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15,주일-오전)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 고린도전서 15:35~49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 장, 20 장, 436 장, 171장 1절 // 교독문 42번
170115_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고한율목사.pdf
* 대표기도: 남승우장로 -
얼마 전에 허드슨강의 기적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합니다. 승객과 승무원 155명을 실은 여객기가 뉴욕 공항에서 이륙했는데, 이륙하자마자 새떼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만 새떼가 비행기 엔진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결과 비행기의 모든 엔진이 고장 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비행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기장은 가까운 공항에 착륙하려고 했지만, 이미 거기까지 날아갈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순식간의 155명의 생명이 사라질 수 있는 절대 절명의 위기였습니다.
기장의 손에 155명의 생명이 달렸습니다. 그 때 기장은 뉴욕 도시 사이를 흐르는 허드슨 강을 보았고, 강 위에 비행기를 착륙시키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하지만 고장 난 비행기를 강 위에 착륙시킨다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기장은 다른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강 위에 착륙을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습니다. 비행기는 강 위에 안전하게 착륙을 하였고, 곧 구조선이 출동하여서 승객과 승무원 155명. 모두 무사히 구조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영화의 중요한 줄거리입니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갑자기 고장 난 여객기가 강 위에 안전하게 착륙했다’가 영화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은 영화가 많은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영화였기 때문입니다. 이 영화는 2009년 1월 15일 미국 뉴욕 허드슨 강에 착륙한 여객기의 실제 이야기로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나는 장면에 보면 당시 여객기를 조정했던 실제 기장과 그 당시 승객들이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 자체로만 보면 그리 극적이거나 재미있는 영화가 아닙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큰 감동을 주는 이유는 실제 있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요즘 TV를 통해 보는 드라마들은 어떻습니까? 정말 재미있습니다. 얼마나 극적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떤 드라마는 눈물까지 날 정도로 감동적입니다. 하지만 드라마가 딱 끝나고 나면 조금은 허무합니다. 감동이 금방 사라집니다. 왜 그럴까요? 지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 실제로 있을 수 없는 판타지이기 때문입니다. 지어낸 이야기는 그것이 아무리 재미있고, 극적이고, 감동적이라도 금방 잊혀 집니다. 실제에는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실제 있었던 이야기를 드라마나 영화로 만들면 그렇게 극적이지도 않고, 재미있지 않아도 그 감동이 매우 크고,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왜냐하면 실제 있었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 신앙하고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어떤 이야기로 읽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저 잘 지어낸 이야기 정도로만 생각한다면 당연히 그 믿음은 힘이 없을 것입니다. 그저 성경을 읽으면서 도덕적인 교훈을 얻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없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스스로 증거하는 대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으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야말로 성경은 우리의 믿음과 삶을 결정하는 유일한 규범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무슨 일이든 성경을 따라 살려고 힘쓸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이 가장 복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주일 오전마다 계속 살펴보고 있는 부활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일부는 부활을 지어낸 이야기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활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부활이 만약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우리의 모든 신앙이 무너지게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 있었고, 우리 또한 나중에 모두 부활하게 될 것을 몇 번이고 강조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바울은 부활이 지어낸 이야기가 아니며 실제로 예수님이 부활하셨고, 앞으로 우리 또한 부활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통해 바울은 부활에 관해 좀 더 자세한 설명을 우리에게 해 주고 있습니다. 만약 부활이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면 전혀 불필요한 설명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사실이고, 실제이기 때문에 바울은 부활에 관해 우리가 꼭 알아야 한 내용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먼저 바울은 부활을 그저 지어낸 이야기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 질문을 소개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주는 것으로 부활을 자세하게 설명하였습니다. 3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여기에는 두 가지 질문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는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 안에는 어떻게 죽은 사람의 몸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느냐 하는 불신앙이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 질문은 만약 부활이 사실이라면 그러면 죽은 몸이 어떤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우리가 부활에 관해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먼저 첫째 질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는가? 