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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01/08,주일-오전) "부활이 없다면" / 고린도전서 15:29~34 / 고한율목사

(01/08,주일-오전) "부활이 없다면" / 고린도전서 15:29~34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 장, 15 장, 170 장, 171장 1절 // 교독문 41번

170108-부활이 없다면-고한율목사.pdf



 여러분은 부활을 참으로 믿으십니까? 여러분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것을 정말로 믿으십니까? 사실 이 질문을 평소에 깊이 생각하는 성도님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이 질문이 정말 마음에 와 닿는 순간이 있기는 합니다. 바로 장례식 때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부활’은 더 이상 막연한 교리가 아니라, 우리가 꼭 필요로 하는 중요한 것이 됩니다. 


 어느 한 성도님이 가족의 장례를 마치고 제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지 모르겠답니다. 그래서 “왜 그렇습니까?” 물었더니, “죽음이 끝이 아니라 부활할 것을 믿으니까 마음이 평안합니다. 아마 예수 믿지 않았다면 계속 슬퍼서 울고만 있었을 텐데, 오히려 마음이 평안합니다.”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죽음을 마주하게 되면 부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평소에 죽음을 잘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부활 또한 잘 생각하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그저 예수님이 부활하신 부활절에나 한 번 생각해 보는 그런 주제쯤으로 여겨지기가 쉽습니다. 우리의 현재 생활과는 별로 상관이 없이 특별할 때에만 필요한 것으로 부활을 이해하는 것이죠. 


 하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부활이 꼭 장례식이나 혹은 부활절 때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우리가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부활을 믿는 것이 중요한 이유를 세 가지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통해서 부활이 왜 중요한지를 우리가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부활은 죽은 자와 관련한 세례 때문에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그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느냐” 이 말씀은 성경 내용 중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구절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에 대해서 학자들마다 다양한 주장을 하지만, 대표적인 것은 가족이나 혹은 가까운 사람이 세례를 받지 않고 죽었을 때, 그 사람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세례의 혜택을 죽은 사람이 받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성경적으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상태가 변할 수 있다고 말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죽은 사람을 위해서 세례를 받아도 그 세례의 효력이 죽은 사람에게 전달되어 그 사람의 상태가 변화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왜 이처럼 비성경적인 죽은 사람을 위한 세례를 행했을까요? 아마도 당시 신비종교에서 하는 의식을 가져온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즉 기독교와 신비종교를 섞어 버려서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행했다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사도 바울이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이야기했다고 해서, 기독교 안에 죽은 사람을 위한 세례가 존재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다만 사도 바울이 여기서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부활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생각은 이것입니다. ‘너희가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지 않느냐? 그런데 왜 받느냐? 너희 생각대로 사람이 죽으면 영혼만 남고, 육체는 사라진다고 한다면 굳이 세례를 베풀 이유가 무엇이냐? 너희가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는 이유는 그들의 몸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 아니냐?’ 


