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6,주일-오전)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 / 고한율목사
찬송가 : 38 장, 93 장, 304 장, 53 장
151206_1_너희는 하나님의 집이니라-고한율목사.pdf
우리가 주일마다 고린도전서 말씀을 차례대로 살펴보고 있는데, 앞으로도 확인하게 되겠지만, 고린도 교회는 참 문제가 많은 교회였습니다. 물론 이 땅에 있는 교회 중에 문제없는 교회는 없지만, 고린도 교회는 유독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의외로 단순하였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육신에 속한 사람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해 매우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신령한 자로 대하기를 원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자란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신령한 자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에 가까웠습니다. 육신에 속한 자란 성령을 받지 못해서 이 세상의 지혜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육신에 속한 자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입니다. 물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불신자와 같다고 사도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하면서 덧붙여 말하기를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과 같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와 같다는 것은 적어도 이 세상 사람과 같은 불신자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신자는 아닐지라도 그 신앙의 수준이 아주 유치하다는 것이죠.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들의 뿌리입니다. 또한 고린도 교회뿐만 아니라, 오늘날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문제의 뿌리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문제가 있다고 할 때, 자꾸 보이는 문제에 초점을 맞출 때가 많습니다. “이 교회는 사랑이 없어” “이 교회에는 젊은이가 없어” “이 교회는 끼리끼리만 어울려” “이 교회는 건물이 너무 오래 되었어” “이 교회는 좋은 프로그램이 없어” 물론 이런 것들도 문제가 맞습니다. 고쳐야 할 것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보이는 문제들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육신에 속한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이 멈춰버린,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자꾸 엉뚱한 곳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진단을 옳게 해야 치료도 옳게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무엇보다 힘써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도록 돕는 일입니다. 사실 이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없습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건강해집니다. 신령한 자들, 즉 성령을 받아 하나님의 지혜대로 살아가는 신자들이 많아지면, 당연히 교회는 성령의 인도를 받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교회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고, 어린 아이와 같은 수준에 계속 머물러 있다면, 당연히 교회는 건강하게 성장하지 못하고, 그 안에서 다툼과 분쟁이 끊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어린 아이들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제 아이가 다른 친구들이랑 노는 것을 보면 처음에는 얼마나 재미있게 노는지 모릅니다. 자기들끼리 역할을 정해서 잘 놉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싸우는 소리가 나고,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가 보면 서로 편이 나눠져서 싸우고 있습니다. 서로가 옳다고 우깁니다. // 그런데 이런 아이들도 우리 어른보다 확실히 나은 것은 있습니다. 이렇게 싸워도 다음 날이 되면 언제 그랬느냐 싶을 정도로 같이 신나게 놉니다. 우리는 그렇지 않잖아요. 오랫동안 마음에 담아두고 미워하잖아요.
어쨌든 어린 아이들의 특징은 서로 다투고 분쟁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상대방을 배려해 줄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항상 내 입장에서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만 옳다고 하니 다툴 수밖에 없는 것이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교회가 시끄럽습니까? 왜 교회 안에 다툼과 분쟁이 있지요? 어린 아이와 같은 성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자기 입장에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을 하니 다툴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할 실력이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안타깝게 생각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를 믿은 지 이미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수준에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 증거가 무엇이었습니까? 교회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시기와 분쟁이었습니까?
자신들이 따르는 영적인 지도자들을 가지고 서로를 시기하고 분쟁하였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바로 앞에 있는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나는 바울을 따르는 사람’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이처럼 바울을 따른 이유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목사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를 세운 분이니 가장 훌륭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성도들은 ‘나는 아볼로를 따르는 사람’이라고 자랑하였습니다. 이처럼 아볼로를 따랐던 이유는 아볼로가 바울 뒤에 왔음에도 불구하고 성경 말씀을 아주 기가 막히게 가르친 목사였기 때문입니다. 설교 잘하고 말씀을 잘 가르치는 분이 가장 훌륭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울을 따르는 성도들과 아볼로를 따르는 성도들이 서로 시기하고 분쟁하였다는 것입니다. 그저 마음속으로만 존경하면 될 일인데, 그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지도자만이 최고라고 말하면서, 서로 자존심 싸움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렇게 한 이유는 사실 자신들의 지도자를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정말로 원한 것은 그 지도자를 통해서 자신들을 드러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가 최고이면, 그 자신도 최고가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모습 아닙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름 있고 규모가 큰 대형교회를 선호합니다. 그 이유는 그런 교회에 다니면 자신도 그런 괜찮은 성도가 된 듯한 느낌을 갖기 때문이죠.
