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주일-오후) "살전 강해(13) 때와 시기에 관하여" / 살전 5장 1 ~ 11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546 장, 176 장
151004_때와 시기에 관하여 -고한율목사.pdf
오늘 읽은 본문은 “때와 시기에 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때와 시기”란 특별히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즉 재림의 날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우리 신자가 종말을 어떻게 준비하고 맞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시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먼저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때와 시기에 관하여서, 즉 예수님의 재림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다라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주의 날, 즉 예수님의 재림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이미 자세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바울로부터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이야기를 이미 들어서 자세히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기서 다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만큼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내용은 한 번만이 아니라, 여러 번 듣고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설교를 들을 때나 성경공부를 할 때 들었던 내용을 또 듣는다고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내용이 반복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내용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마치 밤에 도둑 같이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재림은 밤에 도둑이 오는 것처럼 그 누구도 모를 때 갑자기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재림이 갑자기 일어날 것에 대해서 바울은 또 다른 비유를 통해 설명합니다. 3절입니다.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갑자기 임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이를 낳아 본 여자 성도님들은 이 말씀을 잘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도 제 아내가 아이를 낳는 것을 다 지켜보았는데, 어제 밤까지도 잘 잤는데, 갑자기 새벽 5시에 일어나서는 병원에 가야겠다고 말하더라고요. 진통이 갑자기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병원에 갔는데, 아이가 바로 나오지 않고 그 날 밤 10시가 되어서야 나왔습니다. 아무튼 해산의 고통이 갑자기 온다는 것을 실제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재림이 이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바울이 든 두 가지 비유, 즉 밤에 도둑이 드는 것,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찾아오는 것, 이 두 비유의 공통점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 즉 갑자기 일이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느 누가 예수님의 재림이 이 때다, 저 때다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거짓임을 바로 아셔야 합니다. 진짜 그럴까 하며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재림 시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신도 그 때를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4:36절에 보면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재림 때는 천사들도 심지어 예수님 자신도 모른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 때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을 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기에 그런 엉터리 주장에 미혹되는 일이 절대로 없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느 때 예수님 오신다고 거짓말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예수님이 늦게 오신다거나, 아예 안 오신다고 주장하는 것도 큰 문제입니다. 초대 교회 안에 예수님의 재림이 늦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을 향해 사도 베드로가 베드로후서 3:8~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사도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이 더딘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다만 더디게 느껴지는 것은 하나님이 더 많은 사람이 구원받도록 하기 위해 참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교회 안의 신자가 아닌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 세상 사람들이 하는 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3절에 보면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평안하다, 안전하다 라고 말하는 그들은 신자가 아닌 세상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 당시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이 세상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로마가 자신이 정복한 지역들을 평화롭게 다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역사가들은 Pax Romana(팍스 로마나)라고 부릅니다. 로마가 가져다 준 평화라는 것이죠.
로마제국에 매우 충성스러웠던 데살로니가 도시는 로마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시민들이 매우 풍족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외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할 그 때에 예수님이 재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들의 평안과 안전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들 모두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그것은 이 세상이 주는 평안과 안전이 결코 우리를 지켜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언제까지나 로마가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팍스 로마나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 백 년이 못 되어서, 로마 제국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경제가 발전하고,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에게 평안과 안전을 줄 수 없습니다. 막강한 군사력이 있다고 해도 그것이 우리를 지켜 줄 수 없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군사력이 강한 미국이지만, 그 내부에서는 총기사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는지 모릅니다. 얼마 전에도 25세 청년이 수십 명의 사람들을 이유 없이 총으로 쏘아 죽인 일이 있었잖습니까?
