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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9/18,주일-오후)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 / 딤후 2장 20 ~ 21절 / 고한율목사

(9/18,주일-오후) "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 / 딤후 2장 20 ~ 21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333 장, 425 장


151018_4하나님이 귀히 쓰는 그릇-고한율목사.pdf


 오늘 남전도회 헌신예배로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사실 우리 교회를 포함하여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남전도회보다는 여전도회가 더 활성화 되어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상대적으로 사회생활이 더 많은 남성들보다 그렇지 않은 여성들이 교회 활동을 하기가 더 수월한 측면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를 가도 남성보다는 여성이 많습니다. 그리고 교회의 사역 대부분이 여성중심으로 진행됩니다. 


 물론 저는 이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래 초대교회 때부터 교회 안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다닌 사람들이 오직 12명의 남자 제자들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누가복음 8:1~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예수님 주변에는 열 두 제자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여자들이 함께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재산으로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을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비록 드러나게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사역에 여자들이 큰 공헌을 하였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유럽의 첫 교회인 빌립보 교회는 여자 사업가였던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의 든든한 동역자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부부를 소개할 때 보통은 남편을 먼저 말하고, 아내를 이어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남편인 아굴라보다 아내였던 브리스길라는 먼저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남편인 아굴라보다 아내인 브리스길라가 더 영향력 있는 사역을 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안에 여성의 영향력이 지대했습니다. 이것은 한국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초기에 “전도부인”이라고 불리던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여자의 몸으로 복음이 들어가지 않는 동네 동네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던 분들입니다. “전도부인”들의 활약으로 전국적으로 복음이 신속하게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교회 안에 여성의 역할을 언제나 컸고, 중요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 안에 여성이 많고, 여성의 사역이 많다는 사실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교회 안에 여성의 역할이 중요하다 하여, 남성의 역할은 무시해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남성이 교회 안에서 가지고 있는 중요한 역할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성경은 남성의 머리됨을 말씀합니다. 고린도전서 11:3절에 보면 “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질서를 볼 수 있습니다. 제일 위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에 예수님이며, 그 다음에 남자요, 그 다음이 여자입니다. 물론 이러한 순서는 누가 더 중요한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누가 높고, 낮은 것이 아니라, 한 분이십니다. 이런 점에서 남자와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남자가 더 높다느니, 여자가 더 높다느니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동등한 존재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위치에 서 있습니다. 다만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의 질서를 말하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 몸을 생각해 보면 머리나 팔, 다리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는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내 몸이 있는 모든 부분이 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하는 일에 있어서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머리로 먼저 생각하고, 그 생각한 것이 팔, 다리로 전달되어 실제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팔, 다리가 생각하여 머리가 움직이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약 그런 경우가 생긴다면 정상적인 사람이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동등한 존재인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의 역할을 주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남자에게는 다스리는 역할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디모데전서 2:11~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여자에게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여자가 남자보다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다만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다를 뿐입니다. 남자에게 다스리는 역할을 주셨고, 그 다스리는 역할을 함에 있어서 가르치는 일은 필수적으로 함께 하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교회가 따르는 개혁교회에서 여성을 목사나 장로로 세우지 않는 까닭은 이러한 성경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목사와 장로가 가진 교회 안에서의 주된 역할이 다스리고, 가르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의 남성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역할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분명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꼭 목사나 장로, 집사가 아니더라도, 영적으로 다스리는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꼭 교회뿐만 아니라,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가장으로 가정을 믿음으로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믿는 남자들이 신앙에 소홀한 경향이 많습니다. 그래서 아내보다 심지어는 자식들보다 말씀과 기도에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으로 다스리는 일을 충실하게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은 것이 오늘날의 현실입니다. 


 저는 특별히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든 남자성도님들이 더욱 경건에 힘쓰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남성들에게 주신 영적으로 다스리는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남성들이 모두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바쁜 사회생활일지라도 더욱 힘써서 말씀과 기도 시간을 가지셔야 합니다. 성경은 그저 돈 많이 벌어주는 것으로 가장의 역할을 다 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아내에게 자녀양육에 대한 책임을 다 맡기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성에게 주신 역할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성경에 입각하여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은곡교회 남전도회 모두가 하나님이 주신 남성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정과 교회, 사회에서 그 역할을 잘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지도력을 잘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가 더욱 더 경건한 남성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디모데전서 2:8절입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우리 남자성도님들이 먼저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한다면 우리의 가정이, 우리의 교회가, 우리의 사회가 얼마나 복된 곳이 되겠습니까? 이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 늘 기도하는 경건한 남성들로 모두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남성들에게 주신 역할이 무엇인가에 대해 잠시 살펴보았습니다. 이제는 특별히 남전도회 헌신예배로 드리는데, 우리 남전도회원들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섬김을 감당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말씀을 중심으로 두 가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교회 안에는 다양한 섬김이 있지만, 그 칭찬은 모두 동일합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큰 집에는 여러 가지 그릇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큰 집은 바로 하나님의 집,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릇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릇은 그저 교회 안에 있는 성도를 뜻한다기보다 주님의 일을 섬기는 일꾼들을 의미합니다. 