요즘 사람들이 너도나도 명품을 좋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명품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명품 옷, 명품 시계, 명품 가방을 지니고 있으면, 자신도 명품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린 아이와 같은 유치한 생각입니까? 우스개 소리로 호박에 줄긋는다고 수박되느냐는 말을 하지요. 명품 인생이 되려면 명품 옷이나 시계, 가방이 아니라, 그 인격이 명품이어야 합니다. 인격이 명품인 사람은 싸구려 옷을 입어도 귀하게 보입니다. 무슨 가방을 들고 있어도 명품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유명하고, 또한 훌륭한 목회자가 있는 교회를 다닌다고 해도 자동적으로 우리 신앙이 훌륭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호박에 줄을 긋는 것에 불과합니다. 껍데기가 바뀐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이냐 아볼로냐의 싸움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바울이 훌륭하고, 아볼로가 훌륭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믿음이 훌륭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읽은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아볼로와 바울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그들은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도록 만든 사역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단어는 바로 사역자라는 말입니다. 이 사역자라는 말은 ‘디아코노스’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인데, 아주 쉽게 말하면 ‘종’이라는 뜻입니다. 특별히 어떤 종이냐 하면, 주인이 식사를 할 때 그 옆에서 시중을 드는 종입니다. 이 종을 ‘디아코노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아볼로와 바울은 무엇입니까? 디아코노스, 종입니다. 물론 이처럼 그들을 ‘종’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귀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6절을 보세요.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바울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심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전혀 모르던 고린도 사람들을 전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바울이 전도한 고린도 교회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잘 가르쳐서 신앙이 자랄 수 있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바울과 아볼로는 정말 귀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이 이처럼 힘써서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신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6절 하반절에 보면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바울이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지만, 그것을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우리가 열매를 얻기 위해서 씨를 땅에 뿌립니다. 그리고 물도 줍니다. 이 과정이 참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입니까? 결국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일은 땅에 뿌려진 씨가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씨를 잘 뿌리고, 물을 정성껏 주었다고 해도 자라게 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도 아볼로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하나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결국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따르고 자랑해야 할 분이 있다면 그것은 바울도 아니고, 아볼로도 아니고, 자신들에게 생명을 주시고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바울은 이처럼 자신과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랑하고 따라야 할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9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바울과 아볼로는 하나님께서 시키신 일을 하는 종이며, 동역자입니다. 동역자라는 것은 바울과 아볼로가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를 위해 하시는 일을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가 아니라 바로 너희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다”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바울을 따르느냐, 아볼로를 따르느냐 하며 서로 시기하며 분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지금 싸우고 있는 바울과 아볼로는 내가 너희들을 위해 쓰는 종에 불과하다. 그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게 중요한 것은 바로 너희들이다. 너희들 때문에 바울과 아볼로가 있는 것이지, 너희가 바울과 아볼로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3:21~22절에서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세계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 것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애끓는 심정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그저 팔짱 끼고 하시는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정말 답답하여서 우리 식으로 하면 울고 싶은 심정으로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가 얼마나 귀한지 아느냐?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느냐?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는 말씀의 뜻입니다. 온 세상의 창조주와 주인이 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시느냐 하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헤롯왕이 잔치 자리에서 자신의 후처의 딸이 춤추는 것을 보고 너무 기뻐서 상을 주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상을 주려고 합니까? “원한다면 내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정말 너를 사랑한다, 너는 정말 내게 귀하다” 이런 뜻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그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만물이 다 너희 것이다” 내가 너를 정말 사랑한다. 내가 너를 정말로 귀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무엇으로 싸웠다고요? 바울과 아볼로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이것을 조금 유치하게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정말 큰 부자를 아버지로 둔 형제가 있었습니다. 이 형제가 어느 날 하나 밖에 없는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싸웠습니다. 서로 아버지가 자신에게 사 준거라고 하면서 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둘이서 해결이 안 되니까 아버지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둘 중 아버지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아들에게 장난감 자동차를 주십시오”
여러분 부자인 아버지가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고작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누구를 더 사랑하는지 결정해 달라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래서 부자인 아버지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얘들아 고작 장난감 자동차 가지고 그렇게 싸우느냐? 장난감만이 아니라, 우리 집에 있는 모든 진짜 자동차가 다 너희 것이란다. 그러니 사이좋게 지내거라”
지금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얼마나 사랑하고,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데, 고작 바울이나 아볼로 때문에 싸우느냐? 이 세상 만물이 다 너희의 것이 아니더냐! 내가 원하는 것은 다른 것이 없다. 바로 너희들이다. 너희들이 내게는 가장 중요하다. 그러니 다른 것을 가지고 너희를 포장하려고 하지 말아라. 다른 것으로 더 훌륭하게 보이려고 하지 말아라. 내가 있는 모습 그대로 너희를 내 자녀로 삼았다. 이를 위해서 나의 가장 귀한 아들을 주었다. 그런데도 자꾸 엉뚱한 것을 가지고 너희를 꾸미고, 자랑하려고 하느냐?”
이것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고, 오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애끓는 심정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 채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교회의 이름이나, 목회자의 명성, 우리가 받은 직분, 교회에 다닌 연수를 가지고 자랑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전히 모르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장난감 자동차를 가지고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하는 어린 아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받을 만한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했다고 말씀합니다(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라는 말씀은 우리가 사랑받을 자격이나 조건이 전혀 없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저 멸망 받아야 마땅할 때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주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만큼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내 줄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한 채로, 여전히 내가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바울로 끌고 오고, 아볼로도 끌고 오는 것입니다. 명품으로 치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도 명품이 되는 줄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명품인 것은 바울이나 아볼로라는 명품을 걸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아들을 주기까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이 세상의 것들로 예쁘게 포장된 우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시편 51:1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다윗이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정말로 사랑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꾸미지 않았습니다. 훌륭한 척하지 않았습니다. 괜찮은 척 하지 않았습니다. 잘 살고 있는 척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상한 심령을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만이 자신의 치료자가 되심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이 자신의 모든 인생의 짐을 대신 질 수 있음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오직 하나님만이 인생의 도움이심을 믿고 나아갔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가지고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포장하고 꾸밀 것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있는 모습 그대로,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다윗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런 다윗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상한 심령이라는 이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기 위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오는 성도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괴로우면 괴로운 대로 하나님 앞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있는 그대로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 자신이지, 여러분에게 붙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바라기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임을 알고, 항상 하나님 앞에 나오기를 힘쓰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린 아이와 같이 엉뚱한 것으로 자신을 괜찮게 포장하려고 하지 마시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으시는 하나님 앞에서 참된 자유와 은혜를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얼마나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시를 분명히 알고 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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