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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9/20,주일-오전) "너희를 끝까지 견고히 하시리라" /고전1:1~9 / 고한율목사

(9/20,주일-오전) "너희를 끝까지 견고히 하시리라" /고전1:1~9 / 고한율목사찬송가 : 91장, 447장, 393장, 620장(3절만)



150920_너희를 끝까지 견고히 하시리라-고한율목사.pdf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편지의 앞부분으로서, 인사와 감사의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우리가 보통 편지를 쓰면 먼저 누구에게 쓴다는 것을 밝히고 나서 ‘잘 지내고 있냐’는 식의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상대방에 대해 고마운 점이나 감사할 일 등을 먼저 씁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상대방의 마음을 좋게 하여 편지의 내용을 잘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바울이 딱 그런 식으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1~3절까지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고, 4~9절까지는 감사의 내용을 쓰고 있습니다. 먼저 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이 말씀에 보면 편지를 받게 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먼저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 성도들입니다. 바울은 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주로 마음에 두고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라는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고린도 교회만을 위해 이 편지를 쓴 것은 아닙니다. 바울의 마음속에 있었던 또 다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입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 교회만이 아니라, 각처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 즉 모든 지역에 있는 성도들을 생각하며 편지를 썼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전서를 마치 남의 이야기를 엿 듣는 것처럼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일차적으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쓴 편지이지만, 또한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잘 이해하기 위해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가 있었던 고린도라는 지역이 어떤 곳이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는 현재 그리스 남부에 위치해 있었던 큰 도시였고 당시 아가야 지방의 수도였습니다. 고린도는 무엇보다 동서남북으로 모두 길이 연결되어 있는 교통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무역이 매우 발달하였습니다. 특히 고린도를 중심으로 동쪽에 겐그레아 라는 항구가 있었고, 서쪽에는 레기움이라는 항구가 있었습니다. 이 항구들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과 물건들이 고린도를 지나갔습니다. 


 우리는 고린도 지역의 특징을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매우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무역이 발달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풍요로웠습니다. 둘째는 성적으로 매우 문란했습니다. 무역이 발달했기 때문에 세계 각처에서 사람들이 왔고, 그들을 통해 온갖 종류의 종교가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는 성적으로 문란한 종교들도 많았습니다. 그래서 옛날 속담에 “고린도 사람 같다”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것은 성적으로 매우 타락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만큼 성적으로 타락한 도시가 고린도였습니다. 셋째는 철학과 수사학이 매우 발달했습니다. 특별히 고린도의 지식인들은 철학과 수사학을 중요시 여겼습니다. 여기서 수사학이란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 매우 설득력 있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고린도 지역의 세 가지 특징은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문제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차차로 살펴보면서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읽은 본문에서 인사 다음에 나오는 감사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감사를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바울이 지금 말씀하는 하나님의 은혜는 다름 아닌 성령의 은사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모든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주어진 모든 성령의 은사들 중에 언변과 지식의 은사가 특히 두드러졌습니다. 여기에서 언변의 은사란 특히 고린도전서 14장에 나오는 방언과 예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식의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지식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튼 분명한 사실은 고린도 교회는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아주 풍성하게 나타났던 교회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은사들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6~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그들이 받은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서 그들이 전해들은 그리스도의 증거, 즉 복음을 더욱 분명히 믿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풍성한 은사들로 말미암아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의 재림을 더욱 더 사모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고린도 교회는 성령님의 역사가 아주 분명하게 나타나는 그런 뜨겁고 활기가 넘치는 교회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은사가 이처럼 풍성한 고린도 교회였음에도 고린도 교회 안에는 수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고린도 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바로 성령의 은사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은사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날수록 그것은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그 은사를 받아서 사용하는 우리가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 성도님이 있습니다. 청년 때 같이 신앙생활을 했는데, 제가 신학교를 가고 전도사로 다른 교회를 가게 되면서 소식이 끊어졌습니다. 그러다가 몇 년 만에 소식을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도 다른 교회로 옮겼는데, 옮긴 교회가 성령의 은사를 강조했던 교회인 것 같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받기 위해서 아주 열심히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에 신비한 체험을 하게 되었고, 자신이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 하면 “투시”의 은사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다른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이 보인다는 거예요. 


 그래서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쳐다보면서 “당신 마음에 뱀이 하나 있어” 이런 식으로 말을 한다는 거예요. 여러분, 그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무서워서 그 교회에 나올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 “투시의 은사”는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령의 은사는 교회를 위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를 어렵게 하고, 혼란에 빠지게 하는 것은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사탄의 은사일 뿐입니다. 


