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5,성탄절) "이름을 예수라 하라" / 마 1:18~25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15장, 126장, 122장
오늘은 성탄절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사실 이 성탄 사건은 우리가 이해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실 필요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왜 인간이 되셨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하면 우리들은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것은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이 대답은 성경이 말씀하는 것이므로 정답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이 필요한 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까? 인간입니까? 당연히 인간입니다. 누군가가 구원해 주지 않는다면 모든 인간은 한 명 예외 없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얻기 위해 누가 노력을 해야 할까요? 당연히 구원이 필요한 인간이겠죠. 그런데 성탄 사건은 무엇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까? 구원이 필요한 우리는 정작 아무 것도 안하는데, 하나님께서 스스로 나서서 우리를 위해 상상도 못할 일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유익은 고사하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 됩니다. 자신을 부인한다는 것은 자신을 버린다는 것이고,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굴욕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왜 이 일을 하나님이 스스로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4:9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말씀합니까?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성탄 사건은 곧 하나님의 사랑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자신을 낮추게 됩니다. 사랑하면 자신을 기꺼이 버리게 됩니다.
우리나라 6.25 전쟁 때 있었던 실화라고 합니다. 미군이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다리에서 갓난 아이 울음소리가 나더랍니다. 그 때가 한 겨울이었습니다. 이렇게 추운데 아이 울음소리가 난다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그 미군이 차를 멈추고, 다리 아래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리 아래에서 충격적인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 벌거벗은 여인이 웅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렇게 추운데 옷을 다 벗고,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가까이 가보니 여인의 몸은 이미 얼어서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의 품 안에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자세히 보니 여인은 자신의 옷을 벗어서 무언가를 감싸서 그것을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미군이 옷을 펼쳐보니 거기에는 놀랍게도 갓난아이가 있었습니다. 미군이 다리를 건널 때 들었던 울음소리를 냈던 아이였습니다. 피난을 가던 어머니가 추운 날씨에 아이가 어떻게 될까봐 자신의 옷을 다 벗어 감싸고, 자기 품 안에 꼭 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고 미군은 어머니의 사랑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너무 딱하여서 자신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얼마 안 되어 미군은 그 아이를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한참 흘러서 아이가 성인이 되었을 때, 미국 아버지는 그 아이에게 어머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들은 그 아이는 한국으로 가서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죽은 그 다리 밑으로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옷을 다 벗어 땅을 덮으며,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 어머니 얼마나 추우셨어요?”하고 울면서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하면 희생하게 됩니다. 사랑하면 자신을 버리게 됩니다. 바로 성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희생하고, 자신을 버리신 사건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은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 듣듯이 성탄 이야기를 들으시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스스로를 희생하시고, 버리시면서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 바로 성탄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내버리고, 인간이 되셔서 나를 찾아오셨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정말로 경험하고 안다면 우리의 삶은 놀랍게 변화될 것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셨다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로마서 8:31~32절입니다.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저는 이 믿음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아들을 우리에게 주셨다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못 주실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은 신자의 믿음이 아닐까요? 가장 귀한 아들도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주셨다면 하나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주시지 못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필요를 아실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필요를 채워주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장 복된 길로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탄절을 맞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은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고, 성탄 사건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사랑인 것을 깨닫고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처럼 성탄은 하나님의 사랑 사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탄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기 위해서는, 이 사랑이 누구를 향한 사랑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이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한 사랑입니다. 제가 방금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모습의 우리를 사랑하셨느냐는 것이죠.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 그의 약혼자인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게 될 것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주목할 말씀은 22~23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2절에 보면 예수님의 탄생이 그저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이 성취된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23절에 구약성경을 인용하는데, 바로 이사야서 7:14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2가지 점에서 중요한데, 첫째는 예수님이 처녀의 몸에서 탄생할 것을 예언했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처녀의 몸에서 날 예수님이 임마누엘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해서 이사야서 7:14절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이 말씀이 어떤 상황에서 주어지게 되었냐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남유다의 아하스 왕에게 주셨던 말씀입니다. 당시 남유다 왕국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과 그 위에 위치한 아람이라는 나라가 동맹을 맺고 남유다 왕국을 공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두려운 일이었는지 아하스 왕과 그 백성들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릴 정도였다고 말씀합니다. 굉장히 무서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에게 아하스 왕에게 전달할 말씀을 주십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마치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부지깽이가 뭔지 아십니까? 아궁이에 있는 장작을 움직일 때 사용하는 가는 막대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둘을 막을 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말한 것을 확실하게 지키겠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하신 것은 매우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징조는 누가 구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기드온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는 사사로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기드온은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무엇이기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겠냐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께 징조를 구합니다. 