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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10/4,주일-오전)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고전 1장 10 ~ 17절 / 고한율목사

(10/4,주일-오전)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 고전 1장 10 ~ 17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8장, 183장, 220장, 620장(3절만)



151004_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한율목사.pdf


 고린도 교회는 그 안에 많은 문제들을 갖고 있던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여러 경로를 통해서 사도 바울에게 전해졌습니다. 소식을 전해들은 사도 바울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편지를 썼습니다. 이 편지가 바로 우리가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고린도전서는 교회의 여러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내놓은 처방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사도 바울이 단순히 문제 각각에 대한 해결책만 내놓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주의 깊게 읽어보면 단순히 교회에서 일어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목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깊은 목적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교회의 기초가 무엇인가?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가? 교회는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 교회가 소망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는 아주 근본적인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 바울은 단순히 병든 고린도교회를 치료하기 위해서만 고린도전서를 쓴 것이 아니라, 그 병을 고치는 것과 동시에 건강한 교회로 세우기 위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읽어나갈 때 단순히 교회에 일어난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배울 뿐만 아니라, 더 근본적으로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바라기는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 은곡교회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는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단지 문제없는 교회가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교회로 세워지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목표를 이루는 데 있어서 고린도전서는 우리에게 귀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또한 고린도교회가 앓고 있었던 문제를 말씀하면서, 그것을 통해 교회의 기초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은 그저 너희를 권한다고 하지 않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한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내 뜻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우리 주님 예수님의 뜻대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주님의 이름으로 너희가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고 한 내용은 무엇이었습니까?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가 한 마음이 되는 것이 우리 주님 예수님의 뜻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거꾸로 생각하면 지금 고린도 교회의 상황은 어떻다는 뜻입니까?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서로 나뉘어져서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글로에라는 사람의 식구 중에 고린도교회 성도가 있었는데, 그 성도를 통하여 바울이 고린도 교회 형편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 즉 다툼이 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이처럼 나뉘어져서 다투었습니까?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한다는 것이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따르는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4개의 파가 존재했습니다. 바울파와 아볼로파, 게바파와 그리스도파입니다. 바울파는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처음 자신들을 전도한 바울이야말로 진정한 지도자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아볼로파는 알렉산드리아 출신 유대인으로 말을 참으로 잘하고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를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8장에 보면 에베소에서 아볼로가 사도 바울의 동역자들이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게 되어 그들을 통해 복음을 배우게 된 후에 고린도로 와서 사역을 하게 됩니다. 


 아볼로가 고린도 교회에 와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할 때, 수많은 성도들이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사람들은 말을 잘하는 것과 지식이 많은 것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아볼로가 딱 그러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볼로를 추종하는 아볼로파가 생긴 것입니다. 또한 게바파가 있었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의 다른 이름입니다. 즉 베드로파입니다. 아마도 베드로가 로마로 가는 길에 고린도를 잠시 들렀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를 높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겼고, 결국 베드로파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파가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바울과 아볼로, 베드로를 따르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너희는 사람을 따르냐 우리는 그리스도를 따른다.”라고 주장했던 사람들 같습니다. 


 이처럼 고린도 교회는 4개 파로 나눠졌는데, 문제는 이들이 서로 자신들이 더 낫다고 주장하며 다투었다는 것입니다. 4개 파로 나뉜 성도들은 자신들이 따르는 지도자가 가장 훌륭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기에 그 훌륭한 지도자에게 속한 자신들이야 말로 정통 신자라고 우겼던 것입니다. 서로가 자신들만이 정통이라고 우기니까 교회 안에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고, 분열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린도 교회 모습이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신학교에서 같이 공부했던 목사님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가 개척교회 하시는 목사님들의 어려운 사정을 들었습니다. 교회를 개척하고 1년, 2년이 지났는데, 사람이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지금 성도들이 작은 교회보다는 큰 교회를 선호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라고 합니다.


