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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11/27,주일-오전)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예배" / 고전 14장 26 ~ 40절 / 고한율목사

(11/27,주일-오전)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예배" / 고전 14장 26 ~ 40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3 장, 9 장, 327 장, 620장 1절 // 교독문 37번

161127-품위있고 질서있는 예배-고한율목사.pdf



(대표기도: 임진규은퇴장로 )


 우리나라 어느 유명한 학자가 자신이 왜 교회를 나가지 않는지에 대해 설명한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은 뿌리 깊은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도 그 분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실 그분도 어릴 때에는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고 합니다. 한 때는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려고 하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어느 날부터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교회에 가서 들었던 말이 딱 세 마디 밖에 없더라는 것입니다. 


 “모이자”, “헌금하자”, “교회 짓자” 자기가 오랫동안 교회에 다녔지만 이 세 마디 밖에는 듣지 못해서, 교회를 그만 다니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물론 이 세 마디만 들었겠습니까? 과장된 말임에는 틀림없지만, 분명 한국교회는 예배당 짓는 일에만 너무 많은 힘을 쏟은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복음이 전파된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예배당을 짓는 일은 꼭 필요한 일이었고,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눈에 보이는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에는 그렇게 힘을 쏟았지만, 보이지 않는 교회를 세우는 일은 소홀했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예배당 건축하는 것이 곧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예배당과 교회는 다릅니다. 

 예배당은 건물이지만, 교회는 사람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고백하는 성도들의 모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모여 있는 그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는 고린도전서 1:2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라고 하면서, 그 교회가 뭐라고 말씀합니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교회는 곧 무엇입니까? 건물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성도가 곧 교회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고린도전서 3:16절에서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사도 바울은 무엇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씀합니까? ‘너희’라고 말씀합니다. 건물이 아닙니다. 바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교회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예배당과 교회가 같은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예배당을 아름답게 건축하는 일에도 힘을 써야 하지만, 교회를 아름답게 세우는 일에는 더욱 더 많은 힘을 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예배당이 아름다워도 그 안에 있는 교회가 아름답지 못하다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포장지는 금과 은, 보석으로 되어 있는데, 그 속에 담긴 내용물은 오물 덩어리라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할까요? 여러분 예배당 건물 때문에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크고 화려한 예배당을 보면서 감탄은 할지 몰라도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용서를 깨닫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이 세상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그들로 죄를 깨달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여 사랑과 용서, 베풂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임, 즉 바르게 세워진 교회를 통해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무엇보다 보이지 않는 교회를 바르게 세우는 일에 모든 힘을 쏟아야 합니다. 포장지에 신경 쓸 것이 아니라, 내용물에 신경을 써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주일마다 살펴보고 있는 고린도전서를 썼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어떻게 보면 겉만 화려한 교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속은 상하고 썩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엉망인 교회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치 의사가 칼을 들고 썩은 환부를 도려내듯이 고린도전서를 지금 쓰고 있습니다. 오직 고린도 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또한 고린도전서를 보면서 같은 목표와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보이는 예배당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 우리 각자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롭게 함으로 우리 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특별히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오늘 말씀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


 너희가 모일 때에 찬송시, 가르치는 말씀, 계시, 방언, 통역함이 있다는 말씀은 쉽게 말해서 너희가 예배를 드릴 때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고린도 교회에서 드렸던 예배가 얼마나 적극적이고 풍성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드리는 예배와 달리 예배에 참석한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들이 각각 받은 은사를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찬송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말씀을 가르치고, 어떤 사람들은 계시를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하였고, 그 옆에서 방언을 통역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좋은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나서서 무엇을 하려다 보니까 예배 시간이 마치 도떼기시장처럼 되었던 것입니다. 시장에 가면 정신이 없잖아요. 여기저기서 소리 지르고, 값을 흥정하고, 또 싸우니까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 예배 시간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26절 하반절에 보니까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이전에도 “덕을 세우라”는 말씀을 여러 번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덕을 세우라”는 뜻이 뭐라고 했습니까? “건물을 세운다”라는 뜻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덕을 세위기 위해 하라’는 말씀은 곧 모든 것을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라는 뜻입니다. 바로 여기에 사도 바울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나옵니다. 무엇을 하든 교회를 바르게 세우기 위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방언과 예언의 문제를 다루면서, 이 원칙을 말씀하였습니다. 14: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도 영적인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그것이 풍성하기를 구하라” 성령의 은사를 특히 좋아하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를 자랑하거나 너희 마음의 만족을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구할 것이 아니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즉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구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에게 있어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교회의 덕, 즉 건강한 교회를 세우는데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는 자기가 받은 은사를 자랑하는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을 뽐내거나 드러내는 시간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자기감정에 도취되어서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 하라, 즉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 바울은 예배를 드릴 때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을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그것은 질서, 적극성, 절제입니다. 이 세 가지 원칙을 잘 지키는 가운데 예배를 드릴 때, 우리들은 건강한 교회를 세워갈 수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그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우리는 질서 있게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무엇보다 질서 있게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를 위해 예배 중에 하는 방언과 예언을 그 예로 들고 있습니다. 먼저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누가 방언으로 말하거든 두 사람이나 많아야 세 사람이 차례를 따라 하고 한 사람이 통역할 것이요” 바울은 예배 시간에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의 수를 많아야 세 사람으로 하고, 그 때에도 한꺼번에 말하지 말고, 차례를 지켜서 한 사람씩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방언을 말할 때 반드시 한 사람이 통역을 해야 합니다. 방언이란 우리가 전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므로 통역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들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배 시간에 방언을 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통역이 있어서 예배에 참석한 모든 성도들이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통역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8절을 보세요.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으면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와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


