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7,주일-오후) "(은퇴식) 신랑 친구의 기쁨" / 요 3장 28 ~ 30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435 장, 384 장
161127-은퇴식-신랑 친구의 기쁨-고한율목사.pdf
오늘은 한 분의 장로님과 세 분의 권사님이 은퇴하는 뜻 깊은 날입니다. 짧게는 10년, 길게는 20년 넘게 현재의 직분을 받아서 우리 은곡교회를 섬겨 주셨습니다. 강산이 바뀌어도 몇 번 바뀐 긴 세월동안 주님이 주신 직분을 귀히 여겨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교회의 직분이라는 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자리와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오르기를 원하는 것은 더 많은 힘과 권력을 가지고 사람들을 주관하고 다스리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의 교회는 전혀 다릅니다. 교회의 직분은 오직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주님과 성도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영광스러운 일이라기보다는 고생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장로라고 해서, 내가 권사라고 해서, 내가 목사라고 해서 누가 알아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더 잘 섬기지 못하면 야단맞기 쉽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을 받아 오랫동안 섬기는 것은 결코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어떤 점에서 보면 다른 성도들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고, 많은 오해도 받아야 하고, 또 많은 희생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잘했다고 해서 칭찬받는 일보다는 원망과 불평, 꾸중을 들을 때가 더 많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을 견뎌내고 끝까지 주신 사명을 이루어, 이제 은퇴를 맞이하는 것이기 때문에 오늘은 더 없이 영광스러운 날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은퇴하는 여러분들의 모든 수고를 우리 주님이 다 아십니다. 물론 여기에 모인 우리 모두도 여러분의 수고에 감사와 존경을 드리지만, 무엇보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의 충성됨을 기쁘게 받으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처럼 은퇴라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조금 서운하고 섭섭한 일임에도 틀림없습니다. 지금까지 열심히 주님과 교회를 섬겨왔는데, 이제는 하는 일을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일 것입니다. 물론 은퇴했다고 해서 이제는 교회 안에서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함께 예배드리고, 성도들을 섬기는 것은 이전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사라졌다는 그런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은퇴 후에 공허한 마음이 들어서 힘들어 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이제 뒤로 물러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서운한 마음도 커지는 것 같습니다. 진작 더 열심히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 때문에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은퇴라는 것이 분명 영광스러운 일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 달갑지 않게 여겨지기도 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러분에게 은퇴라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복된 것인지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은퇴를 통해서 적어도 세 가지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첫째, 주신 직분을 완수했음에 대한 감사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을 때, 그 기한을 정해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즉 직분을 받아 일하기 시작한 때가 있다면, 그 일을 마칠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예수님이 말씀하신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달란트 비유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어느 사람이 외국으로 긴 여행을 떠날 때, 세 명의 종을 불러서 각각 5 달란트, 2 달란트, 1 달란트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처럼 각각의 종에게 달란트를 나눠 준 주인이 먼 외국에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돌아와서는 무엇을 하였습니까? 나눠준 달란트를 가지고 어떻게 했는지를 보고받았습니다. 주인이 달란트를 종들에게 나눠주고는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시 돌아 왔습니다. 돌아온 후에는 나눠 준 달란트를 가지고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보고 받았습니다.
그래서 받은 달란트를 잘 사용하여 이윤을 남긴 두 종은 칭찬하였고, 그러지 못하고 받은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있었던 종은 큰 책망을 받았습니다. 저는 주인이 종들에게 나눠 준 달란트를 직분에 비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을 때 영원토록 그 직분을 감당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칠 때가 있습니다. 주인이 돌아오면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주신 달란트를 가지고 많은 이윤을 남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인이 올 때까지 맡겨 준 일에 충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인이 떠날 때만 열심히 하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도중에 그만 둬도 소용없습니다. 주인이 오기 직전까지만 일했어도 소용없습니다. 주인이 온 그 시각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은퇴라는 것은 우리가 주인이 올 때까지 충성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중에 포기하지 않고, 다른 일로 빠지지 않고, 주님이 주신 직분에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런 종들을 칭찬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사도라는 직분을 받았는데, 그 직분을 감당하는 것을 마치 마라톤 선수의 경주로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쓴 편지로 생각되는 디모데후서 4:7~8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였습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제 곧 의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영원토록 사도의 직분을 감당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끝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끝을 바라보면서 죽을 힘을 다해 달렸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도중에 멈추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초반에 잘 달렸어도 결승점에 들어가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어느 마라톤 선수가 시작점부터 전력질주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1Km 지점을 통과할 때 그는 세계신기록을 세웠습니다. 어느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선수는 곧 지치기 시작했습니다. 초반에 너무 힘을 썼던 것이죠. 결국 반도 못가서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사람의 1Km 신기록은 어떻게 됩니까? 아무 쓸데없는 것이 됩니다.
마라톤은 우리가 잘 알듯이 42.195Km를 뛰는 경기입니다. 1Km를 잘 뛴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승점에 들어와야 모든 것이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 힘을 다해 결승점을 향해 달렸고, 그 결승점 앞에서 곧 받을 면류관을 기대하며 기뻐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은퇴하시는 분들은 주님이 정하신 결승점에 이제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우리 신앙의 경주는 죽는 그 순간까지 이어질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주님이 주신 교회의 직분의 결승점은 오늘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이 정하신 결승점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것보다 감사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이 직분을 감당해 오는 동안 참 잘했던 적도 있었을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실수하고, 잘못하여 상처를 남기고 또한 어려움을 준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이든 이제 여러분은 결승점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자체로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주어진 몫을 충분히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신 직분을 완수했음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말 감사하셔야 합니다. 끝까지 완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이 여러분을 특별히 도우셨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이제 모든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 부름을 받아서 적어도 지금까지는 직분을 받아 한 곳에서 계속 섬기지 못하였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지금까지 모교회를 포함해 다섯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난날 여러 교회를 섬겼던 때를 생각하면서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실 때 제가 교회에서 다른 사람하고 화평하게 지내면서 일한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아니면 만나는 사람마다 싸우면서 일한 사람처럼 보이십니까?
