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1,주일-오전) "십자가의 도" / 고전 1장 18 ~ 25절 / 고한율목사 / 찬송가 : 10장, 151장, 94장, 620장(3절만)
151011_십자가의 도-고한율목사.pdf
몇 해 전에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를 우연히 지나던 길에 들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학교 운동장이 너무나 작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분명 어릴 때는 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운동장이었는데, 지금은 작아도 너무 작은 운동장이었습니다. 그래서 운동장이 실제로 줄어들어나 살펴보았더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운동장이 줄어든 것이 아니라, 제가 커버린 것입니다. 어린 아이의 눈으로 볼 때는 참 큰 운동장이었지만, 다 큰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아주 작은 운동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지난주에 한 영상을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이 우주에서 어느 정도의 크기를 갖고 있는가를 비교한 영상이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지구도 굉장히 크지 않습니까? 우리가 평생 살면서 우리나라도 다 돌아보지 못하는데, 지구는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우리가 늘 보는 태양이 지구보다 얼마나 큰지 아세요? 지구의 130만배 크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지구를 130만개를 모아야 태양의 크기가 됩니다. 입이 딱 벌어지지요.
그런데 이렇게 큰 태양도 우주 전체에서 보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인간이 찾아 낸 행성 중에 가장 큰 행성이 있는데, 이름을 VY행성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이 행성의 직경이 무려 28억 Km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감이 전혀 안 오시죠. 900Km로 날라 가는 비행기를 타고 한 바퀴를 돈다고 하면 무려 1,100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이 VY 행성에 비하면 지구는 먼지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이처럼 큰 별들이 우주 안에 셀 수 없이 많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전체 우주를 생각한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아무 것도 아닌 셈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어릴 때 그렇게 커 보이던 운동장이 어른이 돼서 보니 아주 작은 것과 불과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지만, 우주에서 보면 이 지구는 먼지만도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보고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만이 옳은 것처럼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치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가 보는 세상이 다 인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바로 그런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본문말씀의 주제를 담고 있는 25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이 말씀을 보다 이해하기 쉽게 풀이한 성경말씀이 있습니다. 욥기 33:12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대에게 대답하리라 이 말에 그대가 의롭지 못하니 하나님은 사람보다 크심이니라” ‘하나님이 사람보다 크다.’ 이것이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은 우리 인생보다 크십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핵심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얼마나 발전했습니까? 인간이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의술 또한 얼마나 발전되었는지 못 고칠 병이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아직 고치지 못하는 병도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모두 치료될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요즘 빌딩을 짓는 것을 보면 하늘에 닿기 위해 건축하였던 바벨탑이 머지않아 세워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문명은 그 어느 때보다 발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여전히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크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 사실을 받아들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영원한 운명이 갈라진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여기서 십자가의 도라고 할 때 “도”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야기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말씀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지를 주의해서 보셔야 합니다.
이 십자가의 말씀은 멸망하는 자와 구원받은 자를 구분하는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 리트머스 종이를 아십니까? 중고등학교 수업 시간에 사용해 보신 분들이 계신 줄 압니다. 리트머스 종이는 산성과 알카리성을 구분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요즘에 서울에서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산성물이기 때문입니다. 몸에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산성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리트머스 종이를 대 보면 종이가 빨갛게 변합니다. 그러면 이 물이 산성인지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커피와 같은 알카리성 물에 리트머스 종이를 대 보면 종이가 파랗게 변합니다. 그러면 이 물이 알카리성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산성인지 알카리성인지 눈으로는 알 수 없지만, 리트머스 종이를 대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리트머스 종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듣고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은 사람이며, 그것을 미련하고 어리석게 여기는 사람은 멸망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 구원을 받았는지, 구원을 받지 못했는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십자가의 말씀을 들려주면 됩니다.
그런데 이처럼 십자가의 말씀이 구원받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그 내용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아주 간단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는데, 그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도, 십자가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 그 분이 한 일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쉽게 믿어지십니까? 믿어지는 것은 둘째 치고, 그렇게 믿고 싶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셨다면 더 크고 위대한 일을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하다못해 사람 중의 위인으로 추앙받는 사람들도 정치와 사회, 경제를 개혁하여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하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면 큰 군대를 끌고 나가 자기 나라를 외세의 손에서 구원하지 않았습니까? 인간 영웅들도 이런 큰일을 하였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와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이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고, 그것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십자가의 말씀을 전했더니 유대인들은 그것 대신에 무엇을 구했습니까? 표적입니다. 표적을 보여주면 믿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표적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증명하는 그런 극적인 기적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여주면 자신들이 믿겠다는 것이죠.
