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주일-오후) "WCF (16) 은혜 언약(2)" / 눅 24장 25 ~ 27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302 장, 96 장
170101_은혜언약_고한율목사.pdf
새해가 밝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에게 올 한해 큰 복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큰 복 가운데 하나가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고 성장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못난 짓을 해도 여간해서 야단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제자들을 참고 기다려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제자들을 야단치실 때가 있었는데, 바로 그들의 믿음이 자라지 않는 것 같을 때였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배에 태우고 갈릴리 호수를 건널 때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폭풍이 와서 배가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은 잠자는 예수님을 깨워서 우리가 죽게 되었으니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로 이렇게 제자들을 야단치셨습니다. 마태복음 8:2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예수님은 폭풍을 잠잠하게 한 후에 제자들을 야단치지 않으셨습니다. 먼저 야단치신 후에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관심이 제자들의 믿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믿음이 작은 자들이라고 야단치셨습니다. 왜냐하면 제자들의 믿음이 도무지 성장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들었고, 그가 행하신 기적을 보았습니다. 모든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굴복하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확실한 증거였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제자들은 바로 눈앞에서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풍이 와서 배가 위태로워지자 죽음이 무서워서 안절부절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과 함께 탄 배보다 더 안전한 배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야단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더욱 더 의지하고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자녀 된 우리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장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우리의 믿음이 성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로마서 10: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믿음은 말씀에서 나고, 말씀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말씀 없이는 절대로 우리의 믿음은 성장할 수 없습니다. 기도 많이 한다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봉사를 많이 한다고 믿음이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와 봉사가 너무 중요하지만 말씀이 언제나 함께 해야 합니다. 말씀 없이는 믿음이 절대로 바르게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이 성장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말씀을 부지런히 읽어야 하고, 부지런히 들어야 하며,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믿음이 바르게 성장하게 되고, 믿음이 성장할 때 하나님이 예비하신 복된 삶을 우리는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올 한 해가 무엇보다 믿음이 크게 성장하는 한해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서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시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작년부터 주일 오후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차례대로 살펴보고 있습니다. 교리를 배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만, 가랑비에 옷이 젖는다는 말처럼 계속해서 듣는 가운데 우리의 믿음이 바른 교리 위에 서게 될 줄로 믿습니다. 몇 번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날 이단들이 얼마나 활개 치는지 모릅니다. 물론 이단들은 교회역사 가운데 항상 있어왔습니다. 마치 몸 안에 사는 기생충처럼 정통교회에 붙어서 존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유독 더 활개를 칩니다. 그 결정적인 이유는 교회가 바른 교리를 가르치는 일에 소홀했기 때문입니다.
그저 예수님 믿고 천국가면 그만이라고 말하면서 성경공부를 소홀히 했습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많이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면서 성경을 배우는 일을 깎아내렸습니다. 그 결과 이단들이 성경을 가지고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해도 분별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교리가 신앙의 울타리가 되어서 이단의 주장을 걸러주어야 하는데, 울타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 우리나라 종교인 통계가 나왔는데, 유독 기독교만 증가하였습니다. 참 반가웠습니다. 항상 마이너스 성장이었는데, 많이 늘었다는 통계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왜냐하면 늘어난 기독교 교인 수안에는 이단들도 다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정통 교회의 교인 수가 증가한 것이 아니라, 이단 교회의 교인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였습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배워야 할 것입니다. 바라기는 올 한해 신앙고백서를 힘써서 배움으로 바른 교리의 울타리를 잘 세울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무엇이 성경적인지, 무엇이 비성경적인지를 잘 분별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더욱 분명히 깨달아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은혜언약에 대해서 계속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언약은 매우 중요한 주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는 방식이 바로 언약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언약을 바르게 알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인간과 맺으신 언약이 크게 두 가지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행위언약이고, 다른 하나는 은혜언약입니다. 첫 번째 행위언약은 하나님께서 첫 인간 아담과 맺은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첫 인간 아담을 그를 통해 앞으로 나올 인류의 대표로 삼아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이 언약을 지키면 아담과 그의 후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얻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지키지 못하면 죽게 될 것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 행위를 통해 언약을 지키게 됨으로 이것을 행위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첫 인간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이 행위 언약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뱀의 유혹을 받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만 것입니다. 그 결과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언약을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아담과 그의 모든 후손들은 죽음 아래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처럼 행위언약을 깨뜨리고 죽음 아래 비참한 삶을 살게 된 인간을 위해 새로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이 바로 은혜언약입니다. 