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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10/11,주일-오후) "살전 강해(14) 교회를 세우기 위한 권면" / 살전 5장 12 ~ 15절/ 고한율목사

(10/11,주일-오후) "살전 강해(14) 교회를 세우기 위한 권면" / 살전 5장 12 ~ 15절/ 고한율목사찬송가 : 406 장, 218 장

151011_교회를 세우기 위한 권면-고한율목사.pdf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데살로니가전서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교회에게 사도 바울이 보낸 편지입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개척하고, 약 3개월 정도를 목회하고 있을 때, 유대인들의 핍박으로 말미암아 갑자기 데살로니가 도시를 떠나야 했던 것입니다. 데살로니가를 떠나 아덴, 즉 지금의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상황이 너무나 걱정되기도 하고, 궁금하였습니다. 그래서 함께 일하는 디모데를 보내어 그 사정을 살펴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 교회에 다녀온 디모데가 바울에게 너무나 기쁜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어린 데살로니가 교회가 너무나 모범적으로 잘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데살로니가전서를 읽어보면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감사와 감격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어린 교회가 계속해서 든든히 세워질 수 있기 위해 꼭 필요한 기초적인 내용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들은 오늘 우리가 교회를 바르게 세워가기 위해 똑같이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특별히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은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몇 가지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을 우리는 귀하게 여겨야 합니다. 

       12~13절 말씀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이 말씀에서 “너희 가운데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은 다름 아닌 데살로니가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이 하는 일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는데,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일, 즉 충고하고 조언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장로나 집사와 같은 교회 직분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나 집사를 귀히 여기라고 하면 될 텐데, 그렇게 하지 않고 “수고하고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데살로니가전서를 쓸 당시에 아직 교회 안의 직분이 정확히 정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장로나 집사와 같은 명칭이 아직 사용되지 않았을 때였다는 것입니다. 


 보통 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서를 바울이 쓴 첫 번째 편지라고 봅니다. 바울이 총 13개의 편지를 써서 신약성경 안에 들어 있는 데, 그 중에 가장 이른 시기에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 초대교회 안에 직분이 정확하게 자리 잡지를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분이 한참 후에나 교회 안에 정착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로부터 약 10~15년 정도 후에 기록된 빌립보서를 보면 이미 교회 안에 직분제도가 잘 정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1:1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감독들과 집사들이 등장합니다. 감독은 장로와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또한 장로 중에 주로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목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안에서 장로는 오늘날 목사와 장로가 다 포함되어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바울은 비록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장로와 집사의 직분이 완전히 정립되어 있지 않았지만, 데살로니가 교회를 이끌고 있는 지도자에 대해서 모든 성도들이 그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회 지도자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역사 때문입니다. 여기서 역사란 어떤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교회를 위해 하는 모든 활동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지도자들이 하는 역사, 일은 무엇입니까? 에베소서 4:11~12절에 나와 있습니다. “그가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하는 자로,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선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직분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 된 교회를 위해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교회의 직분은 교회라는 조직이 잘되게 하기 위해서 성도들이 스스로 만든 자리가 아닙니다. 교회 운영의 효율성을 위해서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이 아닙니다. 모든 직분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만나서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럴 때 베드로는 “주님 그러하나이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렇게 똑같이 예수님께서 세 번 물으시고, 베드로 또한 세 번 대답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3번 부인한 베드로를 예수님께서 다시 회복하시기 위해서 일부러 3번 물으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베드로가 대답할 때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어린 양을 치라”입니다. 여기서 어린 양이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사도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 교회를 이룬 성도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사역을 목양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교회의 목자, 즉 지도자들을 세워주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예수님의 양, 즉 성도들을 먹이고, 이끄는 일을 하도록 맡기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는 그저 성도들이 원한다고 해서 세우고, 안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지도자는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이처럼 세우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회 지도자들을 세우는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꿈과 야망을 가지고 성도를 이끌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는 것이 교회 지도자들이 해야 할 유일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이 일을 위해 교회 지도자들을 세워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하는 일을 위해 헌신하는 교회 지도자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의 수고를 인정하고, 그들의 지도를 존중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들을 세워서 이 일을 하시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교회 지도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지도자들은 결코 성도 위에서 군림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직분을 마치 계급으로 생각하는 것은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누가 높다, 누가 낮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성도들에게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가 동등한 자리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말씀합니다(벧전 5:2~3). 교회 지도자의 권위는 직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목자장이 되신 예수님을 얼마나 닮았는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가 예수님을 닮아갈수록 그의 영적인 권위가 바르게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교회의 질서가 어떠해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예수님이 교회를 위해 세워주신 교회 지도자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겨야 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헌신을 인정하고, 격려하며, 그들의 연약함을 덮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반대로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의 권위를 앞세우거나, 자신의 사적인 이익을 추구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예수님이 직분을 주신 이유를 분명히 기억하여, 늘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들로 그리스도의 몸을 온전히 세우도록 하는 일에 진력해야 합니다. 