 사도 바울은 죽은 자들을 위해 세례를 받으면서도, 부활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앞뒤가 맞지 않다고 말씀함으로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부활이 확실히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이 목적을 위해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비성경적으로 행하고 있는 죽은 자를 위한 세례를 이야기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 가지 사실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죽은 자를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입니다. 몇 년 전에 어느 유명한 목사님이 자신이 쓴 책에서 자신은 불신자가 죽은 장례식에 가게 되면 그 죽은 불신자를 위해서 기도를 한다고 썼습니다. 이 내용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그 목사님을 비판하였습니다. 나중에 그 목사님은 죽은 불신자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은 그 사람을 구원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유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였다고 해명하였습니다. 순전히 목회적 차원에서 드리는 기도라는 것이죠. 저는 목회적 차원이라는 말에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유가족들은 다 믿는데, 혼자 믿지 않는 가족이 죽은 경우에 유가족들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그런 유가족들의 슬픔을 헤아리고 위로하는 것은 당연히 목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명백히 비성경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9:27절에 보면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는 곧바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죽은 즉시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때 함께 못 박혔던 행악자 중 하나가 예수님에게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행악자에게 “너가 지금까지 지은 죄가 너무 많으니까 죽은 후에 회개를 많이 해라, 그러면 너를 천국으로 데려 가겠다”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행악자는 죽은 직후에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를 하는 것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우리 성도가 이 땅의 삶을 끝내면 그 즉시 그 영혼이 주님 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과 함께 있다가 마지막 부활의 때가 되면 천국에 합당한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불신자들이 죽으면 그 즉시 그 영혼이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 또한 마지막 날에 부활하게 되는데, 그들은 지옥에서 영원히 머물 수치스럽고 욕된 몸으로 부활하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 사람이 죽으면 그 즉시 천국과 지옥으로 각각 가게 될 것을 말씀합니다. 천주교회가 주장하는 것처럼 천국과 지옥 외에 또 다른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주교회는 천국과 지옥 말고도 연옥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연옥은 누가 가는 곳인가? 천국에 바로 들어가기에 부족한 성도들이 연옥에 들어간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연옥에 들어가서 많은 고통을 받으며 이 땅에서 지었던 죄의 값을 치룹니다. 그래서 죄 값을 다 치루면 비로소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연옥에서의 시간을 줄이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연옥에 간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하거나, 혹은 헌금을 하면 연옥에서의 시간이 줄어들게 됩니다. 여러분 바로 여기에서 면죄부가 나왔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연옥에 있던 우리 가족이 곧바로 천국으로 직행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내용이 아니라, 허무맹랑한 소설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리고 믿는 자는 바로 천국으로, 믿지 않는 자는 바로 지옥으로 간다고 말씀합니다. 연옥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죽은 자를 위해서 기도나 그 어떤 종교적 행위도 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살아 있을 때 복음을 전하도록 힘써야 합니다.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하고, 믿지 않는 가족들과 친구들을 위해서 더욱 힘써서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 부활은 주님을 위한 우리의 희생적인 삶과 관련해서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30~3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날마다 죽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날마다 죽는다는 말씀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울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당하는 모든 어려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어려움은 외부적인 것과 내부적인 것 모두를 포함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참으로 혹독한 외부적인 어려움을 많이 당해야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3~27절에 보면 바울이 복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고통과 어려움을 당해야 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한 사람이 이런 고통과 어려움을 다 당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바울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정말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것처럼 “나는 매일 죽노라”는 말이 과장된 것이 절대 아닙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매일 죽는 경험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하고 싶은 말은 이것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죽을 고생을 하면서까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냐? 바로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고난을 겪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본문 32절에 보면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맹수와 싸웠다는 것은 진짜 호랑이나 사자와 같은 동물과 싸웠다는 뜻이 아니라, 맹수와 싸우는 것과 같은 끔찍한 고난, 고통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왜 이런 고통을 피하지 않고 당했는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어도 다시 살 것을 믿기 때문에, 복음을 위하여 담대히 죽을 각오로 고난을 받은 것입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세상에 이것보다 바보짓은 없을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 성도가 복음 때문에, 믿음 때문에 고난을 당해도 괜찮은 것은 부활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장차 부활하게 된다면 이 땅에서 잠시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외부적인 어려움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내부적인 어려움 때문에 바울은 매일 죽음을 경험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4:9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살마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여기서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다는 뜻은 전쟁에서 패하여 포로된 된 적군이 개선장군의 행렬 제일 뒤에 끌려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사람들은 포로를 향해 침을 맺고, 욕을 하며 온갖 모욕을 다 줍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꼭 그러한 상황 속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바울이 사도라고 하니까 뭔가 대단하다 이렇게 높이 생각하지만, 실제 바울이 복음을 전하러 다닐 때 바울을 알아주고 높이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였습니다.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니 이방인들이 사도가 무엇이고, 예수가 무엇이고, 성경이 무엇이고 어떻게 알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바울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이 핍박하고 괴롭혔습니다. 바울을 유대교의 변절자라고 욕하며, 바울을 어떡해서든지 죽이려고 했습니다. 나중에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금식하겠다고 선언한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그야말로 바울은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몸만 힘든 것이 아니라, 마음도 너무 힘들었습니다. 아마도 몇 백번도 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1장에 보면 만약 자신이 선택할 수만 있다면 얼른 주님 곁으로 갔으면 좋겠다고 말씀합니다. 삶이 너무 힘들고, 그 마음이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매일 죽는 것과 같은 이 모든 고통과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부활에 있습니다. 바울은 부활을 확신했습니다. 부활을 확신했기 때문에 매일 죽을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자신을 죽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예수 믿는 것이 뭐 이런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지 않았더라면 세상 사람들처럼 더 편안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예수 믿는 것 때문에 이런 고통과 어려움을 당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만 안 믿었으면 확 받아버리면 그만인데, 예수님 때문에 그럴 수도 없는 난처한 처지에 늘 놓이게 됩니다.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무시와 멸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의 삶이 매일 죽는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불행한 삶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예수님을 위해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부활할 때 이 모든 고난과 어려움이 우리가 받을 칭찬의 면류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성도만이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을 이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희생의 삶을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부활만이 우리를 끝까지 예수님을 위해 살도록 이끌어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은 언제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입니다. 


셋째, 부활은 성도다운 삶을 살기 위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 32~34절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법으로 에베소에서 맹수와 더불어 싸웠다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부활이 중요한 이유는 부활을 믿을 때 우리는 성도다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가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땅의 삶이 전부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32절 말씀처럼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방탕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가장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서 소망을 빼앗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합니다. 대형 냉장고에서 일하는 사람이 하루는 일하다가 실수로 냉장고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문을 두들겨도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사람은 곧 절망에 빠졌습니다. 꼼짝없이 얼어 죽었다고 생각하면서 절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실제로 그 사람은 얼어 죽은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수사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그 대형냉장고가 작동이 안 되는 고장 난 냉장고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냉장고 안이 사람이 얼어 죽을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고장난 냉장고에서 사람이 얼어 죽었습니다.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살 소망을 잃어버리자 얼 수 없는 상황에서 얼어 버린 것입니다. 소망을 잃는다는 것은 이처럼 사람에게 끔찍한 일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오직 오늘만 살아갑니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 인생을 허비하게 됩니다. 


 하지만 부활을 믿는 성도는 영광스러운 미래를 꿈꾸며 매순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힘씁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삶이 전부가 아님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이 땅에서 의를 행하며 하나님의 뜻대로 산 성도는 하나님의 칭찬을 받게 되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여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소망이 있는 성도는 절대로 썩어질 이 땅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는 어느 선교사의 고백처럼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하여 영원하지 않는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불행은 교회 안에도 영원하지 않은 것을 위하여 영원한 것을 버리는 바보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아주 엄중한 말로 속지 말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하며 이 땅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속지 말라고 엄하게 명령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믿을 때 우리들은 방탕주의에 빠지지 않고, 세상에 속지 않고, 선을 행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믿는 것은 지금 우리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부활을 믿음으로 항상 선을 행하며, 의를 행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사도 바울이 부활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부활은 단지 장례식장에서나 혹은 부활절에만 생각해야 할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언제나 부활을 생각해야 합니다. 언제나 부활 신앙을 확고히 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여러 어려움과 희생을 기쁨으로 잘 감당할 수 있고, 또한 방탕주의에 빠지지 않고 선한 삶을 계속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부활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활의 신앙으로 모든 어려움을 이기고, 선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