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 설교

(02/07,주일-오전)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 마 6장 19 ~ 24절 / 고한율목사

(02/07,주일-오전)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 마 6장 19 ~ 24절 / 고한율목사



160207_설날-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고한율목사.pdf


찬송가 : 2 장, 40 장, 435 장, 54 장


 내일은 음력으로 설날입니다. 음력으로 하면 내일이 2016년이 시작하는 날입니다. 우리가 양력으로는 이미 2016년을 시작하여 한 달이 지났지만, 음력으로 하면 또 다시 새해를 시작하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에게 주어진 두 번째 새로운 시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2016년을 시작하면서 새해에는 이렇게 살아야지, 이런 것은 고쳐야지라고 생각한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듯이 며칠 그렇게 열심히 살고는 다시 이전으로 돌아간 분들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설날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두 번째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2016년을 시작하며 품었던 마음을 다시 새롭게 가다듬는 설날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좀 더 큰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단지 올 한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 전체 인생을 두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성경말씀을 통해서 확인해 보려고 합니다. 여러분, 군에 다녀온 남자 성도님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군대에 가면 사격을 합니다. 총을 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아무렇게나 총을 쏴도 악당들이 다 알아서 죽습니다. 그래서 영화만 보면 총은 쏘기만 하면 다 맞는 줄 알아요. 

 하지만 군대 다녀오신 분들은 다 압니다. 사실 사격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쏜다고 다 알아서 맞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잘 조준하고 쏘아도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총알이 날라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그 총은 영점이 맞춰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영점이 맞지 않는 총은 올림픽 사격 대표선수가 쏜다 해도 과녁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사격을 시작하기 전에 총의 영점을 맞추는 일을 합니다. 총에는 가늠자와 가늠쇠가 있습니다. 총을 쏘는 사람은 가늠자와 가늠쇠를 일치시킨 후에 목표를 향해 쏘게 됩니다. 그런데 가늠자와 가늠쇠가 일치했음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벗어나게 총알이 날라 간다면, 가늠자를 조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총알이 정확하게 목표까지 날아가도록 하는 것이 영점을 맞추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영점을 맞추기 위해서 하는 사격을 영점 사격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군대에 가면 제일 먼저 하는 사격이 영점 사격입니다. 처음부터 저 멀리에 있는 과녁을 보면서 쏘지 않습니다. 총의 영점이 잡혀 있지 않으면 절대 과녁에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먼저 영점 사격을 하여서 총알이 바르게 나가도록 조정하는 일을 먼저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에게도 영점을 맞추는 일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영점을 맞추지 않으면, 열심히는 살았는데, 그 결과가 전혀 엉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영점을 맞추지 않은 총에서 나간 총알이 목표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곳에 날라 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사는 것도 정말로 중요하지만, 어떤 방향으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 인생의 영점을 맞춰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우리 인생의 영점사격을 하여, 우리 인생이 나아가야 할 정확한 방향을 알게 되는 복된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 인생의 영점, 즉 성도인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바른 방향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 19~20절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20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보물을 어디에 쌓을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보물이란 단지 눈에 보이는 재물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될 수도 있고, 권력이 될 수도 있고, 명예나 인기 등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모두는 우리에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런 것들을 추구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에, 결국 보물을 어디에 쌓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며 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보물을 쌓아둘 수 있는 곳이 두 곳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땅과 하늘입니다. 