 이처럼 서로 사랑하고, 서로 귀히 여기면 교회는 아름답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우리 은곡교회는 교회를 섬기는 모든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닮아 가고, 주신 사명에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도들의 본이 되어서 예수님을 보여주는 그런 지도자들로 세워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모든 성도들은 그런 지도자들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하게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정말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아름답게 성장해 갈 줄로 믿습니다. //


 이처럼 사도 바울은 교회 지도자와 성도 간의 관계에 대해 말씀한 후에,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권면합니다. 14절입니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먼저 교회 안에 있는 게으른 자들에게 권계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들이 왜 게으름을 피우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곧 오신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더 이상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게으른 자들을 내버려 두지 말고 권계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열심히 일하도록 권면하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1~12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게으르게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을 만들기만 하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게으르지 않고 열심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는 것이 예수님의 뜻이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주님의 일을 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생활을 돌보지 않는 것을 잘못된 일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 신자는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모범적인 삶을 살려고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이 복음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게으르고 자신의 삶에 무책임하다면, 그것은 복음을 가로막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 밖에서도 바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명령이며 뜻이라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해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이 약한 자들은 낙심한 성도들을 말합니다. 그 이유는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주변으로부터 극심한 핍박이 당하여 낙심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런 낙심한 성도를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격려하라고 하십니다. 위로하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2:15절에 보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낙심한 사람에게 자꾸 가르치려고 합니다. 왜 그렇게 사냐고 타박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낙심한 성도에게 제일 먼저 필요한 것은 격려이고 위로입니다. 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옆에서 함께 울어주는 것이 백 마디 옳은 말을 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우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여기서 힘이 없다는 것은 몸이 약한 것일 수도 있고, 믿음이 약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어야 한다고 합니다. 붙들어 준다는 것은 어떤 사람의 짐을 대신 져주어서 도움을 준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방금 전에 낙심한 성도들을 위해서 함께 울어줘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함께 울기만 하고 그쳐서는 안 됩니다.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짊어지고 있는 짐을 나눠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2:15~1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다른 사람의 형편을 공감하는 것, 이해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들의 무거운 짐을 함께 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믿음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넷째로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래 참아야 한다는 것은 인내를 말하는 것인데, 이것은 성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반드시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특별히 앞서 말한 세 가지,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고,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는 일을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오래 참음, 즉 인내입니다. 


 부모가 어린 아이를 키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인내입니다. 아이들이 말을 안들을 때 보면 사실 몇 번이라도 포기하고 싶어 내어버리고 싶은 마음도 듭니다. 그런데 참는 것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참습니다. 그럴 때 아이들이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참지 못하고 잘못할 때마다 책망하고 때리고 벌을 준다면 그 아이는 절대 바르게 성장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제가 한 때는 참 교만한 생각을 가진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참 잘 자랐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가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나에 대해서 인내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인내가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내가 있게 한 것입니다. 


 교회가 아름답게 성장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이 오래참음입니다. 서로를 향해서 인내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내하면서 서로를 위해 기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비판하고, 공격한다고 해서 사람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기다리고 또 인내하면 변합니다. 우리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오래 참음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사도 바울은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은곡교회는 서로를 향해 오래 참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인내하며, 위해서 기도하는 관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 교회는 주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운 교회로 계속해서 성숙하며, 성장해 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15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서로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따르라” 이 말씀은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성도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를 권면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합니까?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항상 선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21절에서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라고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 사람들의 방식대로 대하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신 은혜의 방식으로 이 세상을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구원받은 백성의 마땅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악으로 악을 갚는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무엇이고, 예수님이 누구시며,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전혀 알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선으로 악을 이길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통해 복음의 향기를 맡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말씀대로 세상 사람들의 방식이 아닌 복음의 향기를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잘 기억하여, 교회 지도자들과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세상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음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을 올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