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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12/04,주일-오후) "WCF (13) 전적 타락" / 롬 3장 9 ~ 18절 / 고한율목사

(12/04,주일-오후) "WCF (13) 전적 타락" / 롬 3장 9 ~ 18절 / 고한율목사

161204-전적타락-고한율목사.pdf



찬송가 : 260 장, 274 장


 우리는 지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제6장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6장은 인간의 타락과 범죄, 형벌을 그 내용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는 이 세상에 죄가 처음 들어온 사건, 즉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사건을 살펴보았고, 그 범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로 말미암아 발생한 결과는 첫째 그들이 가지고 있던 의를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의’라는 말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의’는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은 사람을 ‘악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았던 악인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될 때, 이것을 ‘의롭게 된다’라고 표현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처음 창조하셨을 때, 그들에게 의를 주셨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을 때, 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와 함께 즐거운 교제를 나누셨습니다. 하지만 아담과 하와가 범죄를 저질렀을 때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아담과 하와가 의를 잃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두 번째 결과인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자 죄의 세 번째 결과인 사망이 그들에게 임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게 되었기 때문에 당연히 찾아온 결과입니다. 마치 뿌리에서 잘려나간 나무 줄기와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뿌리로부터 모든 양분과 수분을 공급받아 살아왔는데, 뿌리에서 잘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 것도 공급받지 못하여 말라 죽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진 인간에게 사망이 찾아온 것은 이런 점에서 너무나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죄의 네 번째 결과는 사람의 영혼과 육신의 모든 부분과 모든 기능이 전부 더러워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전적 타락’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타락하게 되었는데, 어떤 부분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 타락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인간이 전적으로 타락한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신앙고백서 6장 4항(17쪽)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인류가 선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배격하며 무능해졌고, 악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된다. 이것이 원래의 부패성(원죄)이다. 여기서 본인들의 모든 자범죄들이 나온다.” 전적 부패란 무슨 뜻입니까? 선에 대하여는 전적으로 배격하며 무능해 진 것이고, 악에 대해여는 전적으로 기울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보다 쉽게 말하면, 우리는 선을 전혀 행하지 못하고, 하는 일마다 악을 행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적 부패입니다. 성경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로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이 이 상태 속에 머물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본문이 이 사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9~12절까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나으냐 결코 아니라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10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시편 14편 말씀을 인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야말로 전적부패라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무엇보다 전적부패라는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전혀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왜 사람이 선한 일을 할 수 없느냐고 반문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교회 안 다녀도 얼마든지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사람들이 있고, 또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목숨을 바쳐 구해 내는 사람들도 있지 않느냐고 말을 할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들은 선한 일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선은 우리 인간의 수준에서 말하는 선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선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준에 부합하는 선입니다. 즉 하나님이 선이라고 인정하는 ‘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수준으로 볼 때 선한 일이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선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그저 겉으로 드러난 것만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동기까지도 모두 보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하여 선을 행할 수 없다는 뜻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눈앞에서 하나님을 만족하게 할 수 있는 선을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우리끼리 비교하면 좀 더 나은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모든 사람들은 선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무능하지만 악에 대해서 매우 유능합니다. 아니 유능하다 못해 사실상 하는 모든 행동들이 다 악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에 보면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모든 인간이 처한 절망이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 이후 모든 사람은 그 범죄의 결과로 말미암아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전혀 선을 행할 수 없고, 오히려 악만을 행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인간에게 구원의 소망이 있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람들은 사람이 착하게 살면 구원을 받는다고 순진하게 생각합니다. 나쁜 일보다 착한 일을 더 많이 하면 당연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인간의 전적 부패를 몰라서 하는 순진한 생각일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단 하나의 선한 일도 할 수 없는 것이 우리들인데,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는 만큼의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마치 아직 숫자가 뭔지도 모르는 갓난아이에게 수학자들도 풀기 어려운 수학문제를 주고, 그것을 풀면 구원해 주겠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니 숫자도 모르는데, 어떻게 문제를 풀 수 있습니까? 선을 행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선을 쌓아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적 부패를 깨달은 사람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구원의 희망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로마서 3:23~2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절 말씀은 모든 인간이 처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즉 구원을 받을 가능성이 전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됩니까?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서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들은 숨쉬는 그 자체로도 악을 내뿜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이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고, 그가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구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만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성경에 나오지는 않지만 그럴 듯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천국 문 앞에 도착했는데, 그 앞에 베드로가 문을 가로 막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천국 안에 들어가도록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가 무엇 때문에 문을 열어줘야 하는지 이유를 대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저는 주일마다 교회를 빠짐없이 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베드로가 ‘한 개’라고 답했습니다. 그 사람은 또 ‘저는 성가대도 봉사하고, 교사도 하고, 전도회 회장도 했습니다.’ ‘두 개’, 그리고 저는 연말이 되면 구세군 냄비에 돈도 꽤 많이 넣고,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헌금도 많이 했습니다. ‘세 개’ 이처럼 자신이 한 일을 말하는 그 사람의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갔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100가지를 말할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베드로 앞에서 절망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 사도여!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저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한 일이 정말 보잘 것 없고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절대 구원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저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만을 의지할 뿐입니다.’ 이렇게 그 사람이 울면서 베드로 앞에서 이야기할 때, 갑자기 굳게 닫혔던 천국 문이 열렸다고 합니다. 


