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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01/29,주일-오전) "화목하게 하는 직분" / 고후 5장 16 ~ 19절 / 고한율목사


(01/29,주일-오전) "화목하게 하는 직분" / 고후 5장 16 ~ 19절 / 고한율목사

170129_(설날)_화목하게 하는 직분-고한율목사.pdf


* 찬송가 : 1 장, 24 장, 508 장, 171 장 1절// 교독문 : 93번

* 대표기도: 배문호 장로 


 우리가 새해를 맞을 때마다 꼭 하는 인사가 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입니다. 얼마나 듣기 좋은 인사이지 모릅니다. 저 또한 새해를 맞으며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님들과 그 가정, 하시는 모든 일마다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넘치게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저는 우리 모두가 새해에 복받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또 하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새해에 복이 되는 것입니다. 복을 받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가정에서, 우리가 일하는 일터에서, 우리가 섬기는 교회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있는 그곳에서 복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보면서 복덩어리가 굴러왔다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복이 되는 것, 우리가 있는 모든 곳에서 복을 전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신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복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복을 받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을 받았다면 반드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은 복을 또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처음 부르시면서 주신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12: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제일 먼저 하신 일은 복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너에게 복을 주겠다고 말씀하신 다음에 바로 ‘너는 복이 될지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여기서 너는 복이 되라고 하신 것은 복덩어리가 되라는 뜻입니다. 즉 너에게 주신 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는 복덩어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3절 제일 마지막에 보면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가족만을 복 주시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보다 훨씬 크고 위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에게 복을 주신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모든 민족에게 복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브라함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도로 부름 받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를 부르셨습니까? 복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구원의 복,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 하나님이 주시는 형통한 삶을 사는 복, 하나님은 분명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만 복 받으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모든 민족에게 복이 되도록 하신 하나님께서 마찬가지로 온 세상을 복되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인 우리가 언제나 내가 복을 받는 것에만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왜 불러 주셨는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나를 부르셔서 구원하시고, 또한 복을 주신 이유를 바르게 아는 성도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려고 힘쓸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자 이제부터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됩시다’라고 말한다고 해서 복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려는 것을 가로막는 큰 방해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방해물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 자신을 가장 귀한 것으로 아는 ‘이기적인 마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어야 한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언제나 자기중심적이어서 남에게 복이 된다고 할 때조차도 우리는 온전히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먼저 섬기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이 겸손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겸손이란 자신을 낮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적게 생각하는 것이다”


 얼마나 정확한 말인지 모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 앞에서 겸손하게 행동할 때조차도 사실은 우리 자신을 높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사람 앞에 무릎을 꿇으면서도, 여전히 우리 마음속으로는 그 사람 앞에서 우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자기중심성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참된 겸손은 무엇이냐? 그저 겉으로 낮추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적게 생각하는 것, 자기 자신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겸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는 자기중심성을 이길 능력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의 복이라 되라고 부르셨지만 우리 힘으로는 절대로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언제나 나만 복 받기를 원하는 이기적인 우리만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왜 복이 되라고 부르신 것일까요? 오직 자신이 받을 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우리라는 것을 아시면서, 너를 통해 세상을 복되겠다고 왜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비록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복이 될 수 없지만, 하나님의 은혜로는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그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기심을 버리고 복이 되는 존재가 되도록 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기적인 우리를 남에게 복을 끼치는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4~15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하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15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예수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 죄인들을 사랑하사 구원하기 위해 당하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곧 하나님의 은혜이고, 이 은혜가 우리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생각할 때 그저 죄 용서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마치 우리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 옷을 깨끗하게 빨아주신 것만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우리의 죄를 씻을 뿐 아니라, 예수님과 우리가 거기서 함께 죽은 것을 뜻합니다.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나의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믿음이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참 신앙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지 우리가 죄 용서를 받는 수단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곧 우리의 죽음입니다.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어서 하나님조차도 멀리하려고 하는 그런 우리의 죽음입니다. 이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도 없고, 또한 복이 될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를 복이 되라고 부르신 것이 아닙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먼저 부르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죽고, 예수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날 때 우리는 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 결과 이제 나는 죽고, 대신 내 안에 계신 예수님께서 사십니다. 그렇기에 이전처럼 더 이상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복이 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될 수 있습니까? 착한 사람입니까? 돈이 많은 사람입니까? 여유가 있는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죽은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지 않은 사람은 결코 복이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만이 이 세상에 복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세 가지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신을 따라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그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여기서 육신을 따라 안다는 것은 이 세상의 방식대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방식대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구약성경 사무엘상에 보면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베들레헴에 보내서 사울 왕을 대신 할 새로운 왕을 찾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때 사울은 이새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는데, 거기에는 일곱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이 그 첫째 아들인 엘리압을 보자마자 하나님께서 선택한 왕이 여기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가 볼 때 딱 왕이 될 만한 그런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삼상 16:7)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가 무엇을 보았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용모와 키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선지자였던 사무엘조차도 사람을 볼 때 제일 먼저 용모와 키를 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처럼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 즉 마음을 보신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사람의 외모를 봅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이 가진 사람인가? 그 사람이 얼마나 높은 사람인가? 그 사람이 얼마나 많은 능력이 있는가? 그 사람이 얼마나 잘 생겼는가? 이런 것을 기준으로 그 사람을 평가합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이 세상에 차별과 불평등이 항상 존재하는 것입니다. 서로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하고 차별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세상의 방식대로 사람을 판단하면 절대 복이 될 수 없습니다. 기껏해야 자신과 친한 사람에게만 복이 될 수 있을 뿐 누구에게나 복이 되는 삶은 살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모두에게 복이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야말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모두 만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에 경건한 사람들이 가까이 하는 것조차 싫어했던 세리들과 창기들에게 거리낌 없이 다가가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얻으신 별명이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7:34절입니다.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예수님에게 별명이 있었는데, 세리와 죄인의 친구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기꺼이 다가가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세상의 방식대로 사람을 판단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에게나 다가가실 수 있었고, 누구의 친구라도 될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복으로 불러 주셨는데, 우리는 여전히 세상의 방식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어울릴만한 사람하고만 지내려고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여전히 예수님과는 거리가 있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복이 되기 위해서는 세상의 방식대로 사람을 보는 것부터 버려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 편견을 버리고, 누구에게나 다가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모든 사람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세상의 기준, 편견을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다가설 수가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두 번째로 살펴보려고 하는 내용입니다. 