여기에 대한 대답이 36절입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씨가 죽지 않으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일부는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에게 의심이 가득한 마음으로 ‘어떻게 죽는 사람이 다시 살아난다고 말하는 거요’라고 따져 물었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의 대답은 아주 단호하였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좀 심하게 말하면 바울은 부활을 믿지 않는 성도들을 먼저 따끔하게 혼냈습니다.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기분 나쁜 말입니다. 사회에서도 어리석다는 말을 하면 욕으로 알아듣고 서로 싸우게 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어리석다고 하는 것은 정말 심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렇게 심한 말을 먼저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단순히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교리 중에 하나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부활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또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에서 일하는 종교귀족들로서 바리새파와 함께 유대교의 주요한 교단 중에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 전체가 아닌 오직 모세 오경, 즉 구약의 첫 다섯 권의 성경만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문자 그대로만 믿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모세 오경에 부활이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어려운 질문을 합니다.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장가를 간 첫째 형이 아이를 낳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이 때 율법에 의하면 형의 대를 잇기 위해서 죽은 첫째의 아내는 바로 아래인 둘째의 아내가 됩니다. 이것을 형사취수제라고 불렀습니다. 죽은 형의 대를 대신 잇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째가 자식이 없이 죽어서 그의 아내가 둘째의 아내가 되었는데, 둘째도 자식이 없이 죽게 됩니다. 그렇게 일곱째까지 모두 자식이 없어서 죽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 여자도 죽게 되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 여자가 부활할 때 누구의 아내가 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여자는 이 땅에서 일곱 형제 모두의 아내가 되었기 때문에, 부활한 후에 누구의 아내가 될지가 참으로 곤란한 문제가 되는 것이죠. 하지만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30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29~30)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능력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생각에 갇혀서 부활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도 똑같이 말씀합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자기 생각에 갇혀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아주 심각한 불신앙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부활을 의심하는 성도들에게 “어리석은 자여!”라고 먼저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죽은 몸을 다시 살릴 것을 어떻게 의심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죽은 몸도 살려내지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은 만약 우리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성도로서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씀합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들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고 계십니까? 성경에 기록된 모든 일을 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고 계십니까? 아니면 여러분의 머리로 이해가능한 일만 하시는 하나님으로 믿고 계십니까? 만약 우리의 머리로만 이해 가능한 하나님으로 믿고 있다면 그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는 그런 무기력한 하나님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창조한 세상을 그 뜻대로 다스리시며, 모든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케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지 나흘이 되어 냄새가 나는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면서도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셨고, 그 외침에 죽은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 무덤 밖으로 나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만약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부활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바울은 부활을 믿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성도들에게 어리석은 자라고 책망하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것을 책망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자연법칙을 통해 설명을 해 줍니다. 37~38절에 보면 바울은 씨 뿌리는 비유를 사용합니다.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38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 여러분 농부가 땅에 씨를 뿌립니다. 그러면 땅에 들어간 씨는 어떻게 됩니까? 그 씨 자체는 죽습니다. 하지만 그 죽은 씨를 통해 새로운 열매가 많이 맺히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법칙 속에서 찾을 수 있는 부활의 원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죽으면 끝이 아닙니다. 죽으면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죽으면 다시 부활합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까요? 37절에 보면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사과를 심는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과를 심는다고 할 때 우리가 보통 먹는 사과 그 자체를 심지 않습니다. 무엇을 심지요? 사과 씨를 심습니다. 아주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그 씨가 땅에 뿌려져서 시간이 지나면 사과나무로 자라게 되고, 우리가 바라는 사과를 열매 맺게 됩니다. 땅에 뿌리는 씨와 나무에 열리는 사과는 그 모양이 완전히 다릅니다.