이처럼 은혜언약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행위언약과 달리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서 지키는 언약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혜언약은 말 그대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시고 하나님이 다 이루시는 언약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처음 맺으셨던 행위언약이 아니라, 은혜언약을 맺으신 이유는 첫 인간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사람들이 죄 가운데 태어나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능력이 인간에게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행위언약으로는 더 이상 구원할 수가 없어서 은혜언약을 맺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을 맺으시면서 제일 먼저 주신 약속이 바로 창세기 3:15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성경에 나오는 첫 복음이라고 해서 원복음, 원시복음이라고 불리는 아주 중요한 구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통해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 즉 메시아를 보내실 것인데, 그가 뱀, 즉 사탄을 제압하고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셔서 우리를 죄와 사망으로 지배하는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보면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있고, 우리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은혜언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은혜언약은 죄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없는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맺으신 언약으로 그 핵심은 우리에게 메시아, 구원자를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잘 알 듯이 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 예수님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다른 무엇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하는데, 이것이 모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맺어주신 은혜언약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보면 은혜언약을 유언으로 설명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9:15~17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6유언은 유언한 자가 죽어야 되나니 17유언은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유효한즉 유언한 자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효력이 없느니라”
이처럼 은혜언약을 유언으로 설명하는 것은 은혜언약이 예수님의 죽음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신앙고백서 7장 4항이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20쪽). “이 은혜 언약은 종종 유언의 내용으로 성경에 해설되어 있다. 이는 (1) 유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2) 유언으로 증여된 영원한 기업 또는 그 기업에 속한 모든 것을 포괄한 내용이다.”
은혜언약을 유언으로 설명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구원에 속한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마치 유언이 그 유언한 사람이 죽을 때 비로소 효력이 발생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졌고, 또한 구원에 속한 은혜들, 가령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소유하게 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등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비록 은혜언약을 유언으로 설명한 내용이 히브리서에서만 나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혜언약이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는 핵심적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신앙고백서 7장 5항과 6항은 은혜언약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에 각각 다른 형태로 존재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은혜언약이라는 본질은 똑같지만, 그것이 실행되는 형태는 달랐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이 똑같은 한 성경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성경을 읽을 때 구약성경보다는 신약성경을 더 선호합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을 꺼려하는 이유는 분량도 훨씬 많기도 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도 이해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구약성경은 대부분의 내용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와 한 백성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오늘 우리와는 상관없는 이야기처럼 여겨집니다. 솔직히 아브라함이나 모세, 다윗이 오늘 대한민국에 살아가는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래서 전도를 하다보면 왜 우리나라 단군을 믿지, 저 멀리 중동에 있는 작은 나라의 신을 믿느냐고 딴지를 거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리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성경과 달리 이스라엘과 유대인들만을 위한 성경이 결코 아닙니다. 본질상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그 내용이 다르지 않습니다. 그 핵심적인 내용은 같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요점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 27절을 보세요.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이 자기에 관한 것을 썼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성경은 바로 구약성경을 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때까지 신약성경은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은 구약성경의 핵심이 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바로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모두가 똑같이 예수님을 그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어떤 차이가 있느냐? 구약성경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예고한 내용이라면, 신약성경은 이미 오신 예수님에 관한 내용입니다. 똑같이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는데,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시점만 서로 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질상 구원에 있어서 구약시대나 신약시대가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약시대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 신약시대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는데, 완전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 모두 똑같이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습니다. 구원받는데 있어서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을 오늘 신앙고백서는 5항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이 은혜 언약은 율법시대와 복음시대에 각각 다른 형태로 실시되었다. 율법시대에 유대민족에게 실시된 것은 약속, 예언, 제물, 할례, 유월절 양, 기타 모형들과 규례들이다. 이것들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써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그 시대의 선민을 약속된 메시아 신앙으로 육성하시기에 충분하였고 또 유효하였다. 그 때에는 약솓뇌 메시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충분한 사죄와 영원한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이 구약이다.”
