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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11/29,주일-오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 / 고한율목사

(11/29,주일-오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 / 고한율목사

찬송가 : 35 장, 91 장, 453 장, 53 장


151129__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고한율목사.pdf

 오늘 읽은 본문 말씀에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한 사도 바울의 안타까움과 실망이 깊이 배여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신령한 자들로 대하고 싶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신령한 자들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난 주일에 살펴본 것처럼 신령한 자와 육신에 속한 자는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신령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성령을 받아,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고, 그 지혜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육신에 속한 자는 성령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혜를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의 지혜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에 속한 자는 사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 즉 육신에 속한 자들이 지금 고린도 교회 안에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고린도 교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전적으로 육신에 속한 자, 즉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다고 말씀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절 하반절에 보면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씀하면서,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어린 아이들이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함으로써,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아예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니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성도이기는 하지만 겉으로만 성도인, 아주 가난 아이와 같은 성도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어린 아이’는 말을 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유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러분, 교회에 이런 어린 아이와 같은 성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교회는 아주 위험합니다. 겉으로 보면 다 괜찮은 성도 같습니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말도 하지 못하는 유아들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는 결코 건강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릴 때였습니다. 집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어릴 때는 큰 장롱 안에 들어가서 숨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습니다. 그 때도 장롱 안에 들어가서 놀고 있었어요. 그런데 장롱 안에 하얀 박하사탕 하나가 있는 것입니다. 사탕이 얼마나 맛있을 때입니까? 그래서 보자마자 입에 넣었습니다. 그런데 사탕을 입에 넣자마자 이상한 냄새가 났습니다. 그래서 사탕을 깨물기 전에 뱉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보니까 박하사탕이 아니었습니다. 장롱에 벌레 들어오지 말라고 넣어둔 나프탈렌이었습니다. 