 즉 우리들은 땅에 우리의 보물을 쌓아두든지, 아니면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19절 하반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우리가 보물을 이 땅에 쌓아두어서는 안 되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귀한 보물을 쌓아두기에는 이 땅이 너무나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보물을 쌓아두면 좀벌레가 파먹고, 녹이 슬고, 도둑이 와서 훔쳐간다고 말씀합니다. 이 땅에는 우리의 보물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있는 곳이 전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IMF 경제위기 때 뼈저리게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수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모든 것을 잃는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 땅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귀중한 보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안전하게 보관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보물을 쌓아야 할 곳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은 이 땅과 달리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20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은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하늘에는 좀벌레도 없고, 녹도 슬지 않으며, 더욱이 보물을 훔쳐갈 도둑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위험한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씀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어떻게 하늘에 보물을 쌓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늘이 어떤 곳이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예수님이 여기서 말씀하신 하늘은 그저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하늘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은 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 천국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즉 주기도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은 어떻게 시작됩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십니까? 바로 하늘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보물을 쌓아야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하나님께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그것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가 추구해야 하는 삶의 방향, 즉 우리가 맞춰야 할 영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방향대로 살아간다면 결단코 우리 인생은 중간에 멈추거나, 도둑맞거나, 허망하게 끝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보물이 계속해서 차곡차곡 쌓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물을 하늘보다는 땅에 더 쌓고 싶어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보다는 내가 원하고 만족하는 삶을 더 살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인 우리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주에 우리는 충격적인 뉴스를 전해 들었습니다. 독일에서 신학박사를 받은 교수이자 목회자가 자신의 막내 딸을 때려서 죽이고는 몇 달 동안 시체를 숨겼다가 발각이 된 사건입니다. 


 경찰은 그 사람이 왜 자수를 하지 않고 시체를 그렇게 몇 달 동안 숨겼는지에 대해서 조사를 하였는데, ‘사회적 지위를 잃을까봐’ 두려워서 그렇게 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고 합니다. 자신이 신학박사라는, 교수라는, 목사라는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이 죽인 딸의 시체를 몇 달 간이나 숨겼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동안 아주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극단적인 경우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성도라 하더라도 얼마든지 땅에 보물을 쌓고 싶어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내용의 기도를 가장 많이 합니까?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를 많이 하십니까? 아니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대부분이 이 땅에 보물을 쌓기 위한 내용은 아닙니까? 


 여러분, 구약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하나님께 항상 책망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해서도 아닙니다. 겉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에는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하나님께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혼합주의적인 신앙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혼합주의적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기는 하지만, 하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도움이 된다는 생각하는 우상도 함께 믿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신앙, 이것을 혼합주의적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지만 우상도 함께 믿었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을 때는 풍년을 주는 신으로 여겨졌던 바알에게 가서 도움을 요청합니다. 하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바알과 함께 믿는 것입니다. 자식을 낳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산의 신으로 여겨졌던 아세라에게 가서 기도하였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기는 믿었지만, 하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우상도 함께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야단친 것은 바로 이런 혼합주의적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도 믿고, 우상도 믿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바르게 믿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 참된 신은 오직 우리가 믿는 하나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사야서 42: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는 것은 결코 진정한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인생의 보물을 쌓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우리는 이 땅에 보물을 쌓으면서도, 동시에 하늘에도 보물을 쌓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재물과 권력, 명예를 도저히 놓지를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하늘에도 보물을 쌓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나름대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했던 혼합주의적인 신앙의 모습입니다. 


 얼마 전 기독교 신문을 읽다가 기가 막힌 내용을 읽었습니다. 성도 중에 점집에 가는 사람이 그렇게 많다는 것입니다. 기자가 점쟁이에게 가서 직접 조사를 해 봤더니, 자신에게 오는 손님 중 90%가 기독교인이라도 대답하더랍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목사들과 선교사들도 온다는 것입니다. 와서 앞으로 목회를 어떻게 할지, 선교지를 어디로 나가야 할지 물어본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뉴스 기사의 마지막 부분은 이런 황당한 이야기로 끝을 맺었습니다. 그 점쟁이가 너무 인기가 있어서 예약을 반드시 해야 하는데, 금요일 저녁에는 예약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점쟁이가 교회에서 하는 금요심야기도회에 참석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말 기가 막힌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땅에서도 보물을 쌓고 싶어 하고, 하늘에서도 보물을 쌓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둘 다 할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물이 있는 곳에 그 사람의 마음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입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보물이 있는 곳에 당연히 우리의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나눠질 수 있습니까? 나눠질 수 없습니다. 땅에 보물을 쌓으면 땅에 마음이 있게 되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면 하늘에 마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땅과 하늘에 각각 우리의 마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택해야 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두 사람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어떤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난 너만을 사랑해”라고 늘 말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남자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또 한 명 생겼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가 원래 사랑했던 여자에게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난 너도 사랑하고, 그 여자도 사랑하게 되었어.” 이 말을 들은 여자의 반응은 어땠을까요? 따귀 한 대 때리고 뒤돌아 갔겠죠. 


