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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11/01,주일-오전) "하나님의 지혜" / 고전 2장 6 ~ 9절 / 고한율목사

(11/01,주일-오전) "하나님의 지혜" / 고전 2장 6 ~ 9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24장, 298장, 366장, 53장

151101_1하나님의지혜_고한율목사.pdf


 우리는 지난주에 하나님의 역설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 오히려 우리를 약하게 하시고, 우리를 부유하게 하기 위해서, 오히려 우리를 가난하게 만드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바라 것대로 해 주지 않으시고, 오히려 반대로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자의 삶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도 바울만큼 이 사실을 잘 깨달은 사람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 고린도라는 도시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할 때 어떤 모습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사자로서 아주 권위 있고, 당당한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정반대의 모습이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앞에 있는 3절 말씀에 보면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라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지어 떨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모습이 상상이 가십니까? 제가 지금 설교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제가 설교를 할 때 뭔가 불안합니다. 그래서 말을 잘 잇지 못합니다. 긴장한 탓에 물을 계속 마시고, 손을 부들부들 떱니다. 그러면 오늘 예배에 처음 오신 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저것도 설교라고 하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사도 바울의 모습이 딱 그렇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자신의 연약한 모습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탓하며, 자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5절 말씀을 보세요.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당시에는 떠돌이 철학자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이 떠돌이 철학자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불러 모아 놓고는 자신의 철학과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이 때 얼마나 설득력 있고, 부드러우며, 기가 막힌 표현을 써 가며 가르쳤는지 모릅니다. 1시간, 2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그들의 설교는 굉장했습니다.  그들은 그런 감동적인 설교를 하고 나서 사람들에게 헌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도시로 갔습니다. 


 어떻게 보면 고린도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은 처음에는 이런 떠돌이 철학자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들과 전혀 달랐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그들만큼 매력적이지 못했습니다. 말도 잘 못했고, 자신감도 없어 보였습니다. 게다가 사람들의 마음에 와 닿는 이야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인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는다”라는 고린도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허황되게 들리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의 말이나 모습이나, 그 전하는 내용 모두 시원찮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항상 똑같이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설득력 있는 말이나, 매력 있는 설교자를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로 제한할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을 자랑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자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약함과 부족함을 통해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보다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심방을 하다보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한 성도들의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 분들이 예외 없이 큰 고난과 시련을 당했다는 사실입니다. 고난과 시련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더 이상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임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그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은혜와 능력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가진 것 때문에 이렇게 잘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내가 가진 것들이 다 사라지면 비로소 그 때 내가 이렇게 잘 살 수 있었던 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이 아니면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빈손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주님을 붙잡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고난과 시련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빈손이 되게 하시고, 그렇게 함으로써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제가 어디서 읽은 이야기입니다. 아프리카 어디에서 원숭이를 이렇게 잡는다고 합니다. 호리병처럼 병의 목이 아주 좁은 유리병에 원숭이들이 좋아하는 과일을 넣어둔답니다. 그리고 원숭이들이 지나가는 곳에 놓아둔대요. 그러면 원숭이들이 자기가 좋은 하는 과일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지요. 병에다 손을 집어넣어서 과일을 꺼낸다고 해요. 그런데 과일을 한 개씩 한 개씩 꺼내면 쉽게 다 꺼낼 수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원숭이가 욕심이 많아서 한 번에 3~4개를 집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유리병의 목이 좁아서 손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일을 놓고 빼야 하잖아요. 그런데 욕심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그렇게 낑낑 대다가 결국은 잡힌다는 겁니다. 얼마나 어리석은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 원숭이의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도 똑같이 있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것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좀 더 가져보려고 여러 개를 움켜쥐잖아요. 한 개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면 얻을 수 있는데, 이것 저것 욕심을 내다보니까 유리병에서 손을 끄집어 내지 못해 잡혀가는 원숭이 신세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우리를 고난과 시련을 통해 변화시키시는 것입니다. 손에 쥔 것들을 다 놓게 하심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붙잡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은 결코 우리를 망하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것들을 놓게 함으로 하나님을 붙잡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자신의 연약함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것을 기대하였습니다. 우리를 약하게 하심으로 강하게 하시고, 우리를 가난하게 하심으로 부유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사도 바울은 믿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은 이와 같은 하나님의 역사를 전혀 이해하지 못합니다. 세상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이런 역설을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서 약한 것, 가난한 것, 부족한 것이 곧 강함과 부함과 풍부가 된다는 사실을 이 세상은 도저히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와 이 세상 지혜의 차이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의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이 세상 지혜가 얼마나 다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오늘 본문 6절을 함께 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사도 바울은 이제부터 지혜에 대해 말하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이 지금부터 말하려고 하는 지혜는 이 세상의 지혜와 다른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와 이 세상의 지혜가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합니다. 가장 큰 차이점은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한 지혜이지만, 이 세상의 지혜는 곧 없어질 지혜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이 세상은 곧 사라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위대한 제국이라도, 아무리 위대한 철학이라도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람이 사라지듯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도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의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을 알려고 하거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판단하려고 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동화를 보면 날파리와 하루살이가 친구가 되어서 정말 재미있게 하루를 보냈다고 합니다. 해가 져서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자, 날파리가 하루살이에게 “우리 내일도 만나서 재미있게 놀자”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하루살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아십니까? “내일이 뭐야?” 


