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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11/13,주일-오후) "WCF (12) 인간의 타락" / 창 3장 1 ~ 10절 / 고한율목사

(11/13,주일-오후) "WCF (12) 인간의 타락" / 창 3장 1 ~ 10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290 장, 251 장

161113_인간의타락_오후예배.pdf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는 그 옛날 에덴동산에서 울려 퍼졌던 하나님의 안타까운 음성이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네가 어디 있느냐”입니다.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는 피하여 숨었습니다. 이전까지는 동산에 거니시는 하나님과 사랑스런 교제를 나누었던 아담과 하와였지만, 죄를 짓고는 더 이상 하나님 앞으로 나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피해 숨은 아담과 하와를 향해 “네가 어디 있느냐”고 외치셨습니다. 


 사실 이 외침은 하나님이 정말 아담과 하와가 어디 숨어 있는지 몰라서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나와 사랑의 교제를 나누었던 아담과 하와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라는 뜻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지금까지 하나님의 모든 복과 은혜를 풍성히 누리며 에덴동산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금하신 열매인 선악과를 따먹는 즉시 모든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자에서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는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안타까운 외침인 “네가 어디 있느냐”는 오늘까지도 여전히 이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복을 받던 인간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여 도망가는 신세가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바로 인간의 타락, 인간의 죄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통해서 살펴보려고 하는 주제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은 신앙고백서 제6장 인간의 타락, 범죄, 형벌에 대해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제6장 1항을 같이 보겠습니다(16쪽).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는 사단의 간계와 유혹을 받아 금지된 실과를 먹음으로 범죄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지혜로우시고 거룩하신 뜻을 따라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다스리실 목적으로 그들의 이 같은 범죄를 허용하셨다. 이렇게 경륜하심이 그의 기쁘신 뜻이었다.”


 신앙고백서는 인간의 범죄가 에덴동산에서 처음 발생했다고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창세기 본문이 그 내용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뱀이 하와에게 접근하였습니다. 그런데 뱀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냐면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다”고 합니다. 이것을 신앙고백서에서는 사탄의 간계와 유혹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즉 사탄이 뱀을 통하여 역사하였다는 것입니다. 뱀은 하와에게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물었습니다. 이 말 속에 사탄의 간교함이 가득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되, 오직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은 먹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모든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야말로 에덴동산에서 모든 것을 누릴 특권과 자유를 받았습니다. 다만 오직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빼고 말입니다. 그런데 사탄은 뭐라고 말을 합니까? 오직 선악과 하나만을 금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그것을 더 크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사탄이 일부러 간교하게 말한 것입니다. 