이것은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있는 몸이 죽은 후에 우리가 부활하게 되는데, 지금의 몸 그대로 부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즉 사과를 심어서 사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사과 씨를 뿌려서 사과를 얻는 것처럼 지금의 몸이 사라지면 부활할 때는 새로운 몸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4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죽은 자의 부활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썩을 것이란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갖고 있는 우리의 몸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 몸은 썩게 될 것입니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할 때는 지금의 몸이 아니라, 썩지 아니하는 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이것을 43~44절에 보면 또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지금 우리가 가진 몸을 욕된 것, 약한 것, 육의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부활하여 가지게 될 몸을 영광스러운 것, 강한 것, 영의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할 때 얻게 될 새로운 몸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 얻게 되는 몸은 영광스럽고, 강하며, 영적인 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땅에서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몸을 육의 몸이라고 말하고, 부활할 때 가지게 될 몸을 영의 몸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말로는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몸을 흙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고, 부활 후에 가지게 될 몸을 하늘에 속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48절입니다. “무릇 흙에 속한 자들은 저 흙에 속한 자와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들은 저 하늘에 속한 이와 같으니”
그런데 이처럼 지금 몸은 육의 몸, 흙에 속한 몸이라고 하고, 부활할 때 가지게 될 몸은 영의 몸, 하늘에 속한 몸이라고 하니까 우리가 오해를 합니다. 어떤 오해냐 하면 지금 우리의 몸은 물질로 된 것이고, 나중에 부활하게 될 때 몸은 물질이 아닌 영혼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마치 천사처럼 되어 하늘에서 붕붕 떠다니는 모습을 우리가 상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철저하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부활한 후에 가지게 될 몸도 지금 몸과 같이 물질로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지금의 몸과 같은 성질의 물질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셨을 때 제자들이 예수님을 영혼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엇을 하셨습니까? 그들 앞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영혼이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습니까? 몸이 있으니까 밥을 먹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처럼 식사를 하심으로 부활하신 몸이 단지 영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와 똑같은 몸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문을 꼭 잠그고 모여 있는 방으로 들어오실 때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고 그냥 통과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은 분명 물질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 우리의 몸과는 다른 특징의 물질로 되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이처럼 지금 우리의 몸이나 부활할 때 가지게 될 몸이나 물질로 된 몸은 똑같은데, 그러면 무엇이 다른가? 지금의 몸은 우리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움직이는 몸이지만, 부활할 때 가지게 될 몸은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지금 가진 몸은 어떻습니까? 삼일 만 굶어도 뵈는 것이 없어집니다. 나이가 들면 주름살이 깊어지고, 기력이 빠집니다. 그래서 마늘주사, 백옥주사 뭐 이런 것도 맞는다고 하지 않아요?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세월 앞에는 장사가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가지고 있는 몸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부활 후에 가지게 될 몸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힘을 삼지 않고, 하나님의 영, 성령의 능력을 그 힘으로 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처럼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요 4:34)고 말하게 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먹고 마시는 문제가 걸릴 때 쉽게 신앙을 타협하지 않습니까?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말하잖아요. 이것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몸의 한계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할 때 가지게 될 영적인 몸의 가장 중요한 특징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양식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영적인 몸을 가진 인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계획하셨던 인간의 완전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완전한 모습이 이 세상에 나타났는데,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에 우리가 가지게 될 완전한 모습을 이미 이 땅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삶, 하나님을 양식으로 삼는 삶,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삶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먹고 사는 문제에 걸려 믿음에서 넘어질 때가 많지만, 우리가 훗날 부활하게 될 때는 예수님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을 양식으로 삼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49절의 뜻입니다.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을 입으리라”
우리가 지금은 흙에 속한 자의 형상, 즉 육의 몸을 가지고 살아가지만, 나중에 부활할 때에는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 즉 예수님의 형상, 하나님의 형상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는 더 이상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믿음이 무너지거나, 죄로 말미암아 넘어지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온전히 하나님을 기뻐하고, 의지하며, 그의 힘과 능력으로 충만하여 지극히 복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들에게 주어지게 될 미래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오늘도 실망하지 않고, 예수님을 본받아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냥 다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영광스럽고 강하며, 영적인 몸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몸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하나님을 양식으로 삼고,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충만히 공급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몸입니다. 이것이 성도에게 약속된 영광스러운 미래입니다.
이 약속을 굳게 믿는 성도는 비록 지금 우리의 몸이 욕된 것이요, 약하고, 육에 속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고 성령의 능력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힘쓰게 될 것입니다. 곧 승리할 것을 아는 군사는 더욱 힘을 내어 싸우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광의 부활을 믿는 성도는 이 땅에서부터 주님의 뜻대로 살기를 힘쓸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영광스러운 부활에 대한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더욱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헛된 욕심과 죄악을 버리고, 예수님을 닮아가고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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