  큰 교회를 다니면 자기 신앙도 좀 더 좋아 보이는 것 같고, 큰 교회라서 일을 많이 하니까 자기는 아무 것도 안 해도, 뭔가 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큰 교회를 선호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 들은 이야기입니다. 아는 사람이 “교회 다니세요?” 하고 물으면, 큰 교회 다니는 사람은 아주 당당하게 “어느 어느 교회 다닙니다. 목사님은 누구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 몰라요.”라고 묻지 않는 말까지 다 대답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동네 작은 교회 다니는 사람은 “교회 다니세요?” 라고 물으면 “네 교회 다녀요” 이러고 만다는 것입니다. 교회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끄럽다는 것이죠. 다니는 교회 크기가 믿음의 크기라도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은곡교회 성도 가운데는 이런 분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교회의 크기가 믿음의 크기가 아닙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의 규모의 크다고 내 믿음이 큰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반대로 내가 다니는 교회가 작다고 해서, 내 믿음이 초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꾸만 우리의 믿음을 유명한 사람이나, 교회의 규모 등을 통해 증명하려고 합니다. 마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이 따르는 지도자를 통해서 자신들의 믿음을 증명하려고 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쓴 책에서 본 내용입니다. 한 성도님이 있었는데, 그 분이 옛날 한경직 목사님이 목회하실 때 영락교회를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닌 지 10년이 지나도록 세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세례를 받으시라고 권면해도 아직 때가 되지 못한 것 같다고 거절하더랍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서 그 성도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결국 세례를 받지 못하고 미국에 간 것이죠. 그런데 거기서도 세례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저는 세례를 꼭 한경직 목사님에게만 받아야 합니다.”라고 대답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한경직 목사님을 미국으로 초청해서 저녁을 대접하고, 집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례를 베푼 한경직 목사님은 돌아오는 길에 같이 갔던 목사님에게 “아무래도 내가 잘못 한 것 같아”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된 것일까요? 자신의 믿음을 사람을 통해 증명하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도 이와 똑같은 일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자신이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 대해 서로 자랑을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 14~16절을 보세요. “나는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너희 중 아무에게도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아니한 것을 감사하노니 이는 아무도 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말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내가 또한 스데바나 집 사람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그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 세례를 베풀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와서 처음 복음을 전하고 믿었던 그리스보와 가이오 외에는 내가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이지 모른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고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면, 그 사람들이 나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자랑하면서 분파를 만들어 서로 싸웠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들을 자랑하며, 파를 만들어 다투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어떤 말씀을 합니까? 13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며 바울의 이름으로 너희가 세례를 받았으냐” 사도 바울은 교회가 어찌 나뉘었느냐 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에베소서 2:23절에 보면 “교회는 그의 몸이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나눠질 수 없습니다. 교회가 나눠진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나눠진다는 것인데,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바울이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고 묻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구원받은 것이 나 때문이냐? 너희의 모든 죄가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내가 한 일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성도로 부르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너희가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고 묻습니다. 세례는 예수님과 우리가 연합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의식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 옛사람의 죽음이 되고, 예수님의 부활생명이 우리 새사람의 생명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세례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바울과 연합되었다는 것인데, 그것이 도대체 말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가 사람을 자랑하며 분열하여 다투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죄 사함을 얻어 구원받은 성도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세례를 받아 예수님과 연합하여 옛사람은 죽고,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결코 나눠질 수 없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그 어떠한 것도 높임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사도 바울이라도, 성경을 기가 막히게 잘 가르치는 아볼로라도,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라도 예수님보다 높임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누구입니까? 예수님께서 자기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세운 일꾼들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왜 자신들이 따르는 지도자만을 자랑하며, 서로 나눠져서 다투었을까요? 그것은 그들 속에 허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허영이 무엇입니까? 헛된 영광입니다. 영광이긴 영광인데, 비어 있는 영광, 겉치레뿐인 영광입니다. 