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5,주일-오후) "신앙고백서(17)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 / 디모데전서 2:5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51 장, 93 장
오늘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8장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너무나 고상해서 이전에 자신이 자랑하고 유익하게 여겼던 것들이 지금은 배설물처럼 여겨진다고 고백하였습니다. 7~8절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사실 사도 바울에게는 사람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습니다. 베냐민 지파는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을 배출한 지파였습니다. 즉 바울은 왕족의 혈통에서 태어났습니다. 또한 그는 당시 유대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던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을 완벽하게 지켰던 아주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이 모든 것이 바울의 자랑이었고, 자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믿은 후에 모든 것이 다 변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에 비하면 자신이 지금까지 자랑했던 것은 그야말로 배설물과 같이 무가치한 것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반짝이는 물체만 보면 그것이 신기하니까 귀한 것 인줄 압니다. 몇 백원도 안하는 큐빅을 마치 보물이라도 되는 듯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진짜 보석을 알게 되면 어떻게 하지요? 큐빅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게 됩니다.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랑하고 자부심을 가졌던 것들이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바울의 고백처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너무나 귀하고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처럼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한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 유일한 방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가 없고,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불치병에 걸려서 시한부 인생을 산다고 가정해 보세요. 죽음의 절망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데, 이 때 저 먼 나라에서 치료제가 발명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이 소식을 아는 것보다 더 귀한 것이 있을까요?
여러분 돈이 많이 버는 지식, 명예를 얻는 지식, 권력을 얻는 지식, 이 모든 것이 다 귀한 지식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 지식에 비하면 이런 지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큰 명예를 얻고, 막강한 권력을 가진다 해도 오늘 밤에 하나님께서 나를 데려가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영생을 얻는 지식보다 더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을 어떻게 얻을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는 것을 알고 더욱 더 예수님 알기를 힘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신앙고백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고상한 지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제8장 1항을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21쪽). “하나님께서는 그 영원하신 목적에서 기쁘신 뜻대로 그 독생자 주 예수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로 세우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과 교회의 머리와 구주가 되시고, 만물의 후사와 세상의 심판자가 되셨다. 하나님은 영원 전에 그에게 씨가 되는 백성을 주셨다. 때가 이르매 그 백성은 그로 말미암아 속량되고, 부르심을 받고, 의롭다 함이 되고, 성화 되고, 영화롭게 함이 되었다.”
여기서 핵심이 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중보자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중보자입니다. 그런데 중보자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양쪽 사이에서 서로를 연결해 주는 사람을 중보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서로를 연결시켜주는 중보자가 되십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가 읽은 디모데전서 2:5절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한 분 있는데, 그 분이 곧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씀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중보자로 세우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하나님이 인간을 처음 창조하실 때는 중보자가 필요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직접 아담과 하와를 만나셨습니다. 그 사이를 연결해 줄 중보자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아와 범죄한 이후 모든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죄가 들어오자 사람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어둠에 빛이 들어오면 어둠이 곧바로 물러가게 되듯이 빛 되신 하나님 앞에 죄의 어둠에 갇힌 인간이 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낯을 피해서 숨은 것입니다. 죄를 짓기 전까지 하나님의 음성은 사랑의 음성이었고,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는 이 세상 그 어떤 연인도 누릴 수 없는 행복하고 사랑스러운 교제였습니다. 하지만 범죄한 이후 하나님의 음성은 심판의 음성으로 들리게 되었고, 인간은 감히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전도를 하다보며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한 번만 보여주면 믿겠다. 그런데 그분의 소원대로 정말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나타나면 어떻게 될까요? 이사야서 6장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 중에 하나님을 뵙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상 중에 하나님을 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보자마자 이사야 선지자가 한 말은 이것이었습니다. 6:5절입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하나님을 본 이사야 선지자의 첫 마디는 망했다 였습니다. 왜냐하면 죄인이 의로우신 하나님을 봤다면 그 결과는 죽음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죄인은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절대 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추방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추방이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가 꼴도 보기 싫어서 쫓아낸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에덴동산에서 추방한 것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인이 하나님을 뵈면 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비록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지만 그들을 사랑하셨고, 그래서 구원하고자 하셨습니다. 하지만 죄인이 하나님 앞으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를 연결해 줄 존재가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보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자신과 죄인 사이를 이어줄 중보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처럼 중보자라고 하니까 생소하게 생각하는 성도님이 혹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미 우리는 중보자이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단적인 예가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 후에 마지막에 꼭 뭐라고 말하면서 마칩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합니다. 