그렇다면 평안과 안전은 어디로부터 얻을 수 있습니까? 성경은 오직 한 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안과 안전을 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바로 우리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이 이 세상에서 줄 수 없는 참 평안과 안전을 주십니다. 요한복음 14:27절에 보면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참된 평원을 원하십니까? 예수님께 나오셔야 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참된 평안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 세상에 그 무엇이 우리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생명의 주인이 되시며, 세상을 다스리는 예수님만이 이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곳에서 평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 안에서 평안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예수님이 주시는 참된 평안이 가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외치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 그들은 심판을 당하게 될 것이며, 멸망을 피하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재림 날은 두려운 날입니다. 왜냐하면 그 날 예수님께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에는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이 숨겨진 것 없이 모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산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날은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날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요한계시록 6:16~17절에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신 날, 그 심판대 앞에 설 사람들이 얼마나 두려워할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산들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그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산들과 바위들에게 자신들을 덮으라고 말을 합니다. 왜냐하면 심판하실 예수님의 모습이 너무나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의 날에 죽음보다 더 두려운 심판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불신자들에게 예수님의 재림 날은 피할 수 없는 무서운 심판의 날이 되겠지만, 신자들에게 그 날은 오히려 구원이 완성되는 날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 4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신자에게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이 도둑 같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어떤 이단들은 이 말씀을 오해해서, 신자들은 예수님이 언제 오실지 알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실 날은 예수님도 모른다고 했으니, 더 이상 그 날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신자에게는 도둑같이 임하지 않는다는 뜻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신자가 예수님이 오실 날을 항상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갑자기 예수님이 오신다 해도 놀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학교 선생님들이 갑자기 쪽지 시험을 볼 때가 있습니다. 언제 시험 본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갑자기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두가 당황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황하지 않는 학생도 있습니다. 어떤 학생입니까? 늘 예습, 복습을 충실히 하는 학생입니다. 이 학생에게는 오히려 갑자기 보는 쪽지 시험이 반갑습니다. 잘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님이 오실 줄 알고, 매일 그 날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언제 오신다고 해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 5~6절의 뜻입니다.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빛의 아들, 낮의 아들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신자라면, 예수님의 재림의 날은 무서운 날이 아니라, 기다리고 기다리던 가장 복된 날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들에게 세상 사람들처럼 자지 말고, 즉 이 세상에 취해서 살아가지 말고, 깨어서 정신을 차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정신을 차리라는 말씀은 술에 취하지 않고 온전한 정신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마시는 술만이 아니라, 이 세상이 좋아하는 돈이나, 권력, 명예, 인기 등에 취하지 말고, 온전한 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8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여기서 호심경은 군인들이 가슴을 보호할 때 쓰는 것이고, 투구는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군사들의 옷을 가지고 표현한 것은 군인들처럼 늘 깨어 있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그냥 호심경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이고, 그냥 투구가 아니라, 구원의 소망의 투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깨어서 정신을 차리고 사는 삶이란 결국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믿음과 사랑과 소망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매사를 믿음으로 행하며, 이웃 사랑을 실천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소망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예수님의 재림은 더 이상 두렵고 무서운 날이 아니라, 우리에게 참으로 기다려 지는 복된 날이 될 것입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재림의 날을 혹 두려워하는 성도들에게 안심하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9~10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심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신 것, 우리를 부르신 것은 심판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사, 우리의 모든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 연약하여 불순종하고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다시 돌이키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님의 재림의 날을 막연하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신자에게 재림의 날은 심판의 날이 아니라,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는 날로서, 깨어 있든지, 자든지, 즉 언제나 예수님과 함께 하는 날의 시작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는 언제나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주님의 재림의 날을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끝으로 바울은 이렇게 권면합니다. 11절입니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여기서 서로 덕을 세우라는 말씀은 다른 사람을 격려하여 교회로 세워가라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가르침을 마치면서 교회를 세워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우리가 주목해야 합니다.
늘 깨어서 믿음과 사랑과 소망 가운데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함께 서로 돌아보며 격려하며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함께 기다리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로에게 주님이 다실 오실 것이라는 사실을 늘 이야기해 줌으로써 늘 깨어서 신앙생활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서로 만날 때마다 마라나타라고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그 뜻은 “우리 주여 오시옵소서”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함께 기다리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함께 사랑하고, 격려하고, 위로하여서, 주님이 오시는 그 날까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교회를 소중이 여겨야할 중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우리가 마음에 잘 새기고,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며 늘 깨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은곡교회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공동체로서 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풍성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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