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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10/25,주일-오전) "복음의 능력" / 고린도전서 2:1~5 / 고한율목사

(10/25,주일-오전) "복음의 능력" / 고린도전서 2:1~5 / 고한율목사 

찬송가 : 21장, 295장, 310장, 620장(3절만)

151025-1복음의능력_고한율목사.pdf


 저는 지난 주 설교 시간에 하나님께서 마치 청개구리처럼 행동하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청개구리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가 보통 하는 생각과는 정반대로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가령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미디안이라는 나라가 13만 5천명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습니다. 이 때 사사 기드온이 이에 맞서기 위해서 군사를 모집하는데, 3만 2천명이 모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셔야지 마땅하겠습니까?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용기를 불어넣으셔서 10만 명, 아니 20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군인으로 지원하도록 해 주셔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면 천군천사들을 보낼 테니 두려워하지 말고 맞서 싸우라고 격려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너무 많다”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이 많다는 것입니까? 지금 모인 3만 2천명의 군사가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군사를 줄이라고 합니다. 결국 300명까지 줄였습니다. 


 기드온은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13만 5천명의 대군을 맞서 싸워야 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이 이러실 수 있을까요? 청개구리도 이런 청개구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또한 오늘 우리가 분명히 배워야 할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로 승리는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사실입니다. 전쟁의 승리는 너희의 군인 숫자나 너희의 무기, 너희의 전략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부러 이스라엘의 군대를 말도 안 되게 약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승리를 주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도록 만드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인 우리를 약하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무기력하게 만드실 때가 있습니다. 일부러 사방이 다 막힌 골목으로 집어넣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별거 아니구나 하고 실망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런 상황 가운데 두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 힘이나 지혜나 능력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우리는 돈을 의지하고, 세상의 권력과 명예, 사람을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곧 우리의 힘이고, 지혜이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많은 권력과 명예를 누리며, 더 많은 사람을 얻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에 우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가 그것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내가 지금까지 의지해 왔던 세상의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산다는 것이 말처럼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 달리 돈이나 사람, 권력, 명예는 당장 우리의 눈앞에 보이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서 그 영향력이 대단합니다. 여러분 돈 없이 사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내 주위에 아무도 없다면 과연 우리가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요?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도 여전히 돈과 권력, 명예, 사람을 추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의 신앙생활이 변질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없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돈과 권력, 명예와 사람을 얻으려고 하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런 것들을 얻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하는 기도의 내용을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해 달라거나,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순종하게 해 달라는 기도보다는 내가 지금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주시라고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하나님께 달라고 하는 것이 무조건 잘못된 기도는 아닙니다. 어린 아이가 부모에게 필요한 것을 일일이 다 말하면서 달라고 하는 것은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 큰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무엇을 달라고만 하는 것은 분명 문제입니다. 다 컸으면 이제 부모의 마음과 뜻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자기가 필요한 것만 생각하지 말고, 부모의 마음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예수님을 막 믿은 신자라면 그 어떤 기도를 해도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10년, 20년 넘게 신앙생활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세상의 것들을 더 달라고 기도한다면 그것은 결코 바른 일이 아닙니다. 


 신앙이 성숙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 뜻을 점점 더 분명히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확신하는 것입니다. 돈이 전부인 줄 알고, 권력과 명예, 사람이 다 인 줄 알고 살았는데, 그게 아님을 아는 것, 이것이 신앙이 성숙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우리를 약하게 하십니다. 막다른 골목으로 집어넣으십니다. 꼼짝 못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래서 돈도, 권력도, 명예도, 사람도 아무 힘이 없음을, 그것이 우리를 지켜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두 손 들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청개구리처럼 우리에게 행동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의 정반대로 행동하십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역설”이라고 부릅니다. 역설이란 겉으로는 잘못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리인 것을 말합니다. 가령 “사랑의 매”라는 말을 생각해 보세요. 사랑과 매는 얼핏 어울리지 않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 왜 매를 듭니까? 하지만 사랑하니까 매를 드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를 강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약하게 하십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가난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삶에서 경험하는 시련과 고난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미워하셔서 시련과 고난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넣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그렇게 하십니다. 우리는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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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역설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처음 와서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었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먼저 1절을 함께 보도록 하겠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라는 말은 처음 고린도에 와서 너희에게 복음을 전할 때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합니까?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더 정확하게 하면 ‘최고의 말과 최고의 지혜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최고의 말, 즉 화려한 말솜씨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최고의 지혜, 즉 아주 치밀하고 설득력 있는 논리로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우선 알 수 있는 것은 사도 바울의 능력이 부족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최고의 말과 최고의 지혜를 가지고 복음을 전할 능력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럴 수 있는 능력이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2절에 보면 바울이 그렇게 하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 말씀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왜 그렇게 하였을까요? 사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말로 하는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더 아름답고, 설득력 있는 말을 하면 더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아닙니까? 더욱이 고린도 사람들은 말을 잘하는 것과 새로운 지혜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잘 훈련된 학자였던 바울이 아주 조리 있고, 설득력 있는 말로 전도하면 그 결과가 분명 좋게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복음은 그 내용이 중요하지, 그것을 전하는 방법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그럴 듯한 말과 지혜로 사람을 설득하여 교회에 나오게 한다고 해도, 그것으로 그 사람이 성도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되는 것은 복음의 내용, 즉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결코 최고의 말과 최고의 지혜로 생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이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4~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믿게 됩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임한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할 때, 그것은 복음을 전한 사람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했던지 그 복음을 듣고 믿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최고의 말과 최고의 지혜를 가지고 복음을 전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그것 때문에 예수 믿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하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것만으로는 아무도 믿게 되지 않을 것 같은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우리의 생각과는 반대로 믿게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인 저는 이런 사실을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간 이후 설교를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요즘 같은 경우 제가 한 주 동안 거의 10번 이상의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은곡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설교한 횟수를 세어보니 심방설교를 제외하고 293회를 했습니다. 꽤 많이 했죠? 


