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1,2부 예배 |
본문 : 고전 16장 1 ~ 4절 |
2017년 2월 5일 |
연보에 관하여 |
찬송가 : 2 장, 27 장, 215 장, 171장 1절 // 교독문 44번
** 대표기도 : 임진규 은퇴장로
오늘날 교회에서 자주 듣지 못하는 설교 주제 가운데 하나가 헌금입니다. 헌금에 대한 설교를 들은 적이 거의 없다는 말을 제가 여러 성도님들에게 들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만큼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헌금에 대해 잘못 설교하면 시험에 드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아예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목사가 되고 얼마 되지 않아 새로 부임한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젊은 목사이고 새로 부임한 교회니까 아주 열심히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설교의 주제가 우리 힘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을 설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한참 지나서 한 성도님이 저를 찾아와서는 제가 한 설교 때문에 어떤 한 성도가 시험에 든 것 같아서 마음이 어렵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제가 설교한 내용 중에 누구를 시험에 들게 할 만한 내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제가 설교를 하는 중에 우리가 아무리 봉사를 많이 해도,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 예로 헌금을 많이 한 헌금 왕이라도 안 된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제가 말을 조금 재밌게 한다고 해서 있지도 않은 말인 헌금 왕이라는 말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단어가 문제였습니다. 저는 정말 몰랐는데, 그 교회에 정말 헌금 왕이 있었던 것이죠. 정말 많은 액수를 헌금하는 분이 계셨습니다. 저를 찾아 온 성도님은 제가 헌금 왕이라는 말을 써서 그 헌금 많이 하시는 성도님을 지적한 것 아니냐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그 분이 헌금을 많이 하는 분인 줄 전혀 몰랐고, 알 수도 없었기 때문에 그럴 의도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교 중에 단어 하나를 잘못 사용하여 성도들의 마음을 어렵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일이지만, 헌금에 관한 것이 이처럼 민감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헌금이 이처럼 민감한 주제인 것은 당연히 돈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돈보다 우리의 삶에 큰 영향력을 끼치는 것이 또 있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돈에 대해서 정말 많은 말씀을 합니다. 그만큼 우리 삶에 영향력이 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돈의 영향력을 정말 크게 보셨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까지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이 돈의 위력을 얼마나 크게 보셨느냐 하면 돈이 하나님의 라이벌이라고 말씀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돈을 같이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은 돈이 하나님과 비교될 만큼 우리 삶에 큰 영향력을 끼친다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는 돈에 관한 바른 관점을 반드시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돈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돈을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여기고 잘 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가 바로 헌금에 관한 것입니다. 헌금은 단순히 많이 내면 좋은 것이고, 적게 내면 좋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헌금하는 액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마음과 태도로 드리는가입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 안에 있는 헌금 앞에 서 계셔서 헌금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우리 교회와 마찬가지로 예루살렘 성전도 입구로 들어오면 13개의 헌금함이 놓여 있었고 거기에 각자가 헌금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자가 헌금을 하는 것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하면 두둑한 봉투를 헌금함에 넣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주목하신 것은 부자의 두둑한 헌금봉투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주의 깊게 보셨습니다. 그 과부는 두 렙돈의 헌금을 넣었습니다. 오늘 우리 돈으로 하면 500원짜리 동전 두 개입니다. 어떻게 보면 보잘 것 없는 적은 액수의 헌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1:3절입니다. “이르시되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예수님은 우리 돈으로 1000원을 헌금한 과부의 헌금이 가장 큰 헌금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이상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과부가 헌금하기 전에 이미 과부보다 몇 배, 몇 십배, 몇 백배 많은 헌금을 한 부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과부의 헌금이 가장 큰 헌금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21:4절에서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과부의 헌금이 가장 큰 헌금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과부의 헌금이 생활비 전부였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두 렙돈은 과부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즉 과부는 비록 1000원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전 재산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헌금을 보시는 기준입니다. 우리는 천 원보다 만원, 만원보다 십만 원, 십만 원보다 백만 원이 큰 헌금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에게 액수는 관심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헌금을 하는 우리의 마음과 태도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졌음을 믿고,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는 심정으로 헌금하는 것, 그리고 돈이 나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살리는 것이라는 마음으로 드리는 헌금,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십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부자들의 많은 헌금보다 자신의 전 재산을 기꺼이 하나님께 드렸던 과부의 천 원을 더 크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헌금은 단순히 돈을 내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다는 고백이고, 하나님이 우리를 살게 한다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헌금 안에 담겨 있을 때, 그 헌금은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시는 헌금이 됩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예민한 문제이기 때문에 피해야 할 주제가 아니라, 오히려 성경이 말씀하는 바를 정확하게 배워서, 바르게 행해야 할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헌금에 대한 바른 원리들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헌금을 항상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여기서 말하는 연보는 쉽게 말하면 헌금을 뜻합니다. 