마당에 양털 뭉치를 놓을테니, 새벽에 이슬이 내릴 때 양털 뭉치에만 내리고, 나머지 땅에는 내리지 않도록 해 달라고 합니다. 보통 때라면 당연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징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실제로 양털 뭉치에만 이슬을 내리시고, 나머지 땅에는 이슬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기드온이 양털 뭉치를 짜보니 물이 한 가득 나왔는데, 마당의 다른 땅은 전혀 물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의심 많은 기드온은 한 번 더 징조를 구합니다. 이번에는 거꾸로 양털만 마르고 주변 땅은 이슬로 다 젖게 해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은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이 징조를 보고 기드온은 꼼짝없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사로 세우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이처럼 징조는 믿음 없는 우리 인간이 어떤 일에 확신을 얻기 위해서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하스 왕에게는 누가 징조를 구했습니까? 아하스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아하스에게 먼저 징조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확실하게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과 아람의 연합국을 하나님께서 물리쳐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징조를 구하라고 했을 때 아하스가 뭐라고 대답을 하였습니까? 기가 막힌 대답을 했습니다. 이사야서 7:12절입니다.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아하스 왕이 뭐라고 대답했습니까? 나는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여호와를 시험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아하스 왕이 정말 믿음이 좋은 사람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징조를 구하라고 했는데도, 나는 징조 없이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라고 말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하스 왕의 이 말은 결코 믿음의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하스가 믿음이 있어서 ‘징조 없이도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이 말은 하나님을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아하스 왕은 북이스라엘과 아람이 동맹하여 전쟁을 해 올 때, 앗수르라는 강대국에 구조요청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하스 왕은 왕궁과 성전 창고에 있는 금, 은, 보석을 다 모아 가지고 앗수르 왕에게 바치면서 자신들을 구원해 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앗수르라는 든든한 구원자가 있었기 때문에 아하스 왕은 하나님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앗수르만 도와주면 지금의 어려움에서 얼마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아하스 왕은 확신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는 것은 아하스 왕이 얼마나 하나님을 무시했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보다 앗수르 왕을 더 의지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힘보다 자신의 지혜와 힘을 더 믿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하스 왕의 모습은 다름 아닌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죄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주인 자리에서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가 차지하는 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죄의 본질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뱀이 아담과 하와에게 이렇게 유혹했습니다. “이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 없이도 너희가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뱀의 말을 들은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몰아내고, 자기 마음대로 살게 된 아담과 하와는 정말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아담과 하와에게 주어졌던 것은 복된 삶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은 죽음이었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을 몰아냈기 때문에 죽음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때부터 모든 인간은 죽음 아래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죽음 아래에서 살게 되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염려와 근심, 불안, 공포, 결핍, 다툼, 이기심 속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모두 죽음이 가져다주는 증상들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죽음의 삶을 벗어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하나님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죽음의 권세가 떠나가고, 생명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게 됩니다. 이것을 성경은 구원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돌아오라고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꼭 아하스 왕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고, 염려하지 말라고 하셔도 듣지 않습니다. 징조를 구하라고 해도 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앗수르 왕이 하나님보다 더 확실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든든하게 생각하고, 하나님보다 권력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의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도 아하스 왕처럼 나는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고 믿음이 큰 것처럼 말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보다 돈이, 권력이, 사람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죄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을 무시하고 이 세사의 것들을 의지하고, 자신의 지혜와 힘을 의지하는 자들은 결국 어떻게 됩니까? 망하게 됩니다. 비참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결말은 결코 복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성탄의 놀라운 소식이 있습니다. 여러분, 아하스 왕이 이처럼 하나님보다 앗수르 왕을 의지하려 할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의 탄생을 예언한 말씀이 하나님을 무시하는 아하스 왕에게 주어졌던 것입니다.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버리고 앗수르 왕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하스 왕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대신 어떤 약속을 주셨습니까? 한 처녀가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가 바로 임마누엘이 될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에 대한 약속을 주셨던 것입니다.
아하스 왕과 당시 백성들은 하나님을 철저하게 무시하였습니다. 하나님보다 앗수르를 더 의지하였고, 자신들의 지혜와 힘을 더 믿었습니다. 그렇게 스스로 멸망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하스 왕과 백성들의 불신앙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구원자를 보내주실 것에 대한 약속을 주시면서, 그 구원자가 임마누엘, 즉 너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될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도망가려고 하는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에게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성탄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우리 죄인들을 향한 놀라운 사랑입니다. 우리는 항상 믿지 못하고, 불순종하며, 도망가려고 하나,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우리를 찾아와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나타난 날입니다. 아하스 왕과 같이 패역한 자도 포기하지 않으시고, 구원하시려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날입니다. 그러므로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아하스 왕과 같이 여전히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고, 놓지 못하며, 그것을 의지하는 우리들을 직접 찾아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며, 우리와 언제나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마구간 구유에 누이신 아기 예수님은 바로 이런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탄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아하스 왕과 같이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망해야 마땅한 자에게 나타났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탄절을 맞이하면서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심령 가운데 부어져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성탄의 사랑과 은혜가 우리 모두의 심령 가운데 충만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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