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22,주일-오후) "WCF (18)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신 예수님” / 요한복음 1장 14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292 장, 80 장
우리는 지난 시간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기름을 부어 세운 세 가지 직분이 있다고 했지요? 선지자, 제사장, 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선지자의 직분, 제사장의 직분, 왕의 직분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세우셔서 교회로 부르시고, 교회로 부른 우리들을 왕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 그 뜻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에 관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첫째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 둘째,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다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참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할 때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고백서 8장 2항을 보시기 바랍니다(21쪽). 먼저 첫 문장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삼위일체 중의 제 2위로서 아버지와 동일한 신의 본체이시니,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신앙고백서는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한 분, 즉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14절에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무엇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까? 육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거하셨다’는 말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원래 정확한 의미는 ‘장막을 치다’입니다. 여러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성막 안에 지성소가 있는데,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뜻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장막을 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성막이고,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별명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23절인데, 이 말씀은 이사야 7:14절을 인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성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이라는 사실은 요한복음 2:21절에 분명히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육체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막과 성전은 동일한 것입니다. 다만 성막은 이동식이고, 성전은 고정식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성막 혹은 성전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30절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8:19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말씀합니다. 세례를 베풀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아들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것은 너무나 이상한 것이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동일한 본질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칠 때 목사가 축도를 하지 않습니까? 이때도 어떻게 하지요? 고린도후서 13: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서도 예수님과 하나님, 성령님이 같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하나님, 성령님이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5:13절 말씀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위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경배를 드리는 데,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똑같이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고, 어린 양은 바로 그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예수님을 같이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들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린이 책을 보면 위인전이 있는데, 공자와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그 뒤에 예수님이 붙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 혹은 위대한 교사, 위대한 철학자, 위대한 영적 지도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첫째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제 두 번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둘째 내용은 예수님은 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신앙고백서 8장 2항 두 번째 문장부터 읽겠습니다. “때가 차매 그가 오셔서 인성을 받으시되, 인간의 모든 본질적 속성과 공통적인 연약성을 그대로 받으셨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성은 없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그의 체질로 잉태되셨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동정녀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하면 부부관계를 맺지 않은 처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지만, 일반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어 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예수님은 부부관계가 아닌 성령의 능력이라는 기적적인 방식으로 태어나셔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만약 부부관계를 통해 예수님이 나신다면 예수님 또한 우리와 같이 아담의 원죄를 갖고 태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5절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는 아무 죄가 없지만 살면서 죄인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갖고 태어나는 죄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3: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나실 때 일반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나시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이는 아담의 후손들이 모두 갖고 있는 원죄를 갖지 않고 태어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처음 아담이 죄 없이 창조되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이 땅에 죄 없는 인간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이 점만 빼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은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신앙고백서에 보면 인간의 모든 본질적 속성과 공통적인 연약성을 그대로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셨는데, 그 때 주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배가 고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배가 고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참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가 고프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슬픈 일을 당하셨을 때 우리처럼 우셨고, 분노할 일에 생겼을 때는 화를 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35절에 보면 죽은 오빠 나사로 때문에 통곡하는 마리아를 보시고 예수님은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또한 어떤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 자녀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려고 할 때 제자들이 보고 꾸짖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애들은 가라’는 것이죠. 이 때 예수님은 매우 무섭게 화를 내셨습니다. 마가복음 10: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아이들이 오는 것을 가로 막은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노하셨습니다. 화를 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처럼 큰 걱정거리 앞에 근심하며 아주 간절히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8절입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우리 연약한 인간과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처럼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연약하셨기에, 연약한 우리들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안 되는 것이죠. 이것은 상대방의 형편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쉽지 않습니다. 