 아무튼 왜 이런 일이 발생했겠습니까? 내 신앙이 좋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은사가 있으면 훌륭한 신앙인이고, 은사가 없으면 시원찮은 신앙이라는 것이죠.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기도원 중에 하나인 곳에서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그 기도원에 가면 출입구에서 당신이 받은 은사가 뭔지를 먼저 물어봅니다. 방언이면 노란 리본, 예언이면 파란 리본, 뭐 이런 식으로 은사에 따라 리본을 달아주었습니다. 


 그러면 기도원 안에서 서로 지나가면서 ‘아 저 사람은 무슨 은사를 받았구나’ 이렇게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리본이 많이 달린 사람은 아주 목을 뻣뻣이 하고 자랑스럽게 기도원을 돌아다녔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마치 죄인처럼 있는 있어야 했습니다. 누구겠습니까? 은사를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그 기도원에서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성령의 은사를 마치 신앙의 계급장처럼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일이 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안에서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은사를 감사하게 생각하며, 교회와 성도를 섬기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데, 마치 은사를 자기 신앙에 대한 계급장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더 나은 은사를 가졌는지에 대해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다투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2:30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 병 고치는 은사를 가진 자이겠느냐 다 방언을 말하는 자이겠느냐 다 통역하는 자이겠느냐” 병 고치는 은사가 제일 좋은 은사라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이 은사를 받겠느냐? 방언의 은사가 최고라 하여 다 방언을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러한 성령의 은사들은 우리가 바란다고 해서 얻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오직 성령께서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12:11절에 이렇게 나와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


 성령의 은사는 성령님께서 그의 뜻대로 교회의 유익을 위해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무엇이 더 좋고 나쁘고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이러한 성령의 은사를 오해하여 스스로 교만해졌던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신앙의 계급장 정도로 생각하여, 다른 사람의 신앙을 판단하고, 자기를 높이는 일을 저질렀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성도들이 서로 상처를 받게 되고, 교회가 혼란 가운데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게 되겠지만, 고린도전서 12장부터 14장까지 바울은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에 정말로 귀한 은혜를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부어주셨습니다. 모든 은사라고 말할 정도로 부족함 없이 풍성하게 주셨습니다. 이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얼마나 뜨겁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였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성령의 은사로 말미암아 더욱 더 든든하게 세워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통해 분명히 알게 되는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좋은 은사를 주시고, 또한 교회 안에 아무리 좋은 무엇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교회가 든든히 세워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령 우리는 교회를 생각하면서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교회가 잘 부흥하지 않는다고 말을 합니다. 반대로 어떤 부흥하는 교회를 보면서 그 교회는 이런 저런 이유 때문에 성장하게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물론 이런 말들은 결코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일리 있는 말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확하게 맞는 말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고린도 교회야 말로 부흥하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춘 교회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여러 큰 장점을 가지고 있는 교회였습니다. 무엇보다 성령의 모든 은사가 풍성하게 나타난 교회였습니다. 또한 고린도라는 도시가 부유한 도시였기 때문에, 상당한 부자들이 교회 안에 성도로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구가 많은 도시였기 때문에 사람들을 불러 모이는 일도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좋은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고린도 교회는 다른 교회들에 비해 훨씬 더 문제가 많고 어려움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고린도전서를 차례로 살펴볼 때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린도 교회를 통해서 교회가 든든히 서가고, 부흥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그런 좋은 조건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성령의 은사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읽은 본문에서는 성령의 은사가 풍성한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 때문에 서로 다투고 있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바울은 오히려 하나님께 그것에 대하여 감사드리는 것일까요? 그것은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 성령의 은사들을 통해서 고린도 교회를 든든히 세우시리라는 믿음이 바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러한 믿음이 오늘 본문 8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바울은 지금 성령의 은사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문제들로 골치 아픈 고린도 교회이지만, 결국은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세워지리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주께서 그렇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너희를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비록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연약하고 부족하며, 또한 한편으로는 교만하여 서로 싸우고, 다투는 일들을 함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결국은 끝까지 견고하게 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는 1:2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하나님의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신 교회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고린도 교회를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까? 9절입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고린도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미쁘신 하나님입니다. 이 미쁘다는 말은 다른 말로 신실하다는 것입니다. 변치 않고, 항상 같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그 고린도 교회가 끝까지 든든하게 서게 될 것이라고 말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바로 고린도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이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인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받고도, 그것을 가지고 다투는 참으로 어리석고, 부족하고, 교만한 사람들일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그들을 붙드셔서 결국은 하나님의 교회로 세우시게 될 것입니다. 바울에게 이런 믿음이 있었기에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오늘날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세상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비난과 조롱을 받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한국교회가 곧 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까지도 서슴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국교회의 성도 숫자는 계속해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교회가 문을 닫고 있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주일학교 학생이 없어서 주일학교를 운영하지 못하는 교회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참으로 교회에 대한 절망적인 소식이 크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인 우리들은 교회에 대해서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이 교회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무너지고, 세워지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닙니다. 교회의 운명은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시고, 부흥하게 하실 것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국교회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세우실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은곡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은곡교회도 어떻게 보면 이런 저런 어려움이 적지 않습니다. 성도님들이 보실 때 분명 실망스러운 부분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은곡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이며, 그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은곡교회를 붙드시는 한 은곡교회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든든히 서가고 부흥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연약하고 때로는 어리석고, 때로는 교만할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거룩한 성도로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이 일을 해야 한다면 절대 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셔도 그것 가지고 싸우는 것이 우리의 못난 모습입니다. 하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은 우리 힘으로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시겠다고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약의 인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삼손입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사사였습니다. 사사는 여호수아 이후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다스리기 위해서 세우셨던 지도자들인데, 사울 왕이 세워지기 전까지 활동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삼손은 매우 특별한 사사였습니다. 삼손이 태어나기 전에 여호와의 사자가 그의 어머니에게 나타나 삼손의 탄생을 알렸습니다. 그러면서 삼손은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이 될 것이라는 말씀을 받았습니다. 나실인이란 하나님께 철저하게 바쳐진 사람을 뜻합니다. 