 여러분, 사탄의 유혹이 이렇습니다. 사탄은 항상 하나님이 주신 큰 은혜는 잊어버리게 만들고, 작은 어려움은 큰 것으로 부풀립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하도록 만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10가지 재앙을 애굽에 내려서 종살이 하던 애굽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애굽 군대가 뒤따라오자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셔서 바다 사이를 통과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뒤따라오던 애굽 군대는 바다 속에 집어 넣으셨습니다. 세상에 이런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역사를 피부로 와 닿게 경험한 민족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무엇을 불평한지 아십니까? 어떤 거창한 어려움이 아니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었습니다. 그마저도 하나님은 만나를 주셔서 먹게 하셨는데,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해서 불평하였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엄청난 은혜는 다 잊어버리게 하고, 오직 우리 눈앞에 있는 작은 어려움이 전부인 것처럼 과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사탄의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 기억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성경은 ‘기억하라’고 우리에게 거듭 말씀합니다. 지금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지금 가진 어려움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큰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시고,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그렇게 하여주실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확신한다면 우리 앞에 놓인 문제들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지금까지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고 거듭 명령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사탄은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명령하신 하나님의 명령이 부당한 것이라고 간교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선악과를 먹으면 너희가 죽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완전히 뒤엎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미 하와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부당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어왔고, 그 결과 뱀의 말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와는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게 되었고, 남편인 아담에게도 주어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인류의 최초 범죄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범죄로 말미암아 이 땅의 모든 비극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비극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신앙고백서는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로 말미암아 발생하게 된 엄청난 비극에 대해서 설명하기 전에 신앙고백서는 엄청난 비극을 초래한 아담과 하와의 이러한 범죄조차도 사실은 하나님의 목적 가운데 있었던 일이라고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아담과 하와의 범죄가 하나님의 목적과 뜻 밖에서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라, 실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뜻 안에서 발생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셨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전에 살펴본 대로 하나님은 지극히 선하신 하나님이기 때문에 결코 죄를 짓거나 죄를 짓도록 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고백서에 보면 ‘허용’하셨다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즉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저지를 때 그것을 막지 않으시고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비록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어 죄를 지은 것은 그들의 책임이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절대적인 주인, 주권자가 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록 사탄이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을 죄로 오염시키고 더럽혔습니다. 이것은 겉으로 볼 때 이 세상을 선하게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이 어긋난 것처럼 보이게 합니다. 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심지어 사탄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어긋나게 하거나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앞으로 될 모든 일들을 다 아셨고, 그러므로 자신의 선한 목적과 뜻을 틀림없이 이루어 가십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조차도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뜻을 어긋나게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범죄는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과 은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분명 악한 일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악한 일로 말미암아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어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베푸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참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실패와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역전시켜서 우리에게 선한 결과를 주신다는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실패와 잘못, 심지어 죄까지도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뜻을 좌절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목적과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악함에도 불구하고 우릴 향한 선한 목적과 뜻을 이루실 하나님을 꼭 믿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우리 보다 크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용기를 내어 신앙생활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아담과 하와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일어난 끔찍한 비극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신앙고백서 6장 2항을 보도록 하겠습니다(17쪽). “이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은 본래 가졌던 의를 잃었고, 하나님과의 교제도 끊어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사망에 이르게 되었고, 그들의 영혼과 육신의 모든 부분과 모든 기능이 전부 더러워졌다.”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끔찍한 비극의 가장 중요한 내용은 그들이 본래 가졌던 의를 잃어버리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의”를 잃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의”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의”라고 하면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깨끗한 것을 생각합니다. 물론 “의” 안에는 그런 개념이 다 들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의 가장 중요한 개념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즉 의를 가지고 있다는 뜻은 그 사람이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이라는 뜻보다 먼저는 그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을 가리켜 ‘의인’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윗입니다. 여러분, 다윗은 의인입니까? 악인입니까? 분명 의인입니다. 사도행전 13장에 보면 다윗을 가리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니 당연히 의인이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다윗이 도덕적이고, 정직하며, 깨끗한 사람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알 듯이 다윗은 자신의 충성된 부하의 아내 밧세바와 간음을 행하였고, 이 일을 숨기기 위해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아를 죽였습니다. 이 일만 보더라도 다윗을 결코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다윗을 의인이라 부르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라는 개념은 이처럼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도덕적인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가입니다. 그렇다면 악인은 누구입니까? 반드시 나쁜 짓을 해야 악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지 않는 사람은 모두 악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죄인, 악이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3:23절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죄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즉 의를 잃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모두가 경험하는 모든 비극의 근본적인 원인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죄가 왜 그토록 심각한 문제일까요? 우리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즉 ‘의’를 잃어버리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부르실 때, 아담과 하와가 무서워서 숨었습니다. 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의를 잃어버려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자 즉시 인간에게 찾아온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죽음’입니다. 여러분, 죽음은 원래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처음 세상을 창조하실 때 죽음은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교제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공급받는다는 뜻입니다. 나무를 생각해 보세요. 나무줄기와 가지는 어디로부터 물과 영양분을 공급받습니까? 뿌리입니다. 줄기와 가지는 뿌리가 붙어 있는 한 계속해서 물과 영양분을 공급받기 때문에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뿌리에서 잘려나가면 나무는 어떻게 됩니까? 당연히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서 떨어진 인간은 더 이상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음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런데 죽음이 전부입니까? 아닙니다. 죽음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증거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인간은 그 때로부터 모든 면에서 가난해지고, 아프며, 비참하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든 복과 은혜, 생명의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결과입니다.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모든 고통과 슬픔, 비참함, 고독은 모두 죄의 결과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서 사는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이런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죄와 사망의 권세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절대 구원일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구원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많은 돈을 가지고 있으면 이 세상을 살 동안 남보다는 조금 더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돈으로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 큰 권력이 있다면 남들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다 해도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이라고 생각하는 이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사실은 우리의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문제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아야 그 문제를 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소화가 잘 안 돼서 병원을 찾았습니다. 그런데 의사는 대충 진찰하더니 위염이 있다고 말하면서 위염 약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위염 약을 먹었지만 계속 아픈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다른 큰 병원을 찾아가서 정밀진단을 받았더니 위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위암은 젊은 사람의 경우에는 빨리 진행이 되는데, 때를 놓친 것입니다. 


 위암을 갖고 있는 사람이 위염 약을 아무리 먹는다고 나을 수 있습니까? 병만 키울 뿐입니다. 절대 나을 수 없습니다. 문제가 정확히 무엇인지 모르면 이처럼 낭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죄의 문제인데, 의를 잃은 것,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끊어진 것인데, 이 문제를 알지 못하고 자꾸 엉뚱한 것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면 결국은 망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왜 오셨습니까? 좋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입니까? 우리를 건강하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우리의 소원을 풀어주시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무너뜨리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리 인간의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 백해무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예수님을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 문제를 풀기 위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의 죽음과 그의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죄가 용서를 받고,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무너졌음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바로 여기에 참된 구원이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우리의 참된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죄의 문제이며, 그 죄로 말미암아 ‘의’ 즉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잃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비극이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끊어지게 되어 발생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신음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은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얻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의 모든 죄가 용서 받고, 죄와 사망의 권세가 무너졌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 즉 의를 가진 ‘의인’이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교제하며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모든 복과 은혜를 다시 받아서 복된 삶을 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 성도들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과 더욱 더 깊이 교제하기를 힘쓰며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복과 은혜를 풍성히 받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하는 우리 모두에게 구원의 은혜가 더욱 풍성하게 넘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