 저로서는 천만다행이었습니다. 하마터면 큰 탈이 날 수 있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박하사탕과 나프탈렌이 전혀 구분이 되지 않았습니다. 겉은 똑같았어요. 하지만 겉이 똑같다고 해서 나프탈렌을 먹으면 큰 일 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겉으로는 다 신앙이 좋은 성도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보면 유아와 같은 수준의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성도들이 많으면 교회에 치명적인 것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를 향해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아직 영적으로 어린 아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들에게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제 막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신자가 아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이미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신앙이 성숙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이 말씀의 핵심은 ‘지금도 못하리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와서 처음 복음을 전했고, 그래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 때는 고린도 교회 모든 성도들이 그야말로 막 신앙생활을 시작한 초신자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젖과 같이 부드러운 말씀을 먹였습니다. 마치 엄마가 갓난아기에게 젖이나 분유를 먹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갓난아기가 어느 정도 자라서 이가 나기 시작하면 무엇을 먹입니까? 입으로 씹어야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주게 됩니다. 씹어서 먹어야 하는 음식들이 젖보다는 먹는 것이 어렵겠지만, 그래도 아이가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이것은 영적인 성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부드러운 젖과 같은 말씀만 들으면 안 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씹어 먹어야 하는 단단한 음식 같은 말씀도 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지금 어떤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처음 예수 믿었을 때 밥을 먹을 수 없어서 젖을 주었는데, 지금도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젖만 먹을 수 있는 어린 아이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죠. 여러분, 아이들을 키울 때 여러 어려움과 문제가 있습니다. 아이가 자라면서 생기는 어려움과 문제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가 만약 자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이가 태어난 지 5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같은 모습입니다. 전혀 자라지 않았습니다. 이런 일은 있을 수도 없겠지만, 실제로 그렇다면 이것은 가장 큰 재앙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그렇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벌써 예수 믿은 지 5년이 지나고 10년이 다 되었는데, 처음 예수 믿을 때와 영적인 수준이 똑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단한 음식 같은 말씀을 먹어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여전히 젖과 같은 말씀만 먹는다는 것이죠. 이것이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는 모든 심각한 문제들의 뿌리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만이 가지고 있었던 그들만의 문제였을까요?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과 다릅니까? 불행히도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자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의 영적인 나이는 몇 살입니까? 지금 여러분이 교회를 몇 년 다니셨는가를 묻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젖이 아닌 씹어서 먹어야 하는 단단한 말씀을 먹을 수 있게 되었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여전히 교회를 다니는 목적이 복을 받기 위한 것이고, 마음의 평안을 얻기 위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아직 신앙적으로 어린 아이입니다. 교회를 몇 년 다녔는지 상관없습니다. 여러분이 어떤 직분을 받았는지도 상관없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고, 직분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의 영적인 성장을 보증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보세요. 그들도 오래 동안 교회 다녔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받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이 지금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라고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5장에 보면 오늘 말씀과 똑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5:11~12절입니다.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 설명하기 어려우니라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지금 히브리서를 쓰고 있는 분이 이 편지를 받는 성도들에게 멜기세덱에 관해서 설명을 하려고 했습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에 나오는 살렘 왕으로, 하나님의 제사장이었습니다. 그가 전쟁터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을 영접하는 이야기가 창세기에 나옵니다. 지금 히브리서 기자는 이 멜기세덱을 통하여 예수님이 어떠한 제사장인지를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설명하려고 하다가 그만 둡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말해도 알아듣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답답한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믿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선생이 되기는커녕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수준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고3 아이가 지금도 더하기, 뺄셈을 배우고, 구구단을 외우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방정식을 풀고, 미분, 적분을 풀어야 마땅한데, 구구단을 외우고 있느니 얼마나 답답한 상황입니까? 그런데 교회 안에 이런 일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것으로 다 되었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이제 예수를 믿고 천국에 가게 되었으니 더 무엇이 필요한가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로 데려가시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 땅에서 살게 하시잖아요. 이렇게 하시는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를 예수님 닮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여서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성도로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무엇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한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리셔서 그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어디로 인도하십니까? 가나안 땅입니다. 이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예수님을 믿게 하셔서 죄로부터 건져져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곧바로 간 곳은 가나안 땅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출애굽기를 보시면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낸 이스라엘 백성들을 최종 목적지인 가나안 땅으로 바로 인도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어디로 데려가셨습니까? 광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광야는 어떤 곳입니까?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입니다. 여러분,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숫자가 군대에 갈 수 있는 남자만 60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러니 아이와 노인, 여자들을 다 합치면 수백만 명이 넘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광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 낸 것은 단순히 그들을 가나안 땅으로 데려가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바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먼저 광야로 데려가셨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광야는 그야말로 인간의 힘으로 살 수 없는 곳입니다. 먹을 것이 없고, 마실 물이 없습니다. 나아가야 할 길도 없는 곳이 광야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시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하는 것을 가르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 들어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내 산 앞으로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땅히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바로 율법입니다. 이 율법을 주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율법의 말씀을 늘 읽고, 묵상하고, 배워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 이처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순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짜 목적은 그들을 자신의 백성답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수 믿게 하신 것은 그저 천국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이뤄져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답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숙하여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들을 그저 마음대로 살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우리를 광야로 이끄십니다. 삶 가운데 많은 고난을 당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답게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고, 예배하도록 하시며, 기도하도록 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영적으로 성숙하여 하나님 백성답게 만드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 자라지 않고, 계속 어린 아이같이 머물러 있다면 이것은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에 어긋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반드시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작년과 올해가 분명 달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작년보다 올해가 더 풍성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이 작년보다 올해가 더 깊어져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향한 사랑이 작년보다 올해가 더 커져야 합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반드시 영적으로 더 성숙해져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진정으로 부끄러워해야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는 자신을 우리는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꾸 엉뚱한 것을 가지고 덮으려고 합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꼭 그러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회 안에 시기와 분쟁이 있었는데, 무엇에 대한 시기와 분쟁이었습니까? 4절을 보세요.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 ‘나는 바울을 따른다’ 혹은 ‘나는 아볼로를 따른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이렇게 말하고 다녔던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성도들은 그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런데 왜 여기에 바울이 나오고, 아볼로가 나오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바울이나 아볼로를 통해 채우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바울이나 아볼로를 앞세워서 자신의 부족함을 가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꼭 어린 아이들이 하는 유치한 행동과 똑같습니다. 아이들끼리 얘기를 하다가 서로 맞지 않을 때 하는 말이 있죠. “우리 아빠는 대학 나왔다.” 그러면 “우리 아빠는 대학원 나왔다” “우리 아빠는 부장이다” “우리 아빠는 사장이다” 점점 더 세게 말을 하게 됩니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아빠가 대학을 나왔는지 대학원을 나왔는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아이들이 왜 이렇게 말하는 것일까요? 아빠의 어떠함을 가지고 자신의 부족함을 덮고, 자신이 더 훌륭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모습이 이처럼 유치한 아이들의 모습과 같았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언제인지 모르지만 멈춰있지는 않습니까? 삶이 너무 바쁘다는 핑계로 영적인 성장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으면서 감격하고, 감사했던 때가 언제였습니까? 기도의 깊은 맛을 경험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이 복되다는 것을 느껴졌던 것은 언제였습니까? 이것이 지나간 과거의 일로만 기억된다면 오늘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내가 너희를 구원한 목적은 너희를 나의 백성답게, 자녀답게 만드는 것이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계속 외면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로 쭉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놀라운 만찬을 외면한 채, 사탕만 빨아먹는 그런 가여운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영적인 성장을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 아이와 같은 영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장성한 사람의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과 교회를 적당히 오가며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은곡교회도 건강하게 성장할 줄로 믿습니다. 교회가 건강하려면 반드시 성도인 우리가 건강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성도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교회가 가진 여러 문제들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회의를 하거나 프로그램을 하거나, 캠페인을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성장하는 건강한 성도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교회는 자연스럽게 건강해 지고, 든든하게 세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영적으로 늘 성장하여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성숙한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 또한 영적으로 성숙하여, 주님의 뜻을 잘 감당할 수 있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