즉 성도를 위하는 헌금에 관하여 사도 바울이 지금 설명을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는 성도를 위하는 헌금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드리는 헌금과는 구별된 특별한 헌금을 뜻합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성도를 위하는 연보, 즉 헌금은 특별히 예루살렘 교회의 가난한 성도를 위한 헌금을 뜻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예루살렘 교회는 처음 세워진 교회로서 온 세상으로 복음을 전파되기 시작한 마치 어머니와 같은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의 핍박과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이방인 교회들에게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요청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갈라디아 교회들과 마게도냐에 있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지금 살펴보고 있는 고린도 교회 등에 헌금을 요청하였습니다. 이 헌금을 가리켜 ‘성도를 위하는 연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 헌금은 단지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 헌금을 통해 무엇보다 유대인으로 구성된 예루살렘 교회와 이제 새로 개척된 이방인 교회들이 서로 하나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즉 바울은 성도를 위한 헌금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들이 서로 주님 안에서 하나이며, 한 가족인 것을 경험하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입니다.
이것은 특별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 부름을 받은 바울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헌금을 모아서 예루살렘으로 갔는데, 이 때 수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말렸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큰 박해와 어려움을 당할 것이 뻔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성령께서도 여러 사람을 통하여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면 핍박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뜻을 굽히지 않고 목숨을 걸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바로 이 이방인들의 헌금을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헌금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의 교회들이 하나 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버릴 각오를 하였습니다. 그만큼 바울에게 이 일은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이처럼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모으는 일이 바울에게 중요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교회에 어떻게 헌금에 참여할지를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내용을 통해 헌금의 일반적인 내용을 또한 배울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3내가 이를 때에 너희가 인정한 사람에게 편지를 주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헌금에 관한 원칙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 헌금은 주일 예배 때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매주 첫날에 헌금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매주 첫날은 안식 후 첫날, 즉 오늘날의 일요일, 주일을 뜻합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초대교회 때부터 일요일에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 성도들은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에 예배를 드렸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이 쉬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안식일뿐만 아니라, 그 다음 날인 주일에도 성도들은 같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실 주일은 성도들이 모이기가 쉽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쉬는 날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도들은 일하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새벽과 밤에 함께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른 후에는 더 이상 안식일에 모이지 않고, 주일에만 모여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쉬는 날인 안식일에 모이지 않고, 일하는 날인 주일에 모여 예배를 드린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 날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단지 기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세상이 왔다는 것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세상이 물러가고, 생명과 기쁨이 충만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된 주일날, 예배를 드리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이 되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주일에 예배를 드리면서 예수님이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날을 간절히 소망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주일 예배 때 헌금을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주일 예배 때만 헌금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헌금이 무슨 의미인지를 밝혀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 때 헌금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돈이 우리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임을 고백하며 드리는 것입니다.
돈으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 우리가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나라에 속했다는 뜻으로 헌금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일 예배 때 헌금을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헌금을 할 때 우리 주님은 그 헌금을 기쁘게 받아 주십니다.