 하루살이에게 내일은 없습니다. 하루살이에게는 하루가 자신에게 주어진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오래 산다고 해도 150년 이상을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고 판단합니다. 마치 하루살이가 내일을 말하는 어리석음과 같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지혜가 이처럼 없어질 지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의 지혜라는 것이 얼마나 무능한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 7~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사도 바울이 7절에서 말씀하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란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시고,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시고, 지금까지 감추어 오셨던 것입니다. 


 정말로 이 세상 사람들 중에 어느 한 명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우리 죄인들을 구원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하다고 하는 그 어떤 사람도 이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8절에서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똑똑한 사람들, 그 지혜로운 사람들, 그 권세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실지 전혀 몰랐습니다. 만약 알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영광의 주, 즉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일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을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하였던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로마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이 진정으로 누구신지 몰랐습니다. 예수님만 몰랐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죄인들을 구원하실지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용감하게도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지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지혜가 무능하다는 증거입니다. 이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지혜를 의지하며, 그 지혜를 따라 사는 삶은 결국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지혜는 곧 없어질 지혜이며,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아주 무능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무능한 세상의 지혜와는 달리 하나님의 지혜는 영원하며, 우리 죄인들을 능히 살리는 능력이 있는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세상의 지혜가 얼마나 무능한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또한 보여줍니다. 


 이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전혀 알지 못했고, 또한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대표하는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바리새인들과 로마 제국의 빌라도 총독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하나님의 일을 가로 막으려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이 세상의 지혜가 미워하고 반대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지혜는 이 일을 통하여 만세 전에 미리 계획된 구원계획을 성취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로 보면 십자가는 저주이고, 실패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혜는 그 저주와 실패의 십자가 죽음을 죄인들을 구원하는 위대한 구원 사건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는 위대한 지혜입니다. 인간의 악함을 선함으로 역전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저주와 절망, 죽음을 복과 소망, 생명으로 바꾸는 능력이 하나님의 지혜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지혜가 가진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자들은 이 하나님의 지혜를 믿어야 합니다. 곧 없어지고, 철저하게 무능한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영원하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지혜를 믿고 의지하는 성도는 큰 확신과 평안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눈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지혜가 역사하심을 믿음으로,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우리에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구원의 사건으로 만드신 하나님의 지혜라면, 우리가 지금 당하는 여러 시련과 고난들도 능히 우리에게 가장 복된 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로마서 8:2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말씀합니다. 이 모든 일에는 우리가 당하는 질병, 사업상의 실패, 가정의 어려움 등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망하게 만들 것 같은 이 모든 것들이 결국에는 선을 이루어 우리에게 복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하나님의 지혜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지혜로 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우리 모두에게는 결국 선이 될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러한 사실의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라고 말씀합니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얼마나 놀라운지를 알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하나님의 지혜를 우리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 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우리 스스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지혜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귀로, 우리의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인간에게 철저하게 감춰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지혜를 주십니다. 고린도전서 8: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주시느니라” 하나님은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자기를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를 얻고자 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를 충만하게 부어주십니다. 


 바라기는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을 더욱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시며, 우리를 어떻게 인도해 가시는가를 분명히 알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하여 어떠한 형편에서도 모든 일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