 삼손은 그야말로 태어날 때부터 나실인, 즉 하나님께 바쳐진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은 그에게 그 어떤 사람도 가져보지 못한 큰 힘을 주셨습니다. 또한 삼손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여서 큰 권능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이처럼 삼손은 하나님께서 아주 특별하게 세운 사사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삼손이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바로 여자들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을 가지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했던 것이 삼손이었습니다. 결국 삼손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들릴라 라는 여인의 꾐에 빠져서 힘의 근원이 되는 머리카락을 다 잘리고, 비참한 노예 신세가 되어버립니다. 이 때 여호와께서 삼손을 떠났다고 말씀합니다. 


 이 삼손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누구입니까?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세상 어느 백성들도 경험하지 못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능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어떻게 행하였습니까? 삼손과 똑같이 했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은사를 하나님의 영광이 아닌, 자기의 이익을 위해 사용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삼손의 삶을 보여주십니다. 아무리 많은 은혜와 능력을 받은 삼손이라도 그것을 바르게 쓰지 못함으로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도 계속해서 불순종하면 삼손과 같이 비참한 처지에 놓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삼손 이야기에서 결론 부분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이 부분이 아주 중요합니다. 삼손은 머리카락이 잘려서 노예가 됩니다. 그런데 그런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 수천 명이 모여 있는 다곤 신전에 불려가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들의 원수인 삼손을 조롱하기 위해 불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삼손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힘을 주시기를 기도한 후에 다곤신전의 두 기둥을 껴안고 기둥을 무너뜨립니다. 그 결과 신전에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일시에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삼손을 떠나셨음에도 불구하고 왜 마지막에 힘을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삼손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결코 후회가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이루고자 하셨던 일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비록 삼손이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거역하여서, 결국 머리카락이 잘리어 비참한 신세에 놓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삼손을 통해 이스라엘의 원수인 블레셋을 심판하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이 택하신 교회나 성도는 결코 버려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사용하십니다. 다만 삼손처럼 그렇게 불순종하며, 거역하는 가운데 비참하게 쓰임 받는 것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운데 아름답게 쓰임 받는 것이 훨씬 더 복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삼손을 통해서 두 가지 교훈을 받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택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끝까지 들어서 사용하셨습니다. 아무리 불순종하고 거역해도 사용하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 뜻을 반드시 이루십니다. 하지만 두 번째 교훈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은 삼손처럼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쓰임 받지 말고, 순종함 가운데 아름답게 쓰임 받는 것이 복되다는 것입니다. 삼손이 만약 여자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계획을 잘 깨달아 순종했다면 얼마나 귀하게 쓰임을 받았겠습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마음에 잘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 많고, 문제 많은 고린도 교회를 하나님의 교회라고 부르시면서 끝까지 견고히 하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도, 또한 우리 성도 각자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와 우리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절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에 끝까지 자신의 선한 뜻을 이루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를 붙들어 주님의 뜻을 이루시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하나님께 어떻게 하면 더 복되게 쓰임 받을 수 있을까를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삼손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삼손처럼 쓰임 받는 것이 복된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처럼 쓰임 받는 것이 복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결국 자신의 뜻을 이루시지만, 삼손이나 고린도 교회는 그 유익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릴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을 잘 깨닫고, 그 일에 우리의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참으로 복된 성도의 모습입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또한 우리가 신실한 성도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을 믿고, 묵묵히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십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복된 일에 참여하는 기쁨과 감사를 풍성히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가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