이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큰 병에 걸렸습니다. 갑자기 사업이 어려워져서 경제적인 큰 곤란에 빠졌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이 병을 낫게 해 주세요. 그러면 믿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다면 제 망한 사업이 다시 일어서게 해 주세요. 그러면 믿겠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대인들이 구한 표적과 같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의 말씀이 아니라, 표적을 보여 주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한편 헬라인들은 어떻습니까? 그들 또한 십자가의 말씀을 거절했습니다. 대신 그들은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참으로 지혜를 사랑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헬라인을 통해 철학이 얼마나 많이 발전했는지 모릅니다. 철학을 영어로 필라소피라고 하는데, 이 말은 헬라어로 ‘사랑한다’는 말의 “필레오”와 ‘지혜’라는 말의 ‘소피아’가 합쳐진 말입니다. 철학이 무엇입니까? 지혜를 사랑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이처럼 헬라 사람은 철학, 지혜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의 말씀이 아니라, 지혜를 주면 믿겠다고 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그런 철학이나 지혜를 가르쳐 주면 믿겠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성경에 있는 말씀만을 가르치는 교회를 따분하게 여깁니다. 뭔가 특별하고 독특한 말씀을 듣기 원합니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한국교회 안에 있었던 유행이 있었습니다. 후임 목사님을 모실 때, 박사 학위를 가진 분을 우대하는 것입니다. 많이 배운 분을 모셔서 다른 교회에서 듣지 못하는 고급한 말씀을 듣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때 목사님들이 박사학위를 받으려는 열풍이 분 적이 있습니다. 성도들이 원한다고 생각하니 너도 나도 박사학위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님은 박사 학위를 받고는 그것이 너무나 자랑스러워서 설교할 때마다 박사모와 박사가운을 입고 설교를 하는 그런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습니다. 이것이 헬라인들이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이러한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에게 무엇만을 전하였습니까? 23절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사도 바울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였습니다. 그 어떤 표적도, 그 어떤 지혜도 전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전하였습니다. 그럴 때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거리끼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거리끼다’는 말은 ‘스칸달론’이라는 말로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유명인들에게 나쁜 소문이 날 때, 그것을 스캔들이라고 부르는데, 바로 이 스칸달론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런데 스칸달론은 단순히 넘어지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마음에 분노를 일으키는 것까지를 포함합니다. 그러니까 표적을 구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의 못 박힌 예수를 전했을 때, 그들은 분노하였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구원하기 오신 분이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느냐고 분노하였습니다.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이죠. 당시 유대인들은 구원자가 오면 십자가에 못 박힐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원하여 다윗 왕국을 다시 세울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셨는데, 바로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라고 하니까 유대인들이 분노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헬라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전하였습니다. 이것은 지혜를 원하는 헬라인들이 볼 때는 철저하게 미련한 일입니다. 도저히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구원자가 죽는 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전하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누가 믿을 수 있을까요? 2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십자가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대인이라고 해서 믿는 것도 아니고, 헬라인이라고 해서 안 믿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모두 믿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들은 지혜를 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기준에서 볼 때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십자가의 말씀을 듣고 믿는 사람들이 유대인들과 헬라인 중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확인하고 넘어가야 하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과 헬라인이 이 세상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고 볼 때, 그들은 표적과 지혜를 원하지 십자가의 말씀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에 십자가의 말씀을 듣고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직접 부르셨고, 십자가의 말씀을 듣고 믿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구원이 인간의 어떤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십자가의 말씀의 신비가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의 수단이 됩니다. 이것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인간도 십자가의 말씀을 구원의 길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오늘 본문 21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저 십자가의 말씀만을 전하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21절에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라고 할 때, 이것은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말씀을 그저 외치기만 하는 미련한 것을 통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전도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우리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러니 그 예수님을 믿어라” 아닙니까? 이 소리를 외치는 것이 전도입니다. 그러면 이런 전도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 십자가의 말씀을 듣고 믿겠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이 십자가의 말씀을 들을 때에 우리에게 믿음을 주십니다. 그러면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가 전에 한 번 말씀 드린 적이 있는 제 전도경험입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보초를 서면서 쫄병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2시간 동안 보초를 서기 때문에 2시간 내내 복음을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2시간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 않습니까?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다 되어 돌아오는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잊지 못할 말을 제게 해 주었습니다. “지금까지 한 말은 다 이해가 됩니다. 저도 믿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믿어지지는 않습니다.” 복음이 다 이해가 되는데 믿어지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제가 대학을 다닐 때 한 여학생에게 전도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10분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아주 급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속으로 이렇게 전해도 믿겠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다 말한 다음에 끝에 예수님을 믿겠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믿겠다는 것입니다. 정말이냐고 다시 물으니 정말 믿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 때부터 신앙생활을 시작하여 지금까지 너무 귀하게 잘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말씀이 바로 이 사실을 알려줍니다. 여러분, 전도를 잘한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요즘에 교계신문을 보면 전도왕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 년에 몇 천 명을 전도했다고 광고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교회들이 그 분을 모시고 서로 전도 세미나를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전도 그 자체로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전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전도는 교회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우리는 전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전도를 할 때, 말을 잘한다고 해서 더 많이 믿게 되고, 못한다고 해서 덜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습니까? 전도는 미련한 거예요. 십자가의 말씀을 외치기만 하는 것은 분명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미련한 방법으로 구원하기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합니까? 이것이 하나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전도’를 통해 구원하시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그 방법이 가장 훌륭하고 효율적이어서가 아닙니다. 반대로 ‘전도’라는 것이 가장 미련하고 어리석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 방법으로는 도저히 가망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알려주려고요? 구원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입니다.
바울은 우리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구원이 이처럼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지는 것이라면, 이 세상 모든 일들 또한 마찬가지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보다 언제나 크심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나오는 것처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고 믿을 때 우리의 삶은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하나님 노릇하려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지혜와 힘을 믿고 인생을 살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평탄할 때는 이것을 잘 모릅니다. 그저 내가 잘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 삶에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련과 고난이 찾아올 때 비로써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인생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주인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만드셨으며,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로부터 구원할 수도 없고, 우리가 당하는 인생의 시련과 고난도 우리 힘으로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곳에서 구원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곳에서 힘과 지혜를 구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구원과 힘과 지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보다 언제나 크신 하나님입니다. 지금 당장 눈앞에 보이는 현실보다 우리 하나님이 크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리석게 여기는 그 십자가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볼 때 참으로 어리석고 무능력한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보다 크고 놀라우십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지금 견딜 수 없는 고난 가운데 계신 성도님들이 있습니까? 풀리지 않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신음하는 성도님이 계십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을 의지하며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유일한 삶의 해결자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작은 머리로 하나님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우리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의 삶을 인도해 주십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지키겠다고 말씀하시고, 우리의 도움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인간의 지혜와 능력이 아닌, 우리보다 크신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기도하는 큰 믿음을 부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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