둘째, 헌금은 규모에 맞게 드려야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에 보면 주일 예배 때 헌금을 하는데, 얼마만큼 헌금을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하라고 말씀합니다. 즉 자신의 경제 규모에 맞게 헌금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서 살펴본 대로 하나님이 우리의 헌금을 보실 때 중요한 것은 헌금이 얼마나 많으냐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부자의 헌금보다 가난한 과부의 천 원 헌금이 크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은 분명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마치 헌금을 투자금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많이 뿌려야 많이 얻게 된다는 식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고린도후서 9:6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기는 합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이 말씀만 보면 많이 헌금해야 하나님으로부터 많은 복을 받게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뜻은 많이 얻기 위해서 많이 내야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다음 절인 9:7절에 보면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는 말씀의 원래 뜻은 그 마음에 자원하여 기쁨으로 헌금을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많은 헌금을 하더라도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면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계속 말씀드리는 대로 하나님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그 헌금을 내는 사람의 마음과 그 태도를 보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헌금을 하더라도 그것을 아까워하고, 억지로 낸다고 한다면 하나님이 보실 때 그 헌금은 매우 초라한 헌금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하나님은 억지로 헌금을 받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8:12절에 보면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은 받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헌금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면서 헌금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이 헌금을 해야 하는가보다 얼마나 기쁘고 감사하게 드리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하나님을 악덕 채권자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필요로 해서 우리에게 헌금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온 만물의 주인이 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보다 부유하신 분은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의 것에 관심이 있어서 헌금을 요구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억지로나 인색함으로 헌금을 해서는 안 되고, 우리의 규모에 맞춰서 감사와 기쁨으로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 앞에서 참 헌금답게 되고, 우리 또한 헌금을 통해 우리의 믿음이 성숙하게 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셋째, 헌금은 자발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사실 성경이 가르치는 헌금의 원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자발성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올 때 헌금하지 말고, 미리 모아 두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왔기 때문에 억지로 헌금을 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는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발적인 헌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자발적으로 헌금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정말 자발적으로 기쁘고 감사하게 헌금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참으로 깨달은 사람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면 결코 자발적으로 헌금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헌금을 다른 말로 표현할 때 은혜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 3절 말씀에 보면 “너희의 은혜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가게 하리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너희의 은혜란 곧 너희의 헌금을 뜻합니다. 헌금을 이처럼 은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헌금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알지 못하면 참된 의미에서의 헌금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인지 고린도후서 8:9절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는 곧 예수님의 은혜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습니까?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 왜 우리와 같은 가난한 인간이 되셨습니까? 자신의 가난함으로 우리를 부요하게 만드시기 위함입니다. 바로 여기에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기 위해 예수님은 가난해 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신 이유입니다. 그런데 헌금의 원리가 이와 같습니다. 헌금은 우리의 돈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가난해 짐으로서 우리의 이웃이 부요하게 됩니다. 이처럼 헌금은 부요하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가난해 진 것처럼,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해 가난해 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은혜가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가난해 지심으로 우리가 부유해 졌듯이, 우리의 헌금을 통해 우리의 이웃이 부유해 지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헌금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그 자체로 은혜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렇기에 헌금은 절대로 억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깨달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가 은혜를 낳게 되는데, 바로 헌금이 그러한 경우입니다.
어떤 성도님들은 헌금을 그저 자발적으로만 하게 하면 점점 그 금액이 줄어들 것이라고 걱정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헌금을 걷는 방법을 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아예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자발적인 헌금, 은혜를 알고 드리는 헌금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베다니 시몬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이 때 한 여인이 와서는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런데 그 향유의 값이 얼마냐 하면 300데나리온이 넘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직장인의 1년 연봉입니다. 적어도 수천만 원짜리 향유입니다. 제자들이 그것을 보고 경악하였습니다. 아니 이렇게 귀한 향유를 낭비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를 도우면 얼마나 좋았겠느냐고 비난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것을 기쁘게 여기셨습니다. 여러분 이 여인이 부자여서 이런 명품 향유를 예수님께 막 부은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이 여인의 전 재산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신의 모든 것을 이처럼 예수님께 주저 없이 다 드릴 수가 있었을까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를 아니까 수천만 원짜리 향유가 조금도 아깝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은혜를 분명히 안다면 어찌 헌금에 인색할 수 있겠습니까? 헌금이 부담이 되고, 우리의 올무가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면 할수록 우리는 우리의 것을 더 아낌없이 드리고 싶어 할 것입니다. 은혜를 알면 알수록 우리의 헌금도 더 기쁜 마음으로 드리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헌금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헌금을 함으로써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며, 또한 우리가 사는 것이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헌금은 무엇보다 우리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기쁨, 은혜에 대한 감격이 담긴 헌금일 때 우리 주님은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금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며, 은혜인 줄을 깨닫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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