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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9/20,주일-오후) "성령과 지혜, 믿음이 충만한 집사" /행 6:1~6 / 고한율목사

(9/20,주일-오후) "성령과 지혜, 믿음이 충만한 집사" /행 6:1~6 / 고한율목사찬송가 : 330 장, 320장

150920_3성령과 지혜 믿음이 충만한 집사-고한율목사.pdf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은 ‘집사’ 직분이 교회에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 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다고 말씀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로 예루살렘 초대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41절에 보면 오순절 성령강림이 있던 그 날에 무려 삼 천 명이 신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4:4절에 보면 오 천 명의 남자가 또한 신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말씀을 종합해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수 만 명이 족히 모이는 큰 교회로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 많은 인원들이 한 자리에 모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에, 여러 장소로 나뉘어 모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자 교회 안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방금 읽은 1절에 보면 특별히 구제와 관련해서 교회 안에 문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안에는 두 부류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한 부류는 히브리말을 하는 본토 유대인이었습니다. 다른 부류는 헬라말을 하는 외국에서 온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 둘은 같은 유대인이었지만, 태어난 곳이 달랐고, 주로 사용하는 말도 달랐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사람들이 많아지자, 그 안에 과부들도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남편이 없는 과부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대부분의 직업이 남자들에게만 허용되었기 때문에, 여자의 힘으로 산다는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 안에 있는 과부들에게 구제비를 주어 그들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구제비를 나눌 때, 상대적으로 그 숫자가 훨씬 많았던 히브리파 과부들에게 더 많은 구제비가 전달되었습니다. 상대적으로 그 수가 적었던 헬라파 과부들이 소외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차별이 생기자, 헬라파 유대인들이 불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구제비 문제로 예루살렘 교회는 큰 갈등을 빚게 되었고, 분열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도들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게 됩니다. 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 하니” 사도들이 제시한 해결책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사도들은 구제의 일보다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겠다는 것입니다. 이전까지 구제하는 일은 사도들이 직접 했거나, 혹은 그들이 부탁한 몇몇 사람들이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교인 수가 너무 많아지고, 구제 일이 커지다 보니까 많은 시간을 이 일에 사용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이었던 사도들은 자신들이 어떤 일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그 결과 사도들은 자신들이 구제의 일을 하는 것보다 기도와 말씀 사역에 더 힘쓰는 것이 옳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제하는 일이 기도와 말씀사역보다 덜 중요하다는 뜻이 아니라, 사도들에게 맡겨진 본래의 일에 더욱 집중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함께 사도들은 두 번째 해결책을 내놓았습니다. 그것은 바로 집사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 사람을 택하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하면 이 일곱 사람들에게 구제하는 일을 맡기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 말씀에 보면 ‘집사’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일곱 사람을 집사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집사’라는 말의 뜻을 보면 지금 세워지는 일곱 사람이 집사로 세워졌다고 보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집사라는 말은 “διάκονος”(디아코노스)라는 말인데, 이 말 속에는 식사를 할 때 옆에서 시중을 들다, 누군가를 섬기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집사라는 말은 “누군가를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과부를 구제하는 일, 즉 어려운 형편에 있는 성도를 돕는 일을 위해 세워진 사람을 ‘집사’로 부르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사도들은 일곱 명의 집사를 세워서 그들에게 구제의 일을 감당하도록 하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도들의 두 가지 제안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5~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했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온 교회 성도들이 사도들의 제안을 기뻐하였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일곱 사람을 택하여 사도 앞에 세웠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이 일곱 명에게 안수하여 그들을 집사로 세웠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에서 구제하는 일을 감당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특별히 안수집사가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신자가 안수집사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배우게 됩니다. 


 첫째, 안수집사에게 맡겨진 주된 일은 구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안수 집사에게 맡겨진 우선적인 일이 교회 안에 있는 어려운 성도를 돕고 구제하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안수집사는 구제에만 신경 쓰고 다른 일에는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실제로 6:8절에 나오는 스데반 집사의 이야기를 보시기 바랍니다.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적을 사람들 앞에서 행했다고 말씀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7장 전체는 스데반이 공회에 출석해서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스데반뿐만 아닙니다. 빌립 집사도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처럼 집사들은 구제하는 일만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직된 교회 안에서 안수집사의 주된 사역은 어려운 형편의 성도들을 돌아보아 그들을 돕는 구제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국교회 안에서 안수집사가 하는 일은 이러한 성경적인 가르침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많은 교회에서 안수집사는 그저 장로가 되기 위한 중간 단계 정도로 여겨질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교회의 직분을 성경적으로가 아니라, 유교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제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초등학생들에게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장로가 높아요, 목사가 높아요?”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모든 직분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모두 평등합니다. 목사나 장로나 안수집사나 권사나 서리집사나 하나님 앞에서 직분을 맡았다는 점에서는 누가 높고, 누가 낮다고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다만 각각 그 하는 일이 다를 뿐입니다. 


