 닮아가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은 특별히 목사인 저를 포함하여 성도들을 섬기는 모든 직분자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 직분자들이 성도들을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통해서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감히 말하면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을 본받는 것처럼 너희도 예수님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우리를 비교하는 것은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전수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처럼 본받음으로 된다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섬기는 직분자들의 가장 큰 책임이 이것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예수님을 본받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에게 우리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만약 완전해야만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다면 사도 바울도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예수님을 완전히 닮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감히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은 어떻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었을까요? 오늘 본문 15절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바울은 자신을 누구라고 이야기합니까? 스승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스승의 정확한 뜻은 어린 아이를 돌보는 보모입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보모가 아니라,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복음으로써 자신이 낳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아버지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아버지이기 때문에 자신이 부족하더라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자식에게는 가장 훌륭하고 존경받는 것이 부모입니다. 부모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적어도 자식 앞에서는 가장 훌륭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교회를 섬기는 모든 직분자들이 아버지의 마음, 어머니의 마음을 가지고 성도들을 대한다면 우리 또한 사도 바울처럼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 그 교회는 모든 성도들이 함께 예수님을 닮아가는 참으로 아름답고 복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저는 저와 우리 교역자들이 우리 교회 성도님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목사와 교역자가 되기 바라고, 장로님들과 안수집사님들이 아버지와 같은 장로님, 안수집사님들이 되기 바라고, 권사님들이 어머니와 같은 권사님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일학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선생님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영적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그저 나 하나의 신앙을 주체하는 것도 벅차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누군가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서 신앙의 모범이 되는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영적인 아버지와 어머니들이 점점 많아질 때 우리 교회는 참으로 복된 교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항상 복음 안에서 새 생명이 잉태되는 그런 복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신앙의 껍데기를 붙드는 말뿐인 신앙이 아니라,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가는 신앙의 본질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향해서 영적인 아버지와 어머니와 같이 되어서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 하나 밖에 모르는 신앙을 넘어서서 다른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그런 귀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삶을 살기를 소원하는 우리들에게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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