 둘째,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새 사람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제가 목회자이다 보니까 지금까지 여러 교회를 섬길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는 교회마다 경험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처음 교회에 부임하면 그 교회 사정을 잘 모르잖아요. 


 그러면 교회 사정에 밝은 성도님이 꼭 찾아와서는 이야기를 해 줍니다. 교회 성도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죠. 이 분은 교역자를 돕겠다는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그렇게 이야기를 해 주십니다. 미리 성도들의 사정을 알면 아무래도 목회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보면 조금 갸우뚱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좋은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 분은 고집도 세고, 남의 말도 잘 안 듣고, 자기 뜻대로만 하려고 하는 사람이니까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는 말처럼 그렇게 심한 분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어봐요. 제가 지금 볼 때는 그리 심한 것 같지 않은데, 정말 그런가요? 그렇게 물으면 “지금은 조금 달라졌을지 몰라도 10년 전에는 정말 말도 못했어요”라고 말씀합니다. 


 10년 전에 그랬던 사람이니까 지금도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죠. 물론 사람이 바뀌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은 혹 고집불통이라도 그 분 안에 계신 성령께서 그 분의 마음을 계속해서 부드럽게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10년 전에 그랬던 분이 지금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성령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처럼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되었습니다. 새것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고 새것이 되었다, 이미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께서 우리를 변화시켜 가듯이, 다른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변화시켜 가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 과정이 조금 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반드시 변화시킬 것을 믿고 우리들은 다른 성도를 향한 어떤 편견도 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복이 되는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기 위해서는 화목의 직분을 가지고, 화목의 말씀을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 1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셔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우리와 화목하게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먼저 믿은 우리들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이 세상 사람들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우리가 세상의 복이 되어야 한다는 핵심적인 뜻이 있습니다. 우리가 복이 된다는 것은 단순히 세상 사람들로 하여금 조금 더 나은 삶, 조금 더 편한 삶을 살도록 돕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어려운 이웃을 조금 돕는 그런 정도가 아닙니다. 우리가 복이 된다는 것은 더욱 본질적인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의 손을 이끌고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일은 우리 힘으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럴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죄인이 어떻게 죄인을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이 일을 예수님께서 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복음, 즉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전할 때, 그것을 통해 사람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화목의 직분이란 다름 아닌 화목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19절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여기서 화목하게 하는 말씀이 곧 무엇이겠습니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믿을 때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복음입니다. 복음이 곧 화목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죄인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복음을 통하여 죄인이 구원을 받아 새롭게 변화되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이 복음을 통하여 죄와 사망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광스러운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복음을 전하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순히 교회 안 다니는 한 사람을 교회 다니게 한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복음은 화목하게 하는 말씀으로서 하나님과 상관없이 영적으로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이끌어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고, 하나님의 백성, 자녀가 되어 이 땅에서와 천국에서 가장 복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보다 더 큰 복은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믿은 우리 모두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직분과 말씀을 통하여 아직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화목하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복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화목하게 하는 직분과 말씀을 섬기고 전하는 것입니다. 


 새해를 맞이하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를 항상 누리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사람에게 복이 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방식대로, 편견에 사로잡혀 사람을 판단하지 말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는 성령의 역사를 믿으며, 우리에게 맡겨주신 화목의 직분을 잘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가정, 직장, 교회, 어느 곳에서도 복이 되는 귀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