 교회 안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일꾼들이 있습니다. 식당 안에 금 그릇, 은 그릇, 나무 그릇, 질그릇이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도 여러 가지 일들을 감당하는 일꾼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각 그릇이 그릇에 맞게 쓰여 지듯이, 교회 안의 일꾼들도 여러 가지 일들을 섬기게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다양한 섬김이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칭찬은 모두 똑같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잘못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도 귀한 일, 천한 일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금 그릇, 은 그릇이 귀하게 쓰이는 것이, 나무 그릇이나 질그릇처럼 천하게 쓰이는 것보다 훨씬 더 낫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왜 나는 금그릇, 은그릇이 아닌가 하며 실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물론 인간적인 눈으로 볼 때, 더 귀한 일이 있을 수 있고, 상대적으로 덜 귀해 보이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생각일 뿐이지 우리의 섬김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한 주인이 외국으로 가면서 종들에게 달란트를 나눠주었습니다. 한 종에게는 다섯 달란트, 다른 종에게는 두 달란트, 마지막 종에게는 한 달란트입니다. 그런데 처음 두 종은 주인이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를 하여 각각 준 것의 두 배를 남기게 됩니다. 그런데 돌아온 주인이 이 두 종에게 뭐라고 말합니까?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둘에게 똑같이 말하였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분명 주인은 두 종에게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로 차별하여 주었고, 두 종 또한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습니다. 한 종은 총 10달란트를, 다른 종은 총 4달란트를 남긴 것입니다. 하지만 주인은 이 둘을 똑같이 칭찬하였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남긴 달란트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주인에게 충성한 종들을 똑같이 보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에는 더 귀한 일도, 덜 귀한 일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일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똑같이 칭찬받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는 저는 제가 목사라고 해서 여러분 보다 천국에서 더 큰 칭찬을 받게 될 것이라고 절대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제가 앞에 서 있는 역할을 해서 드러나 보일 뿐이지, 숨어서 봉사하시는 분들에 비해 결코 더 큰 일을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님이 보실 때는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하는 모든 성도의 섬김을 하나님께서는 똑같이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우리 남전도회원들이 교회 안에서 무슨 일로 섬기시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혹 그저 교회에 출석하는 것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계신 성도님들이 있다면 작은 일이라도 섬길 수 있기를 권면합니다. 봉사는 그 일이 크냐 작으냐가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하는 우리를 기뻐하시고 칭찬해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지금 맡은 일에 더욱 충성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작은 일이라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충성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 앞에서 칭찬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귀한 그릇은 깨끗한 그릇입니다. 

       오늘 본문 21절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하나님께 귀한 일꾼은 어떤 일꾼일까요? 하나님이 정말 쓰시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우리는 흔히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이 질문에 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도 돈이 있고, 지식도 많고, 몸도 건강한 사람이 교회의 제일 좋은 일꾼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릇 비유로 하자면 나무그릇이나 질그릇보다 금 그릇, 은그릇이 최고라는 것이죠.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금 그릇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 그릇이 아닙니다. 물론 질그릇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 그릇이 무엇으로 되었느냐에만 관심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릇 그 자체보다는 그 그릇이 깨끗하냐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즉 아무리 금 그릇이라도, 그 속이 오물로 더럽혀져 있다면 하나님께는 쓸모없는 그릇입니다. 반면에 아무리 나무 그릇, 질그릇이라도 그 안이 깨끗하게 하나님께서 얼마든지 귀하게 사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는 우리의 능력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능력은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굴러다니는 돌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오병이어로 수천 명의 사람을 배불리 먹이신 것이 우리 주님 아닙니까? 그 주님께서 아이의 도시락을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아이의 도시락 오병이어 그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주님의 손에 들어가면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교회의 일을 못합니까? 지식이 부족해서 못하나요? 몸이 약해서 안 됩니까? 아닙니다. 능력은 우리 주님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대로 우리를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이 세상의 더러운 생각과 탐욕, 이기심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우리의 문제는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지식과 건강이 없어서도 아니고, 우리가 깨끗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합니다. 


 제가 결혼하고 곧 독일로 유학을 갔습니다. 거기서 1년을 지냈는데, 그 때 저희 부부를 도와주신 잊지 못하는 분이 계십니다. 엘리자베스라는 분입니다. 저희가 처음 만났을 때가 80세 중반이셨습니다. 그런데 이 분은 평생 독신으로 사셨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이 주신 사역을 감당하기 위해서 였는데, 그것은 한국에서 온 광부와 간호사들을 돕는 일이었습니다. 60~70년 대에 독일에 많은 광부와 간호사들이 오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낯선 독일 땅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겠습니까? 


 그 때 젊은 엘리자베스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서 그들을 돕는 일을 하였습니다. 그들이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고, 무엇보다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한국인들이 그 분을 어머니처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저희 부부가 독일에 갔을 때, 우리가 한국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몸이 많이 불편하셨음에도 우리를 돕기 위해 힘을 많이 써 주셨습니다. 


 그 분에게는 비록 많은 돈도 없고, 또한 건강도 좋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낯선 우리들을 섬기는 일을 기쁨으로 감당하였습니다. 우리에게 무엇이 있어야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 사랑하는 마음이면 충분합니다. 능력은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오직 충성 하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모든 남전도회 회원들이 주신 말씀을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어떤 섬김이든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우리 주님의 칭찬을 받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하여 주님이 주신 일에 충성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주님의 귀한 일꾼으로 잘 쓰임 받을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