제가 강남에서 전도사 생활할 때입니다. 강남에는 자수성가한 분들이 많습니다. 아주 어려운 형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서 꽤 성공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들이 자기 자녀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가르치던 아이 중 하나가 가출을 했습니다. 심각한 가출은 아니고 하루 이틀 말도 안하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 친구를 만나서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공부를 왜 이리 못하냐고 다그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친구가 공부를 못하는 친구가 아닙니다. 항상 평균 90점인 친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친구 아버지와 그 친구의 형은 항상 전교에서 1등을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가 공부를 못하는 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항상 하는 말이 나는 집이 어려워서 학원도 못가고, 과외도 못 갔는데, 왜 너는 학원도 가고 과외도 가는데 나보다 못하냐는 것입니다. 아빠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열등감에 시달리고 위축되어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을 때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연약함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픔, 눈물, 고통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니까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하셔서 아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는 것은 더 정확히 말하면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함께 고통을 당하셨기에 그 고통을 아시고, 그래서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며, 또한 참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라고 할 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냐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인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어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반은 하나님이고, 반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이 좀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100% 하나님이고, 또한 100% 인간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50%, 50%가 아니라, 각각 100%입니다. 이것을 신앙고백서는 8장 2항 나머지 부분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 결과로 완전하고도 구별된 신성과 인성이 나뉠 수 없이 한 인격으로 결합되셨다. 그 결합으로 말하면 각기 성품의 변동도 아니고, 합성도 아니고, 혼동도 아니다. 그 인격이 바로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데 한 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다.”
말이 조금 어렵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100%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있는데, 이 둘이 섞이거나 합쳐지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한 인격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과 신앙고백서가 가르치는 대로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는 데,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중보자란 둘 사이에 서서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보자가 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며, 또한 동시에 참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서서 둘을 연결시키는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에 관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보자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자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힘입어 항상 주님께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 292 장, 80 장
우리는 지난 시간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기름을 부어 세운 세 가지 직분이 있다고 했지요? 선지자, 제사장, 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선지자의 직분, 제사장의 직분, 왕의 직분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세우셔서 교회로 부르시고, 교회로 부른 우리들을 왕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 그 뜻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에 관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첫째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 둘째,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다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참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할 때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고백서 8장 2항을 보시기 바랍니다(21쪽). 먼저 첫 문장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삼위일체 중의 제 2위로서 아버지와 동일한 신의 본체이시니,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신앙고백서는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한 분, 즉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14절에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무엇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까? 육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거하셨다’는 말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원래 정확한 의미는 ‘장막을 치다’입니다. 여러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성막 안에 지성소가 있는데,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뜻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장막을 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성막이고,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별명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23절인데, 이 말씀은 이사야 7:14절을 인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성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이라는 사실은 요한복음 2:21절에 분명히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육체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막과 성전은 동일한 것입니다. 다만 성막은 이동식이고, 성전은 고정식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성막 혹은 성전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30절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8:19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말씀합니다. 세례를 베풀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아들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것은 너무나 이상한 것이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동일한 본질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칠 때 목사가 축도를 하지 않습니까? 이때도 어떻게 하지요? 고린도후서 13: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서도 예수님과 하나님, 성령님이 같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하나님, 성령님이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5:13절 말씀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위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경배를 드리는 데,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똑같이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고, 어린 양은 바로 그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예수님을 같이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들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린이 책을 보면 위인전이 있는데, 공자와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그 뒤에 예수님이 붙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 혹은 위대한 교사, 위대한 철학자, 위대한 영적 지도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첫째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제 두 번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둘째 내용은 예수님은 