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주일-오후) "WCF (14) 언약의 하나님" / 창 2장 16 ~ 17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458 장, 370 장
161211-언약의 하나님-고한율목사.pdf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것들이 많아도 그것을 잘 정리하고 쓸모 있게 만들어 놓아야 가치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얼마나 귀하고 보배로운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렇게 귀하고 보배로운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잘 정리해서 이해하지 못하면 그 가치를 제대로 깨달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매년 성경통독을 결심하고 열심히 읽습니다. 그래서 목표한 대로 다 읽었습니다. 그 때 마음에 큰 기쁨이 있고, 뿌듯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기쁨과 뿌듯함은 잠시입니다. 곧 ‘내가 지금 무엇을 읽은거야?’하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을 다 읽었는데, 그 전체 내용이 명확히 생각나지 않습니다. 성경에 있는 유명한 이야기들, 내가 감동받은 구절들은 혹 생각이 나더라도, 전체 내용이 어땠는지 도대체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되면 ‘내가 이러려고 성경을 그렇게 열심히 읽었나’ 하고 자괴감에 빠지게도 됩니다.
아마도 이런 경험들이 모두들 있으실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 안에 있는 그 많은 보석들을 하나로 꿰지 못했기 때문에 오는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의 보석과 같은 내용들을 하나로 꿰어 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신앙고백서 7장은 바로 그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1항을 우리가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18쪽).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의 간격은 너무 크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이성 있는 피조물인 인간들이 하나님을 창조주로 순종할 책임을 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분을 인간들의 복과 상급으로 모실 길은 전혀 없었다. 다만 하나님 편에서 친히 자원하여 낮아지셔서 인류를 찾아 주시는 길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것이 곧바로 하나님이 기쁘시게 취하신 언약의 방법이다.”
성경을 하나로 꿸 수 있는 중요한 주제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자 하는 ‘언약’입니다. 사실 성경을 한 주제로 꿸 수 있다고 할 때 언약 말고도 여러 다른 주제들이 있습니다. 가령 하나님 나라, 구속사, 하나님의 왕 되심 등은 성경 전체를 꿸 수 있는 중요한 주제들입니다. 하지만 이런 중요한 주제들 중에서도 언약은 특히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방금 신앙고백서 1항에서 확인한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를 맺기 위해서 바로 언약이라는 방식을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언약을 이해하지 못하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서 1항에 보면 먼저 하나님과 우리 인간 사이에 간격이 너무 크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간격이 크다는 말의 뜻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차이가 너무 커서 자연적인 관계를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가령 한 나라의 대통령과 평범한 국민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민주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대통령이나 국민이나 평등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차이는 정말로 큽니다.
그 단적인 예로 평범한 국민이 원한다고 해서 아무 때나 대통령을 독대할 수 없습니다. 평범한 국민이라면 아예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분의 차이 때문입니다. 만약 인간 가운데 세워진 대통령도 이처럼 높은 신분을 가져서, 아무 때나 만날 수 없다고 한다면,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경우는 어떻겠습니까? 그의 피조물인 우리들은 감히 하나님을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창조주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우리들에게 명령을 하시면 우리는 오직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원칙적으로 말하면 우리들은 하나님께 그 어떤 것도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다스리는 주님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에서 잘 설명하였습니다. 로마서 9장에서 바울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였습니다. 9:16~17절에 보면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17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아무리 힘쓰고 노력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구원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긍휼히 여기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완악하게 만드신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은 구원받지 못하도록 아예 막으신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이 설명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시다고 주장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공평한 기회는 줘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왜 엿장수가 마음대로 하는 것처럼, 하나님 또한 자기 마음대로 누구는 구원하고 누구는 망하게 하느냐는 것이죠.
이 때 바울이 뭐라고 대답하였습니까? 9:20~21절입니다.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21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바울은 하나님이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생각하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관계가 마치 토기장이와 진흙의 관계와 같다고 설명합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가지고 무엇을 만들든지 그것은 그의 전적인 자유입니다. 그래서 어떤 그릇은 귀하게 쓸 그릇으로 만들고, 또 어떤 그릇은 천하게 쓸 그릇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왜 이 진흙으로는 귀히 쓸 그릇을 만들고, 다른 진흙으로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냐고 불평할 수 없습니다. 가령 우리가 TV를 통해 보지 않습니까? 토기장이가 그릇을 만들고는 불가마에 넣어서 굽습니다. 그리고 다 구운 후에 그릇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갑자기 망치를 들고 깨버립니다. 그릇에 금이 가거나 색이 잘못 번지거나 하면 그렇게 아예 깨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사람이 그것을 보고는 아니 왜 멀쩡한 그릇을 깨느냐고, 누구 마음대로 깨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절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그릇들이 토기장이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바울의 설명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큰지를 분명히 알게 해 줍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복과 상을 요구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교회 다니면서 아주 당연하게 하나님께 복을 구하고, 복을 주시지 않으면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생각한다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요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이것이 원래 하나님과 우리 사람 사이의 관계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런 관계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더 깊은 관계를 맺기 원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더 깊어지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낮아지셔서 우리를 찾아와 주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하나님께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 에스더서에 보면 유대인 여자였던 에스더가 왕비가 되었을 때, 하만이라는 사람의 계략으로 말미암아 온 지역의 유대인들이 멸망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 때 에스더의 삼촌인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비이니 왕에게 말하여 유대인을 구하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그리 어려운 부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남편에게 가서 부탁하라는 말이니까 쉬운 일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에스더가 처음에는 거절합니다. 왜냐하면 당시 법으로 왕이 먼저 부르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먼저 왕에게 나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왕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먼저 왕을 부르면 그 사람은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남편이라도, 에스더가 허락없이 왕에게 가면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에스더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마음으로 삼일을 금식하고 왕을 먼저 부르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의 은혜로 왕이 왕비의 부름을 받아주지요.