신악고백서는 구약시대를 율법시대, 신약시대를 복음시대라고 부릅니다. 그러면서 율법시대, 즉 구약시대에는 약속, 예언, 제물, 할례, 유월절 양, 기타 모형들과 규례들이 존재했는데, 그것이 왜 존재했느냐? 바로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존재했다고 말씀합니다. 즉 이 모든 것들이 예수님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를 드릴 때 그 핵심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실 예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막에 하나님께서 임재 하셨는데, 그것은 예수님께서 임마누엘로 우리 가운데 오실 것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구약성경에서 구원과 관련하여 중요한 모든 내용들을 예수님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므로 구약시대에 살았던 백성들은 제사나 율법, 성막 등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가리키는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았던 것입니다.
한편 신약시대, 즉 복음시대에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환하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신앙고백서 6항을 보시기 바랍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신 복음시대에는 언약 실시의 규례로써 설교와 성령(세례와 성찬)뿐이다. 이 규례들이 수효로 보아서는 적고, 그 사역 양상이 비교적 단순하고, 외관상 화려하지도 않다. 그러나 그것으로써 더욱 충만하고도 명확한 영적 효력을 모든 나라(유대인과 이방인)에 나타낸다. 이것을 신약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두 시대의 계시 형태는 서로 다르지만 그 언약들이 실질적으로는 하나요 동일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오셨기 때문에 구약백성들이 가지고 있었던 제사나 할례, 성막, 여러 율법들은 더 이상 불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있었던 것들을 촛불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은 태양과 같습니다. 태양이 뜨면 촛불은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비교할 수 없는 환한 빛이 비추기 때문에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오신 신약시대에는 구약시대처럼 제사나 절기, 성막, 율법, 할례 등과 같이 많은 것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은혜언약을 지속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단 세 가지가 전부입니다. 바로 설교와 세례와 성찬입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와 은혜언약을 맺고 유지하십니다. 즉 우리는 설교를 통하여 구원을 얻는 믿음을 얻게 되고, 세례를 통하여 죄씻음을 받아 새사람이 되며, 성찬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설교와 성례, 성례는 세례와 성찬을 말하는 것인데,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교회가 무엇이냐 했을 때 이 두 가지를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르게 설교되고, 성례, 즉 세례와 성찬이 바르게 시행되면 참된 교회입니다.
이처럼 신약백성들인 우리들은 설교와 성례를 통하여 우리가 은혜 언약 안에 있음을 알고 은혜 언약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설교와 성례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설교와 성례를 통하여 우리가 은혜언약 안에 있음을 확신할 뿐만 아니라, 은혜 언약 안에 있는 백성으로서의 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은혜언약이 유언으로 설명된다는 사실과 하나님께서 은혜언약을 구약시대와 신약시대 똑같이 적용하신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비록 구약시대와 신약시대가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르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핵심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즉 구약시대나 신약시대 모두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신약시대에는 설교와 성례를 통하여 은혜언약 아래 있는 우리들에게 은혜가 주어지기 때문에, 특히 설교와 성례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항상 구원의 은혜를 확신하며, 하나님이 주시는 능력과 복으로 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가 은혜언약 안에 있음을 항상 확신하고, 설교와 성례를 통하여 더 큰 믿음과 복을 받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넘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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