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신앙고백서 8장 2항 두 번째 문장부터 읽겠습니다. “때가 차매 그가 오셔서 인성을 받으시되, 인간의 모든 본질적 속성과 공통적인 연약성을 그대로 받으셨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성은 없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그의 체질로 잉태되셨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동정녀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하면 부부관계를 맺지 않은 처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지만, 일반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어 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예수님은 부부관계가 아닌 성령의 능력이라는 기적적인 방식으로 태어나셔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만약 부부관계를 통해 예수님이 나신다면 예수님 또한 우리와 같이 아담의 원죄를 갖고 태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5절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는 아무 죄가 없지만 살면서 죄인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갖고 태어나는 죄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3: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나실 때 일반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나시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이는 아담의 후손들이 모두 갖고 있는 원죄를 갖지 않고 태어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처음 아담이 죄 없이 창조되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이 땅에 죄 없는 인간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이 점만 빼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은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신앙고백서에 보면 인간의 모든 본질적 속성과 공통적인 연약성을 그대로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셨는데, 그 때 주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배가 고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배가 고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참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가 고프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슬픈 일을 당하셨을 때 우리처럼 우셨고, 분노할 일에 생겼을 때는 화를 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35절에 보면 죽은 오빠 나사로 때문에 통곡하는 마리아를 보시고 예수님은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또한 어떤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 자녀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려고 할 때 제자들이 보고 꾸짖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애들은 가라’는 것이죠. 이 때 예수님은 매우 무섭게 화를 내셨습니다. 마가복음 10: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아이들이 오는 것을 가로 막은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노하셨습니다. 화를 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처럼 큰 걱정거리 앞에 근심하며 아주 간절히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8절입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우리 연약한 인간과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처럼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연약하셨기에, 연약한 우리들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안 되는 것이죠. 이것은 상대방의 형편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쉽지 않습니다. 제가 강남에서 전도사 생활할 때입니다. 강남에는 자수성가한 분들이 많습니다. 아주 어려운 형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서 꽤 성공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들이 자기 자녀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가르치던 아이 중 하나가 가출을 했습니다. 심각한 가출은 아니고 하루 이틀 말도 안하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 친구를 만나서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공부를 왜 이리 못하냐고 다그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친구가 공부를 못하는 친구가 아닙니다. 항상 평균 90점인 친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친구 아버지와 그 친구의 형은 항상 전교에서 1등을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가 공부를 못하는 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항상 하는 말이 나는 집이 어려워서 학원도 못가고, 과외도 못 갔는데, 왜 너는 학원도 가고 과외도 가는데 나보다 못하냐는 것입니다. 아빠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열등감에 시달리고 위축되어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을 때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연약함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픔, 눈물, 고통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니까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하셔서 아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는 것은 더 정확히 말하면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함께 고통을 당하셨기에 그 고통을 아시고, 그래서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며, 또한 참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라고 할 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냐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인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어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반은 하나님이고, 반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이 좀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100% 하나님이고, 또한 100% 인간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50%, 50%가 아니라, 각각 100%입니다. 이것을 신앙고백서는 8장 2항 나머지 부분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 결과로 완전하고도 구별된 신성과 인성이 나뉠 수 없이 한 인격으로 결합되셨다. 그 결합으로 말하면 각기 성품의 변동도 아니고, 합성도 아니고, 혼동도 아니다. 그 인격이 바로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데 한 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다.”
말이 조금 어렵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100%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있는데, 이 둘이 섞이거나 합쳐지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한 인격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과 신앙고백서가 가르치는 대로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는 데,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중보자란 둘 사이에 서서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보자가 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며, 또한 동시에 참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서서 둘을 연결시키는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에 관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보자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자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힘입어 항상 주님께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찬송가 : 292 장, 80 장
우리는 지난 시간에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리스도가 무슨 뜻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스도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기름을 부어 세운 세 가지 직분이 있다고 했지요? 선지자, 제사장, 왕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 것은 예수님이 선지자의 직분, 제사장의 직분, 왕의 직분을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제물로 드리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자기를 믿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새 백성으로 세우셔서 교회로 부르시고, 교회로 부른 우리들을 왕으로 통치하시고 다스리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를 때 그 뜻입니다.