가령 하나님과 우리 사이가 이와 비슷하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 부른다고 하나님이 응답하시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왕이 먼저 와야 관계를 맺을 수 있듯이, 하나님이 자신을 낮추어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가까이 오셔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온 세상과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극히 낮추셔서 자신이 만든 사람에게 다가오셔서 관계를 맺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하나님이 인간을 찾아오셔서 무엇을 하셨는가? 사람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언약을 세움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관계를 맺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창세기 2:16~17절 말씀이 그 언약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17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있는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담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이 아닙니다. 아담은 그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을 찾아오셨고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의 내용이 바로 언약입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가? 신앙고백서 2항에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19쪽). “인류에게 맺어주신 하나님의 첫 언약은 ‘행위언약’이다. 이 언약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및 아담에게 대표된 그 후손들에게 생명을 약속하셨다. 그 약속은 그들의 완전한 개인적 순종을 조건으로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인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는데, 그 언약을 행위언약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행위언약’이란 행위를 통해 언약을 지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방금 창세기 2장에 나오는 행위언약의 내용을 읽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지만, 딱 하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맺은 언약의 내용입니다.
이 언약을 지키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됩니다. 반대로 어떻게 하면 어기는 것입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입니다. 이처럼 먹느냐 먹지 않느냐는 행위로 언약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가 결정되기 때문에 행위언약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약을 깨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어떻게 될까요? ‘반드시 죽게 됩니다.’ 이것이 언약을 깨뜨릴 때 발생하는 일입니다.
반면에 언약을 지키면 어떻게 될까요?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먹었을 때는 반드시 죽는다고 명확하게 말씀하는데, 그 반대의 경우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충분히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만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나머지 모든 나무의 열매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런데 먹을 수 있는 나무 열매 중에는 생명나무도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으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결국은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천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킬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첫 인간 아담과 맺은 언약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로 결과가 결정되는 행위언약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첫 인간 아담은 이 언약을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다.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게 되고, 그래서 결국 아담과 하와 모두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려 버렸던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언약을 깨뜨렸으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죽음이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너희가 반드시 죽으리라한 대로 그들과 그들의 후손들은 모두 죽음 아래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불평하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런 언약을 아담과 맺으셔서 이처럼 온 세상이 죄와 죽음 가운데 놓이게 되었느냐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인간을 정말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모독하고 경멸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담과 언약을 맺었다는 그 자체가 인간이 받은 최고의 복이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방법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직 피조물인 인간에게 주어진 것은 순종의 책임 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복과 영생 등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친히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이것부터가 은혜입니다. 그리고 찾아오셔서 아담과 언약을 맺으심으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복과 영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에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영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도저히 스스로 얻을 수 없는 것이고, 먼저 하나님께 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을 찾아오셨고, 언약을 주심으로, 아담이 순종만 했다면 영생을 얻는 은혜를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와 행위언약을 맺었다는 자체를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인간을 사랑하는지를 전혀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행위언약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깨어졌고, 그 결과 모든 인간은 죄와 죽음 가운데 비참한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비록 행위언약은 실패했지만, 새로운 언약을 세우심으로 우리와 계속 관계를 가지시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새로운 언약을 우리는 은혜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이 내용은 우리가 다음 시간에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 사람과 관계를 맺으시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인간이 먼저 하나님께 나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자기를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영생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먼저 사람과 맺은 언약은 행위언약이었습니다. 그 내용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순종하면 영생이 주어질 것이고, 불순종하면 죽음이 주어지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아담과 하와는 이 언약을 깨뜨리게 되었고, 그들과 그들의 후손인 모든 인류는 죽음 아래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또 다른 언약을 예비하여 주셔서, 사람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셨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스스로 낮추어 우리를 찾아오셔서 언약을 맺으심으로 우리에게 복과 영생을 얻을 길을 주셨습니다. 언약이야말로 하나님의 우릴 향한 사랑과 은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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