 통역이 없으면 예배시간에는 방언을 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배시간이 일부 사람들을 위한 시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예배시간은 모든 성도들이 함께 하나님 앞에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도도 소외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방언을 통역할 수 없다면 예배시간에 방언을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성도들에게 유익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배 시간에 예언을 하는 경우에도 분명한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29~30절입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30만일 곁에 앉아 있는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으면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예배 중에 말씀을 전하는 자도 많아야 세 명으로 해야 하고, 말씀을 전하다가도, 옆에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말씀을 받았다면 먼저 하던 자는 자기가 하는 말을 멈추고 잠잠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여기서도 예배 중에 방언을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질서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해서, 말씀을 많이 받았다고 해서 혼자서 독점적으로 방언하거나 예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질서를 따라 차례대로 해야 합니다. 특히 방언의 경우에는 통역이 없으면 아예 예배시간에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까 고린도 교회 성도들처럼 자기가 방언을 받았다고 해서,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고 해서, 예배 시간 아무 때나 일어나서 방언으로 기도하거나, 예언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33절입니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대로, 기분대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화평의 하나님이라는 말은 히브리말로는 샬롬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샬롬의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과 질서대로 그 원래 자리에 있는 것이 바로 샬롬입니다. 우리 하나님이 샬롬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 또한 하나님의 뜻과 질서에 맞게 드려야 한다는 뜻입니다. 


 비록 오늘날은 예배 시간에 방언을 하거나 하나님께서 갑자기 주신 계시를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예배가 샬롬의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하나님의 뜻과 질서대로 드려져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생각이나 감정을 따라 즉흥적으로 드려서는 안 되고, 성경말씀을 통해 이미 알려주신 질서와 내용을 따라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실은 또한 우리가 예배에 임하는 태도를 새롭게 해야 함을 가르쳐 줍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정하신 식대로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것은 예배의 주인이 예배드리는 우리가 아니라,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마치 우리가 예배를 주관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예배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함께 예배를 드릴 때 예배 시간에 먼저 와서 기도와 찬양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온전히 향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예배 시간을 급하게 맞춰 온다거나 혹은 늦게 도착한다면 그 자체로 예배를 주관하는 하나님 앞에 온전한 태도가 아님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이 샬롬의 하나님이며, 예배의 주관자가 되심을 알고, 하나님의 뜻과 질서에 합당하게 예배하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둘째, 우리는 적극성을 가지고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두 번째 예배 태도는 적극성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별할 것이요” 예배를 드릴 때 예언하는 자는 둘 혹은 많아도 세 명만 말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예언은 오늘 우리 식으로 하면 설교입니다. 즉 한 예배에 설교자는 많아야 세 명으로 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전하는 세 명의 설교자 외에 다른 성도들은 그냥 아무 것도 안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죠. 오늘 말씀은 그렇지 않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설교자는 많아야 세 명으로 하라고 말씀하면서 다른 이들은 무엇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분별하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분별하라는 것은 판단하라는 뜻입니다. 


