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3,주일-오후) "살전 강해(12) 자는 자에 관하여" / 살전 4:13 ~ 18절 / 고한율목사 / 찬송가 : 545 장, 180 장
150913_3자는 자에 관하여-고한율목사.pdf
우리는 지난주에 형제 사랑에 관해 사도 바울이 가르친 내용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자는 자들”에 관한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3절입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한다’는 말은 ‘꼭 알기를 바란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꼭 알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 자는 자와 관련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는 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죽은 자들을 말합니다. 바울 당시의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자는 사람으로 자주 표현하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죽은 사람을 자는 자라고 표현했지만, 그 의미는 전혀 다릅니다. 당시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은 사람이 한 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부활을 전혀 믿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면 바울이 철학의 도시인 아덴, 즉 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때 바울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들은 아덴 사람들의 반응은 바울에게 참으로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7:32절입니다.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들은 대부분의 아덴 사람들의 반응은 조롱이었습니다. 부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죠. 아주 소수의 사람들만이 바울의 이야기를 더 듣고 싶어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당시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자는 사람이라고 표현할 때, 다시 깰 것을 생각하면서 그렇게 표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경우는 전혀 달랐습니다. 바울이 죽은 사람을 잔다라고 표현한 것은 그 사람이 다시 깰 것, 즉 부활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13절 하반절에서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소망 없는 다른 이는 부활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에 당연히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신자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끝이 아니라, 그 뒤에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1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사도 바울은 우리가 죽은 후에 부활하게 될 것이 확실하다고 말씀합니다. 그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야말로 우리가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만약 바울의 말대로라면 예수님의 부활이 가짜라면 우리가 부활하게 된다는 것도 거짓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부활을 믿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정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셨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을 본 증인들이 너무나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4~8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사람들의 명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명단에 보면 열두 제자들 외에도 오백 여 형제가 있습니다. 즉 부활하신 예수님이 오백 명의 형제들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중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울이 활동하던 당시 여전히 살아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부활을 확인해 줄 증인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부활은 너무나 확실한 역사적 사실인 것입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그를 믿는 우리 또한 분명히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은 성도들이 언제 부활하게 될까요? 14절 하반절에 보면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성도들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그는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님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재림하실 때 죽은 성도들도 함께 부활하여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혼란에 빠트린 문제가 있었습니다. 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내용은 “주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코 앞서지 못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일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살아 있지 못하고, 죽게 되면 불이익을 얻게 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불이익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이 문제로 말미암아 심한 갈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일어날 일들의 순서를 말씀합니다. 16절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예수님은 하늘로부터 호령, 즉 명령하는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하늘로부터 강림하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예수님이 강림하신다고 하지 않고, 주께서 강림하신다고 표현한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처음 이 세상에 오신 것과 달리 이 세상을 다스리는 심판주로서 이 세상에 오신다는 뜻이 주님이라는 말에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이 처음 이 세상에 오실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아기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어디서 태어나셨습니까? 짐승들이 머무는 마굿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예수님의 탄생을 제일 먼저 와서 축하해 주었습니까? 당시 사람들에게 가장 멸시 당했던 사람들인 목자들이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이 세상에 처음 오실 때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낮고 초라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낮고 초라한 모습으로 오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심을 통해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세상 사람들이 멸시하고 미워했던 세리와 창녀, 죄인들을 예수님이 찾아가시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누구라도 구원의 은혜를 받도록 이처럼 아주 낮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재림은 완전히 다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은 더 이상 아기의 모습으로, 가장 낮은 곳으로 오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온 세상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온 세상에 울리는 명령 소리와 천사장의 소리, 나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재림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더 이상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복음이 전파되어 회개하여 돌아올 수 없습니다. 재림의 날은 곧 심판의 날입니다. 이 날 이후에는 더 이상의 구원의 희망이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지금이야말로 구원의 때이고, 은혜 받을 만한 때라고 말씀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더 이상 구원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곧바로 모든 사람들은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는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게 되고, 불신자는 수치스러운 부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무엇보다 신자의 부활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16절 하반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누가 먼저 부활하게 됩니까? 예수님의 재림 전에 죽었던 성도들이 먼저 부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재림 때까지 살아남아 있던 자들이 부활하게 됩니다.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죽은 자들이 부활하게 되어 하늘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이 때 재림 때까지 살아남아 있던 자들도 함께 하늘로 올라가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이처럼 공중에서 재림하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휴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휴거에 대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것만큼만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죽은 자들이 부활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고, 그 후에 그 때까지 살아남아 있었던 자들도 마찬가지로 공중에 올라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후에 어떻게 되는지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계속 공중에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하늘로 올라가는지, 아니면 땅으로 내려오는지 더 이상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는 것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정도만 아는 것이 우리에게 유익하다는 것입니다. 더 자세하게 아는 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성경은 더 이상 말씀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성경이 말씀하는 데까지만 나가야 합니다. 이 이상을 상상하면 잘못된 길로 빠질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휴거에 대해서 말씀하면서 재림하실 주님을 맞이하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이야기해 줍니다. 그것은 17절 하반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 후로 우리들은 언제나 항상 주와 함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1장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바울 자신은 이 땅에서 속히 떠나서 주와 함께 있고 싶다고 솔직히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서 아직 주님이 맡기신 일이 있기 때문에 당장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정말로 복되다는 사실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우리들에게 아주 자세하게 그 날에 대해 설명하는 대신에 재림 때 우리가 받게 될 가장 큰 복이 바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을 기대하며 오늘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삶을 충성되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18절에서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쓸데없는 생각으로 근심하지 말고, 그 날에 우리가 누리게 될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바라보며 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자에게 참된 위로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시 오셨을 때 우리가 부활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눈물도 없고, 죽음도 없고, 슬픔도 없고, 근심과 걱정도 없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이 가득한 천국에서 우리는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고 기대할 때 참된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마다 “주님 오소서”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이 그들의 위로요, 소망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또한 예수님의 재림을 기대하고 바라보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이 끝이 아닙니다. 우리는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오시는 그 날 우리는 부활하여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을 가지고 오늘도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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