오늘도 예수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에 관해서 두 가지를 살펴보려고 하는데, 첫째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시다 둘째, 예수님은 참 인간이시다입니다. 조금 어려운 말로 예수님의 신성과 예수님의 인성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참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시냐 할 때 성경은 분명히 예수님은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앙고백서 8장 2항을 보시기 바랍니다(21쪽). 먼저 첫 문장만 읽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삼위일체 중의 제 2위로서 아버지와 동일한 신의 본체이시니,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신앙고백서는 예수님이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분으로, 하나님과 완전히 동일한 분, 즉 영원하신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성경 여러 곳에서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는데,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말씀’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14절에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무엇이 되었다고 이야기합니까? 육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거하셨다’는 말은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원래 정확한 의미는 ‘장막을 치다’입니다. 여러분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디에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까?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성막 안에 지성소가 있는데, 그 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막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하셨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뜻이 바로 이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장막을 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성막이고,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의 별명이 나옵니다. 마태복음 1:23절인데, 이 말씀은 이사야 7:14절을 인용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예수님의 별명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임마누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성막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이라는 사실은 요한복음 2:21절에 분명히 나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님의 육체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성전이라고 말씀합니다. 성막과 성전은 동일한 것입니다. 다만 성막은 이동식이고, 성전은 고정식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성막 혹은 성전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뿐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0:30절입니다.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예수님은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또한 우리가 잘 아는 마태복음 28:19절에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말씀합니다. 세례를 베풀 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주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아들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것은 너무나 이상한 것이 됩니다. 아버지와 아들, 성령이 동일한 본질이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고 말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축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마칠 때 목사가 축도를 하지 않습니까? 이때도 어떻게 하지요? 고린도후서 13: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서도 예수님과 하나님, 성령님이 같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과 하나님, 성령님이 동일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과 함께 예수님을 예배하였습니다. 요한계시록 5:13절 말씀입니다.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위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피조물이 이르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권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이 경배를 드리는 데,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에게 똑같이 하였습니다. 여기서 보좌에 앉으신 이는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고, 어린 양은 바로 그의 아들 예수님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과 예수님을 같이 예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들은 무엇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어린이 책을 보면 위인전이 있는데, 공자와 소크라테스, 석가모니, 그 뒤에 예수님이 붙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성인, 혹은 위대한 교사, 위대한 철학자, 위대한 영적 지도자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첫째로 중요한 내용입니다.
이제 두 번째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에 관한 둘째 내용은 예수님은 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방금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신앙고백서 8장 2항 두 번째 문장부터 읽겠습니다. “때가 차매 그가 오셔서 인성을 받으시되, 인간의 모든 본질적 속성과 공통적인 연약성을 그대로 받으셨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성은 없이 동정녀 마리아에게 그의 체질로 잉태되셨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구원의 계획을 따라서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동정녀라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쉽게 말하면 부부관계를 맺지 않은 처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몸에서 나셨지만, 일반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나신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어 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예수님은 부부관계가 아닌 성령의 능력이라는 기적적인 방식으로 태어나셔야 했을까요? 그 이유는 만약 부부관계를 통해 예수님이 나신다면 예수님 또한 우리와 같이 아담의 원죄를 갖고 태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5절에 보면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태어날 때는 아무 죄가 없지만 살면서 죄인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주장이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죄를 갖고 태어나는 죄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로마서 3:23절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죄인이 아닌 사람이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나실 때 일반적인 부부관계를 통해서 나시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셨습니다. 이는 아담의 후손들이 모두 갖고 있는 원죄를 갖지 않고 태어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둘째 아담, 혹은 마지막 아담이라고 부릅니다. 