 설교자들이 하는 말씀을 그저 다 맞겠거니, 그렇게 생각하지 말고, 정말 하나님이 주신 말씀인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말씀인지를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습니다. 첫째는 설교자의 부족함으로 잘못된 말씀을 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역성경을 보면 선지자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모두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는 아니었습니다. 선지자 중에는 하나님이 보내시지 않고, 스스로 말하는 그런 거짓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말할 때 진짜 선지자와 똑같이 하나님이 말씀을 주셨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면 깜빡 속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거짓 선지자들의 말을 진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따른 사람들은 비참한 최후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설교자가 말했다고 해서 무조건 믿을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지를 판단해야 합니다. 여러분 집에 있는 수도꼭지에서 물이 나오지 않습니까? 나라에서 공급해 주는 물이니까 우리는 깨끗하다고 당연히 믿고 마십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물을 보니까 흙이 섞여 나오고 오물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래도 나라에서 주는 물인데 해로울까 하고 그냥 마시겠습니까? 


 그런 분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깨끗한 물이라도 흐르는 가운데 오염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연약한 사람에 의해 오염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분별하고 판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가 설교자의 말씀을 판단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말씀을 우리 마음 깊이 새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자의 말을 판단해야 한다고 해서 무조건 의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말씀이 정말로 그러한가 하며 깊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11절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너그러워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베뢰아 사람들은 설교를 듣고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그 말씀이 정말 그런 뜻인가를 확인하기 위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상고했다는 말은 조사하다, 검사하다, 연구하다는 뜻입니다. 


 그냥 말씀을 듣고 지나치지 않고 마치 소가 먹은 것을 되씹는 것처럼 그렇게 말씀을 깊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설교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분별하라고 말씀하는 것은 바로 이 뜻입니다. 예배 시간에 전해지는 설교를 건성으로 듣지 말고, 정말 그 말씀의 뜻을 깊이 생각해 보고, 마음에 새기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적극성이 분명 필요합니다. 예배는 관람시간이 아닙니다. 앞에서 목사가 예배를 이끌어가는 것을 보는 시간이 아닙니다. 이 시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시간이고, 말씀을 통해 우리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가 적극성을 가지고 듣고, 판단하며,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3절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극적으로 분별하고 판단함으로 그 말씀이 우리의 삶 가운데 역사하는 것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우리는 절제 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세 번째 예배 태도는 절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에는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논쟁을 일으킨 문제 말씀이 들어 있습니다. 34절을 보세요. “모든 성도가 교회에서 함과 같이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그들에게는 말하는 것을 허락함이 없나니 율법에 이른 것 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 여자는 교회에서 어떻게 하라고요? ‘잠잠하라’ 교회 안에서 말하는 것을 허락한 적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여자성도님들은 이런 말씀이 성경에 기록된 것이 조금은 기가 막힐 수 있을 것입니다.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여자에게 잠잠하라고 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여자들은 교회 안에서 일체 말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1:5절에 보면 여자가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언하는 것에 대해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예언은 모두 말하는 것이므로, 여자가 교회 안에서 잠잠해야 한다는 말씀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자가 일체 교회에서 말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앞에서 본 것처럼 오늘 본문은 예배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일반적인 교회 생활이 아니라, 예배 중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여자가 잠잠해야 한다는 것은 예배 중에 국한된 것이고, 그것도 일반적인 경우가 아니라 특별한 상황의 경우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자세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아서 확실히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예배를 드릴 때 몇몇 여자 성도들이 큰 소리로 말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 바울의 말씀을 따라 적극적으로 들은 설교를 깨닫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합니까? 남편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남녀가 같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구별해서 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남편이 저 멀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큰 소리를 질문을 했던 것이죠. 이것이 반복되니까 예배가 혼잡스럽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예배 시간에는 잠잠하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35절을 보세요. “만일 무엇을 배우려거든 집에서 자기 남편에게 물을지니 여자가 교회에서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라” 예배 중에 큰 소리로 남편에게 묻지 말고, 집에 가서 조용히 물으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절제하며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만 생각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야 합니다. 그럴 때 경건한 예배를 드릴 수 있고,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는 좀 궁금한 것이 있어도, 꼭 해야 할 말이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예배 후에 얼마든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핸드폰도 진동이나 무음으로 하셔야 합니다. 예배는 나 혼자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끼치지 않도록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절제하지 못하는 예배는 결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어떤 태도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가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존중하며, 적극성을 가지고, 절제하며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복된 예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을 결론내리면서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질서와 적극성, 절제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품위 있고, 질서 있는 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예배를 통해 풍성한 은혜가 항상 함께 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