저는 나름대로는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면서 일을 하려고 힘썼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견이 맞지 않아서 다투기도 하고, 어느 경우에는 속이 너무 상해서 얼마 동안 말도 제대로 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제가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얼굴 들 면목이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교회에서 제가 지금까지 계속 있었다면 아직도 몇몇 분들과는 서먹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떠나 다른 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서운했던 마음, 미워했던 마음, 억울했던 마음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상대방이 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함께 일을 할 때는 미처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고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아무 잘못 없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내 잘못이 더 컸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같이 하다보면 서로의 연약함으로 부딪치는 경우가 반드시 있습니다. 어떨 때는 쉽게 풀어지지만 그러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계속 얼굴을 맞대고 무엇을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더욱 더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은퇴란 무엇입니까? 은퇴는 일하는 현장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는 것입니다. 한 걸음 물러서면 이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깨닫지 못했던 상대방의 진심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전에 알지 못했던 나의 부족함을 알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 마음에 이해와 용서, 사랑의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은퇴는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돌아볼 기회를 줘서 이해하고 사랑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입니다.
저는 은퇴하는 모든 분들이 이전보다 더 큰 사랑과 용서,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것보다 더 감사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
셋째, 신랑 친구의 기쁨을 알게 하심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것도 무슨 뜻인가 이해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그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세례자 요한에 관한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보다 6달 먼저 이 세상에 와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어렸을 때부터 광야에서 자라면서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고, 특히 회개의 세례를 전하였습니다. 이에 수많은 사람들이 세례자 요한에게 몰려들어서 그의 말씀을 듣고, 그가 베푼 세례도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세례자 요한에게 모여들었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로 갔던 것입니다. 그러자 세례자 요한의 제자 중 하나가 세례자 요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3:26)
무슨 말입니까? “큰일입니다. 선생님. 지금 예수라는 떠오르는 스타가 나타나서 선생님의 팬들이 모두 예수에게로 다 가버렸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이 제자의 말에 세례자 요한이 답한 것이 오늘 말씀입니다. 먼저 세례자 요한은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하기 위해 먼저 보냄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28절입니다. “내가 말한 바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요 그의 앞에 보내심을 받은 자라고 한 것을 증언할 자는 너희니라”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은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는 주인공이신 그리스도를 그보다 먼저 와서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29절입니다.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라고 말합니다. 신랑이 주인공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자신은 신랑이 아니다, 즉 주인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세례자 요한은 나는 신랑의 친구이며, 신랑의 친구로서의 기쁨이 충만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사실 인간적으로 보면 세례자 요한은 충분히 섭섭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광야에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왔습니다. 얼마나 많은 수고와 헌신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예수님이 나타나자 자신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인간적으로 매우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나는 기쁨이 충만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절대로 그저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의 진심을 담은 말입니다. 우리 같으면 참으로 섭섭한 일인데, 어떻게 세례자 요한은 오히려 기쁨이 충만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그 이유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세례자 요한이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대로 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신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사람이었고, 신랑 옆에 서 있는 신랑의 친구였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이 등장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자 기뻐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먼저 소개하는 자로서, 신랑 옆에 있는 친구로서 기쁨이 충만했던 것입니다. 만약 세례자 요한이 자신을 주인공으로 생각했다면 예수님의 등장은 그를 괴롭히는 일이 되었을 것이고, 그의 삶은 참으로 불행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오히려 기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주인공이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도 아니고, 신랑도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소개하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친구로서 그 곁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모든 영광은 우리가 아닌 예수님이 받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기쁨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분명히 알면 세례자 요한이 누렸던 충만한 기쁨을 우리 또한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마치 우리가 주인공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많은 경우 섭섭하고 서운합니다. 주인공인데 주인공 대접을 받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세례자 요한처럼 주인공이 아닙니다. 주인공은 오직 한 분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 영광이 돌려지면 그것이 우리에게는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은퇴가 이것을 깨닫게 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인생의 주인공 노릇을 하고 싶어 합니다. 내 중심으로 모든 일이 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영광을 받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은퇴는 우리가 주인공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주인공이 아닌 것을 인정하도록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친구입니다. 영광을 받고, 주목을 받아야 할 분은 오직 예수님입니다. 우리는 은퇴를 통해서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은퇴하는 모든 분들이 신랑 친구의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서 서운한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신 예수님 옆에서 함께 기뻐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신랑 친구의 기쁨으로 충만하다면 무슨 일에도 섭섭하거나 서운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랑 친구의 기쁨을 빼앗아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예수님 옆에만 있다면 우리는 항상 충만한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신랑 친구의 기쁨이 오늘 은퇴하는 모든 분들에게 충만하게 임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오늘 은퇴하는 모든 분들이 세 가지 이유로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맡기신 직분을 끝까지 완수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랑 친구가 가지는 충만한 기쁨을 가질 수 있음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감사가 오늘 은퇴하는 네 분의 장로님, 권사님 심령 가운데 충만히 흘러넘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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