 천국 문이 어떻게 열린 것입니까? 우리가 무엇을 해서 열린 것이 아닙니다.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음을 알고, 오직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할 때, 그 때 천국 문이 열렸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한 자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오직 예수님과 그의 십자가 공로를 의지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공로가 아니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전적으로 부패한 자라는 것을 알 때에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혜인지를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값없이 주신 구원을 항상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신앙고백서는 아담과 하와의 죄가 어떻게 오늘 우리의 죄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3항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인류의 뿌리인 고로 그들의 모든 후손들에게 그 첫 범죄의 죄책이 전가되었고 죄로 인한 그 동일한 죽음과 부패된 성품이 대대로 유전되어 내려온다. 그렇게 되는 것은 그 후손들이 그들에게서 보통 생육법으로 출생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문장은 첫줄, ‘그들은 인류의 뿌리’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따집니다. 성경에서도 각 사람이 자기의 죄만을 감당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부모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그 죄가 내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의 죄가 오늘 나와 상관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아담과 하와가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 계약을 어기면 어떻게 됩니까? 정녕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만약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까지 우리가 생각을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키면 영생을 얻게 됩니다. 단순히 에덴동산에서 영원토록 사는 것이 아니라,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첫 인간이 맺은 계약,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계약은 첫 인간, 아담과 하와하고만 맺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몸에서 나올 모든 후손들과도 맺은 것입니다. 만약 아담과 하와가 계약을 지켜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면 그의 후손들은 자동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까? 왜 그렇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대표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그 계약을 깨뜨렸고, 그 결과 그 후손들까지도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아담과 하와는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과 계약을 맺은 것이고, 그 결과 또한 모든 인류에게 미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원죄가 나오게 됩니다. 원죄란 인류의 대표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계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모든 인류 속에 있게 된 죄입니다. 예를 들어보면, 지금 대한민국은 대통령으로 말미암아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대통령이 잘못한 것이 왜 우리 국민들과 상관이 있습니까? 대통령이 잘못했으면 대통령만 욕먹으면 될 일인데, 왜 우리가 수모를 당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대통령이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대통령 안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이 잘해서 칭찬 받으면 우리가 칭찬 받는 것이고, 수치를 당하면 우리 또한 수치를 당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죄가 우리의 죄, 즉 원죄가 되는 이유도 바로 이 대표성의 원리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한편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로 말미암아 그들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원죄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그 원죄로 말미암아 짓게 되는 죄를 자범죄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아담과 하와의 첫 범죄 이후 이 땅에 태어나게 된 모든 사람들은 원죄를 갖고 태어나게 되고, 그 원죄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계속 더하는 비참한 상황 가운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의 경우에는 어떨까요?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 신앙고백서 5항은 이렇게 말씀합니다(18쪽). “중생한 신자들이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본래의 부패성이 그들에게 남아 있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용서되고 또 소멸되어 가지만 그 부패성 자체와 거기서 나오는 행위들은 모두 틀림없는 죄악이다.”


 중생한 신자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본래의 부패성이 그들에게 남아 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우리 경험상 분명한 사실로 드러납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중생한 성도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지을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우리 속에 본래의 부패성이 아직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부패성은 예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으로 점점 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을 사는 동안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육체의 정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을 따라 살라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 속에 부패성이 없다면 이런 명령을 주실 필요가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 땅을 살 동안에는 우리 속에 남아 있는 부패성과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패성은 언제 완전히 사라지게 될까요?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의 생명을 다할 때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우리 속의 부패성이 완전히 사라지고 온전히 거룩한 존재가 됩니다. 이것을 ‘영화’ 즉 영광스러운 존재가 된다고 표현합니다. 빌립보서 3:21절에 보면 “그는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의 죽음은 반드시 슬픈 일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성도의 죽음은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죄성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되어 지극히 거룩한 존재가 되는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죽음을 막연히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오히려 영광스러운 모습을 가지게 될 복된 사건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인간의 전적부패와 아담 안에서 우리에게 원죄가 주어지며, 그 원죄로 말미암아 자범죄를 더하게 된다는 사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중생한 성도일지라도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여전히 죄성, 부패성이 남아 있어서 죄와 싸워야 함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사실들을 마음에 잘 새겨서 전적인 은혜로 주신 구원에 항상 감사하며, 죄를 따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아감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