 그런데 설교를 이처럼 많이 하면 설교를 한 다음에 느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설교를 잘 했다, 못 했다 하는 느낌이 있어요.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라서 이것을 잘했느니, 못했느니 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런 느낌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잘 했다고 생각되는 날은 마음이 얼마나 기쁘고 뿌듯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반대로 설교를 죽 쒔다고 생각했을 때는 성도님들 얼굴도 못 쳐다봅니다. 너무 창피하고 민망합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설교를 잘했다고 생각하고 뿌듯하게 강단 와서 성도들의 얼굴을 보면 그저 그래요. 뭔가 은혜를 더 받았을 것 같고, 더 기뻐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더라는 것이죠. 그런데 반대로 설교를 정말 망친 것 같아서 얼굴도 못 들고 내려오면, 꼭 몇 성도님들이 와서 은혜 많이 받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위로하려고 그러나 보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그렇지 않더라고요. 


 정말 못한 설교라도 하나님이 역사하시니까 은혜를 받습니다. 하지만 정말 잘한 설교라도 하나님이 역사 안하시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설교는 그것을 전하는 설교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아무렇게나 설교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자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전해야 합니다. 하지만 설교자가 훌륭하기 때문에 은혜가 임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이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오늘 본문 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당시 어떤 모습이었다고 말씀합니까?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고린도 사람들이 보니까 바울이 당당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기도 하고, 심지어 떨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라면 그런 모습의 바울을 보고도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겠습니까? “너나 예수 믿고 잘 살아라”고 고린도 사람들이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것을 몰랐을까요? 왜 몰랐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그런 모습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를 전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믿고 구원받게 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연약하고, 두려워하며, 심히 떨면서 전한 복음일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듣는 사람이 믿게 될 것을 사도 바울은 확신했습니다.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하나님의 역사에 전혀 장애가 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서 이런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자신을 쓰신다는 것을 바울은 알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연약한 바울을 복음을 전하는 자로 쓰십니까? 그래야 사람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는다는 것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하나님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그의 일꾼으로 사용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온전하게 드러나 보이도록 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하는 분들 중에 하나님은 왜 나를 이렇게 초라하고 연약하게 하셨는지 궁금한 분이 계십니까? 나에게 재물을 더 주시고, 건강을 더 주시면 주님의 일을 더 열심히 할 텐데 생각하는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왜 지금 이 자리에 있게 하셨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초라하고 연약한 자리에 있게 하셨다면 그것을 통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들은 사람들이 보기에 더 근사하고 더 멋진 자리나 위치에서 쓰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런 분들도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사도 바울도 지금 워라고 말씀합니까? 내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위대한 사도도 그런 자리에 있게 하셨습니다. 무엇을 위해서입니까?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는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이 일을 위해 하나님께서 바울을 약하게 사용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강한 사람, 부한 사람, 똑똑한 사람만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얼마든지 자신의 일을 위해서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 미련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이 부족해서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 부족한 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평생 하나님께 내 부족한 것만을 채워달라고 기도하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더 채워주시면 그 때 일하겠다고 하면서, 결국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그런 불행한 인생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에게는 약하거나, 강하거나, 부하거나, 가난하거나, 똑똑하거나, 미련하거나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약한 사람은 약한 대로 아름답게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은 가난한 대로 귀하게 쓰십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제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저런 사람만 쓰신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가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다면 우리는 누군지는 상관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역설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왜 약하게 하십니까? 왜 시련과 고난을 주십니까?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잘 나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 가운데 나타내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때로는 약하게 하시고, 초라하게도 하시며, 가난하게도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역설을 깨닫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고린도후서 12:10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사도 바울은 우리의 믿음이 어디까지 이르러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곧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할 수 있는 수준까지입니다. 왜 이런 것들을 우리가 기뻐해야 합니까?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곧 강함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약할 때 하나님의 강함이 온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질그릇 같은 내가 깨어질 때 그 속에 있는 놀라운 보화가 세상 가운데 드러나게 되듯이, 우리의 약함 때문에 하나님의 강함이 세상 가운데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연약함과 부족함 때문에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그런 우리의 모습을 통해 나타날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약하고 부족함에도 우리를 사용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신앙생활은 자신과 이 세상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약하게 하시고, 시련과 고난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약할 그 때 하나님의 강함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역설을 잘 깨달아, 우리와 이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의지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지금 연약합니까? 가난합니까? 초라합니까? 그렇더라도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이런 형편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여 능히 우리를 쓰신다는 사실을 믿고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쓰임 받지 못할 인생이 없습니다. 이것을 기억하고 항상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있는 자리에서 충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