왜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데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신데, 그렇다면 성령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도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하나님도 성령님도 아닌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기도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린다고 할 때, 우리의 기도가 곧바로 하나님께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요한복음 14:6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여 나오는 죄인들을 영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의지하여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응답해 주십니다. 요한복음 14:13절에 보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중보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고, 그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셔서 응답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는 것은 어떤 막연한 교리가 아닙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라고 할 때 예수님께서 중보자로서 하시는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명칭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흔히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뭐라고 부르냐면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고, 영어로는 Christian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계속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라고 부르니까 예수가 성이고, 그리스도가 이름인 것처럼 그렇게 오해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줄임말입니다. 바로 “예수는 그리스도이시다”의 줄임말입니다. 이 말을 처음으로 고백한 사람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길 가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생각하느냐고 물었고,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이 줄여져서 예수 그리스도라고 아예 부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의 이름이 아닙니다. 예수가 이름이고, 그리스도는 직분입니다. 즉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직분을 가진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메시아와 같은 뜻입니다. 메시아는 히브리 말이고, 그리스도는 그리스 말입니다. 그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할 때, 예수님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구약시대에 기름을 부어 세웠던 세 가지 직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선지자, 제사장, 왕입니다. 이들을 메시아로 불렀고,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바로 그리스도라고 할 때는 예수님이 이 세 가지 직분을 모두 가지신 분이라는 뜻이 됩니다. 즉 예수님이 우리의 중보자이신데, 무슨 일을 하셨는가? 이 세 가지 직분, 선지자, 제사장, 왕의 일을 하셨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선지자의 직분을 감당하셨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과 차원이 다른 선지자였습니다. 다른 선지자들은 그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은 그대로 전했을 뿐입니다. 마치 아나운서가 뉴스를 써 준 그대로 읽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11:28절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들에게 하나님께로 가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변화산에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7:5절입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시는지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위로서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중보자로서 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제사장은 죄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경에 나오는 제사장과는 차원이 다른 제사장이었습니다. 보통의 제사장들은 죄인이 가져온 짐승을 제물로 드려서 그 사람이 죄 용서를 받도록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제사장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먼저 제물부터 달랐습니다. 보통의 제사장들은 짐승을 제물로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린 이유는 분명합니다. 짐승의 피가 인간의 죄를 완전히 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10:4절입니다. “이는 황소와 염소의 피가 능히 죄를 없이 하지 못함이라” 이처럼 짐승의 피가 죄를 완전히 씻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 없는 자신의 몸을 제물로 드림으로써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히브리서 9:12절입니다.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
예수님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몸을 제물로 바침으로 우리 죄인의 모든 죄를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전처럼 제사를 더 이상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린 보혈의 효력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모인 우리들은 더 이상 제사를 드리지 않습니다. 대신 예수님을 의지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제사장이 되어주셔서 우리의 모든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왕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고 할 때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12명의 제자를 삼으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원하시기만 하면 12명이 아니라, 수 백, 수 천 명의 사람들도 제자로 삼으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12명만을 제자로 삼으셨을까요? 12이라는 숫자의 중요성 때문입니다. 12은 우리가 잘 아는대로 이스라엘 백성의 지파 수입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것이 12입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를 삼으신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새 백성을 모으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 새 백성이 모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고백서에 보면 예수님을 교회의 머리와 구주가 되신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통해서 교회를 세우시고, 하나님의 새 백성들을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로 모인 새 백성들을 예수님께서 왕으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으로 교회를 통치하십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그것이 곧 왕이신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는 것이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셔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지키시며, 인도하시고, 보호하여 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로서 선지자와 제사장, 왕의 직분을 감당하셨습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예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경험하는 복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은혜가 오직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사도 바울처럼 이 예수님을 아는 고상한 지식을 사모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깊이 알수록 우리는 더 깊고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을 아는 지식이 더욱 깊어지고 풍성하여져서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복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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