처음 아담이 죄 없이 창조되었던 것처럼, 예수님도 이 땅에 죄 없는 인간으로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죄가 없으시다는 이 점만 빼고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은 참 사람이 되셨습니다. 신앙고백서에 보면 인간의 모든 본질적 속성과 공통적인 연약성을 그대로 받으셨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성경 곳곳에서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4: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40일을 금식하셨는데, 그 때 주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배가 고프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배가 고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참 사람이었기 때문에 배가 고프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슬픈 일을 당하셨을 때 우리처럼 우셨고, 분노할 일에 생겼을 때는 화를 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35절에 보면 죽은 오빠 나사로 때문에 통곡하는 마리아를 보시고 예수님은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또한 어떤 사람들이 자기의 어린 자녀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려고 할 때 제자들이 보고 꾸짖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애들은 가라’는 것이죠. 이 때 예수님은 매우 무섭게 화를 내셨습니다. 마가복음 10:14절에 보면 “예수께서 보시고 노하시어 이르시되 어린 아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아이들이 오는 것을 가로 막은 제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노하셨습니다. 화를 내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처럼 큰 걱정거리 앞에 근심하며 아주 간절히 기도하기도 하셨습니다. 바로 십자가를 지시기 전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6:38절입니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예수님은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이 우리 연약한 인간과 똑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처럼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셨다는 사실이 중요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연약하셨기에, 연약한 우리들을 충분히 이해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인간관계의 가장 큰 장애물이 있다면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안 되는 것이죠. 이것은 상대방의 형편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쉽지 않습니다. 제가 강남에서 전도사 생활할 때입니다. 강남에는 자수성가한 분들이 많습니다. 아주 어려운 형편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열심히 일해서 꽤 성공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분들이 자기 자녀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제가 가르치던 아이 중 하나가 가출을 했습니다. 심각한 가출은 아니고 하루 이틀 말도 안하고 사라진 것입니다. 그 친구를 만나서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아빠가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공부를 왜 이리 못하냐고 다그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친구가 공부를 못하는 친구가 아닙니다. 항상 평균 90점인 친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친구 아버지와 그 친구의 형은 항상 전교에서 1등을 도맡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친구가 공부를 못하는 게 되었습니다.
아빠가 항상 하는 말이 나는 집이 어려워서 학원도 못가고, 과외도 못 갔는데, 왜 너는 학원도 가고 과외도 가는데 나보다 못하냐는 것입니다. 아빠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아이가 공부를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열등감에 시달리고 위축되어 사는 것입니다.
자기가 경험하지 않으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오셨을 때 우리가 이 땅에서 경험하는 모든 연약함을 다 경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아픔, 눈물, 고통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니까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경험하셔서 아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여기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다, 즉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는 것은 더 정확히 말하면 함께 고통을 당하셨다는 것입니다. 함께 고통을 당하셨기에 그 고통을 아시고, 그래서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며, 또한 참 사람이라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고, 참 사람이라고 할 때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냐입니다. 마치 예수님을 인어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인어는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반은 하나님이고, 반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결코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말이 좀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님이 100% 하나님이고, 또한 100% 인간이라고 믿어야 합니다. 50%, 50%가 아니라, 각각 100%입니다. 이것을 신앙고백서는 8장 2항 나머지 부분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그 결과로 완전하고도 구별된 신성과 인성이 나뉠 수 없이 한 인격으로 결합되셨다. 그 결합으로 말하면 각기 성품의 변동도 아니고, 합성도 아니고, 혼동도 아니다. 그 인격이 바로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신데 한 분 그리스도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하신 중보자이시다.”
말이 조금 어렵지만 간단하게 말하면, 방금 전에 제가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시고, 100%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신성과 인성이 있는데, 이 둘이 섞이거나 합쳐지거나 하지 않고 그대로 있어서 한 인격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부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경과 신앙고백서가 가르치는 대로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며, 동시에 참 사람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닫게 되는 데, 그것은 예수님만이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중보자란 둘 사이에 서서 서로를 연결시켜 주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우리 죄인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중보자가 되십니다. 그런데 예수님만이 유일한 중보자가 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바로 예수님만이 참 하나님이며, 또한 동시에 참 사람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 되시기 때문에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서서 둘을 연결시키는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에 관한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참 하나님이며, 참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중보자 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어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는 자가 되었으므로 우리는 마땅히 예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힘입어 항상 주님께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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