본질이 아닌 껍데기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좋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가 따르는 지도자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드러내려면 다른 지도자들하고 비교를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지도자는 높이고, 다른 지도자는 깎아 내리는 것이죠. 그러면 그 깎아내린 지도자를 따르는 사람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그래서 다툼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신앙의 본질이 아닌 껍데기에만 신경을 썼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보냄을 받은 것은 세례를 주려 함이 아니라,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심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세례를 주는 일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비하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다 라는 뜻이 아닙니다. 사실 세례와 복음 전하는 일은 서로 떨어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을 전해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바로 세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주는 일이 아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부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굳이 이 둘을 비교한 것은 누가 세례를 주었는가에만 신경을 쓰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복음이라는 본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세례의 본질적인 의미보다는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는가에만 신경을 썼습니다. 그러나 세례의 핵심은 누가 세례를 주었는가가 아닙니다. 누가 세례를 베풀어도, 그 세례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이라면 참된 세례가 되는 것입니다. 세례를 베푸는 사람에 따라서 세례의 질이 달라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개신교에서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받은 영세를 인정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비록 로마카톨릭 교회가 문제가 많고, 우리와 같은 신앙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이 참 많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베푸는 영세, 즉 세례를 우리가 인정하는 것은 그것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는 누가 베풀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구의 이름으로 베풀어졌느냐가 더 본질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세례를 베풀기 위해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즉 본질을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그러니까 너희들도 껍데기에 신경쓰지 말고 본질을 추구하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대단한 목사님과 함께 있다는 것으로 자기 신앙을 증명하려고 하지 말고,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랑하지 말고, 어디 큰 교회에 다닌다고 신앙이 좋은 것으로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두 껍데기입니다. 본질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입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에 집중한다면 결코 나눠져서 다툴 수 없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만을 따르고, 자랑한다면 어떻게 서로가 더 낫다고 말하면서 싸울 수 있겠습니까? 모든 성도들이 복음에 집중하여, 그 능력을 경험하며 살아간다면 교회의 크기가 무슨 문제이고, 그 교회의 목사님이 누구라도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4개의 파로 나눠져서 서로 싸우는 그 근본적인 이유 안에는 세상의 헛된 영광, 즉 허영을 쫓는 마음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다름 아닌 교회의 본질, 즉 예수님과 그의 복음에 집중하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을 자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아무리 대단한 영적 지도자라도 그 사람이 우릴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따르고 자랑해야 할 분은 오직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고, 세례를 통해 우리와 하나로 연합되는 예수님 밖에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 예수님과 그의 복음 외에 자랑이 있다면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전통 있는 교회, 선한 일을 많이 하는 교회, 교회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귀한 목회자, 이러한 것들은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귀한 은혜요 선물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우리는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요, 선물이지만,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본질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전통과 역사, 규모, 사람을 자랑하지만, 그 영적인 생명력은 가물가물한 교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모두가 고린도교회처럼 허영을 쫓았기 때문입니다. 본질이 아닌 껍데기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교회의 본질인 예수님과 그의 복음에 집중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님만을 사랑하고, 오직 예수님만을 자랑해야 합니다. 오직 교회 안에 복음의 능력이 나타나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것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모르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고, 믿음이 연약했던 분들이 말씀 가운데 성숙한 믿음을 가지게 되며, 염려 속에 살아가던 분들이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런 복음의 능력, 말씀의 능력,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게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그의 복음에만 집중할 때 교회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나눠진 마음들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하게 합해지는 일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 안에 있는 허영, 헛된 영광을 구하는 모든 마음이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대신 예수님과 그의 복음으로 우리의 심령이 충만해지고, 뜨거워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영적 생명력이 흘러넘치고, 주 안에서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는 주님이 바라시는 복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와 우리 모두를 주님이 원하시는 아름다운 교회, 복된 성도로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