 이런 점에서 종교개혁자들은 모든 성도들이 제사장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뜻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는 다 똑같은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역할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교회 안수집사님들은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안수집사가 무엇을 해야 하는 직분인지를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세상적으로 직분을 이해하면 안 되고, 성경이 말씀하는 대로 직분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이처럼 안수집사의 주된 사역은 구제하는 일입니다. 목사와 장로가 성도들의 영적인 필요를 채우는 직분이라면, 안수집사는 물질적인 면에서 성도의 필요를 채우는 직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이 둘 모두 중요하다고 말씀합니다. 영혼만 중요하다고 말씀하지 않고, 육체만 중요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병든 영혼만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병든 육체도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사역도 마찬가지로 영혼과 육체 모두를 포함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목사와 장로가 성도들의 영혼을 위해 일한다고 한다면, 안수집사는 성도들의 육체를 위해 일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수집사의 일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가 하는 일과는 구별된 아주 중요한 일을 위해 세움 받게 되는 직분이 바로 안수집사입니다. 이처럼 안수집사라는 직분이 중요하기에 성경은 그 자격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안수집사의 자격에 관해서는 오늘 보는 사도행전 6장과 디모데전서 3장에 각각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사도행전에서 말씀하는 안수집사의 자격은 “성령과 지혜, 믿음이 충만한 사람”입니다. 3절에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5절에서는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자격을 볼 때 안수집사라는 직분이 단순히 기능적인 일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제하는 일을 할 때, 그저 누구에게 얼마를 돕는다는 식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라면 성령과 지혜, 믿음보다는 행정력이나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능력이 더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 안수집사는 성령과 지혜,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구제라는 것이 단순히 물질적으로만 돕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온전한 신자로서 세우는 일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교회에 직분을 주신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교회의 모든 직분이 바로 이 목적을 위해 존재합니다. 즉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도록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목사가 왜 존재합니까? 장로와 권사는 왜 존재합니까? 안수집사와 서리집사는 왜 있습니까?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일을 위해서 예수님이 직분을 교회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누가 직분을 받았다고 했을 때, 그것은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신앙이 좋다는 계급장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것은 모두 직분을 세상적으로 이해한 것입니다. 


 이렇게 직분을 세상적으로 이해하게 되면 교회가 타락하게 됩니다. 중세교회에서는 교회가 사회에 얼마나 큰 힘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한 교회의 목사가 된다는 것은 높은 지위와 많은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을 뜻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일이 발생했습니까? 목사직을 돈으로 사고, 팔았습니다. 자기 뒤를 이어 자기 자식을 세우는 세습이 일어났습니다. 한국교회에서도 이런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을 볼 때 우리가 직분에 대해 얼마나 세상적으로 생각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안수집사가 구제의 일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일은 교회의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수집사는 누구보다 성령과 지혜와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 가운데 성령으로 늘 충만해야 하고, 성도들의 어려움을 잘 해결할 수 있도록 지혜로워야 하며, 어려운 성도들을 힘있게 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헌신 예배하는 우리 모든 안수집사님들이 성령과 지혜, 믿음으로 충만해 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래야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우는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디모데전서 3:8~13절에 보면 안수집사의 자격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3:8~10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와 같이 집사들도 정중하고 일구이언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히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그리고 12절에 보면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자격들은 사실 성령과 지혜, 믿음으로 충만한 자라면 당연히 지켜질 것들입니다. 가령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이 술에 취해서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혜가 충만한 자가 일구이언하지 아니할 것이고, 믿음이 충만한 자가 더러운 이익을 탐하여 헌금에 손을 대는 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12절은 중요합니다.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으로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여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안수집사는 잘 다스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 구제하는 일 또한 다스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스린다는 뜻은 내 뜻대로 무엇을 조종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다스림은 사랑과 희생의 마음을 가지고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첫 인간 아담에게 온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다스리라는 말이 바로 사랑과 희생으로 섬기라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씀하는 안수집사의 조건은 분명합니다. 성령과 지혜, 믿음이 충만하여 성도들을 사랑과 희생으로 잘 섬기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우리 안수집사님들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위해 세워주셨음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안수집사님들이 어떤 안수집사가 되어야 하며, 어떤 일로서 교회를 섬겨야 할지를 분명히 알아서, 은곡교회를 더욱 힘 있게 세우는 일에 쓰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집사님들을 사용하여 주셔서 영광 받으시기를 바라며,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큰 은혜를 끼쳐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