 여러분 사랑은 나눠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사랑하고 우상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따르면서, 이 세상도 따를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둘 다 사랑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반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재물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지, 재물을 사랑할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땅에 보물을 쌓을 것인지, 하늘에 보물을 쌓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왜 하늘이 아니라, 땅에 보물을 쌓고 싶어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땅에 보물을 쌓아 두면 그것이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입니다. 돈이나, 권력, 명예 등은 실제로 눈에 보이거나 우리 피부로 느껴지는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많으면 우리 마음이 안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으려고 애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땅에 쌓는 재물이 지금은 눈에 보이고, 피부에 느껴져서 우리를 안전하게 하고, 든든하게 해 주지만 그것이 결코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 땅에 쌓은 보물은 좀이 먹고, 녹이 슬고, 도둑이 와서 훔쳐가게 되어 있습니다. 순식간에 다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 땅의 쌓은 보물은 그저 이 땅에서만 쓸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죽으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들 중에 무엇을 가져갈 수 있습니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죽어갈 때, 그 동안 돈을 많이 못 모아서 후회하시는 분을 보신 적 있습니까? 아니면 권력을 누리지 못해서, 명예를 얻지 못해서 슬퍼하신 분 본 적 있습니까? 그런 것으로 후회하거나 슬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을 때는 이 땅에 쌓은 보물들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기 때문입니다. 정말 아무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으면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늘에 쌓은 보물은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쓸모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이 땅의 생명을 다할 때, 하늘에 쌓은 보물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승리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이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힘쓰는 것,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그런 삶을 살아갈 때 우리는 땅에 보물을 쌓는 삶보다 더 복되고 든든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33절에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은 이 땅에서는 아무 것도 없이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약속하셨습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즉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어떻게 해 주시겠다고요?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약속이 성취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하늘에 보물을 쌓는다는 것은 이 땅에서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늘에 보물을 쌓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이 땅에서 부요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의 재물이나 권력, 명예를 쫓아가면 그것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쫓아가도 원하는만큼 얻을 수 없습니다. 마치 사막에서 신기루를 잡으려고 쫓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가면 우리가 쫓아가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충분하게 공급하시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람이 살 수 없는 땅, 광야에서 40년 동안 살게 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공중의 나는 새와 들에 핀 백합화도 먹이시고 입히시는 하나님입니다.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녀 된 우리들을 가장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을 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땅에 보물을 쌓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으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아버지만을 믿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하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굳게 믿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땅이 아닌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무슨 일이든 결정하는 삶, 그런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성도가 마땅히 살아야 할 삶이라고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영점이 하늘에 맞춰져 있습니까? 아니면 땅에 맞춰져 있습니까? 하늘에 보물을 쌓고 계십니까? 아니면 땅에 보물을 쌓고 계십니까? 만약 땅에 보물을 쌓는 삶이라면 지금이라도 돌이키셔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셔야 합니다. 좀이 먹고, 녹일 슬고, 도둑이 다 훔쳐간 다음에 깨닫는다면 그것은 이미 늦은 것입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뜻대로, 말씀대로 살려고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쌓은 보물은 절대 좀먹지 않고, 녹슬지 않고, 도둑맞지 않습니다. 하늘에 쌓은 보물은 차곡차곡 계속 쌓여갈 것이고, 결국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승리의 면류관으로 빛나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 주셔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이 얼마나 복된 지를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이 땅을 살아가는 가장 든든한 길임을 알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함으로 모든 것을 더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항상 누리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되게 하시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