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주일-오전) "구원역사의 위대한 결말" / 고전 15장 20 ~ 28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5 장, 112 장, 31 장, 620장 1절 // 교독문 40번
161218_구원역사의 위대한 결말-고한율목사.pdf
* 대표기도 : 남승우장로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은 보통 부활장이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15장 전체를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바울이 부활의 문제를 다루는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 일부가 부활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들은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당시 고대 사람들처럼 사람에게 있어서 영혼이 중요하지, 육체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찮은 몸의 부활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사도 바울이 볼 때 매우 위험한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몸의 부활이 없다면, 결국 예수님의 부활도 있을 수 없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결코 영의 부활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분명하게 확인하듯이 예수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자기 몸을 만져 보라고 하기도 하였고, 또한 직접 음식을 먹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영의 부활을 했다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몸의 부활이 확실하며, 몸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는 일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만약 몸의 부활을 믿지 않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부정하게 된다면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우리의 믿음과 신앙생활 전체가 무너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한 죽음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의 죄를 위한 죽음인지 알 수가 없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사흘 만에 부활시킴으로서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우리의 죄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음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활이 없으면 십자가 죽음도 의미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으면 죄의 문제가 그대로 남게 되고, 우리의 믿음은 헛된 것이 됩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결국 이 세상의 삶이 전부라는 뜻이 되는데, 그렇다면 예수 믿는 우리보다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손해를 보고, 희생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힘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중에 하나님께 받을 칭찬과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평소에 놀고 싶은 데도 꾹꾹 참고 열심히 공부하는 이유가 뭐예요? 시험이 있으니까요. 평소에 열심히 공부하면 시험을 통해 보상을 받지 않습니까?
그런데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 시험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부활을 믿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다면 우리 성도들보다 불쌍한 사람이 없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부활을 믿기 때문에 오늘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부활을 통해서 옳은 것으로 증명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몸의 부활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하게 강조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알고, 몸의 부활과 예수님의 부활, 그리고 우리의 부활을 확신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에 대해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그저 하나의 기적 정도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부활은 기적입니다. 하지만 결코 단순한 기적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얼마나 큰 능력이 있는지를 한 번 보여주시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가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부활이 구원역사에 있어서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이 처음 만들어진 때부터 지금까지 흘러온 과정을 역사라고 부릅니다. 역사는 인류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에 보면 이런 세상의 역사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하시는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구원역사, 혹은 구속사라고 부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세상역사는 배경에 불과한 것이고, 진짜 역사는 바로 하나님이 이끄시는 구원역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철저하게 구원역사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경 안에는 세상 역사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단지 배경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성경에 보면 애굽이나 바벨론, 헬라, 로마제국 등이 나옵니다. 세상역사로 보면 이들 나라는 아주 중요한 주인공과 같은 역할을 한 나라들입니다. 하지만 성경 안에서 이 나라들은 조연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구원역사에 있어서는 배경이 될 뿐입니다.
구원역사의 주인공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아브라함으로 시작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 복음을 받아 교회를 이룬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위해 어떻게 구원계획을 이루어 가시는가를 기록하였습니다.
이 구원역사는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는 죄를 지은 본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하게 창조하신 세상을 함께 완전히 망가뜨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죄로 말미암아 죽음 아래 비참한 삶을 살게 된 인간과 죄의 저주로 망가진 세상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과 세상을 구원하시기로 계획을 세우셨는데, 바로 구원자를 이 세상에 보내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실 구원자는 인간과 세상을 망가뜨린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계획을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직후에 바로 선언하셨습니다. 창세기 3: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뱀은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말씀의 뜻은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사탄의 세력을 박살내리라는 것입니다. 뱀이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십자가 죽음은 단지 발꿈치를 상하게 하는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히려 사탄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죽음의 권세를 빼앗겼기 때문에 머리가 박살난 것 같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자마자 그들을 구원할 계획을 선언하셨습니다. 이 계획의 절정은 하나님께서 보내실 구원자, 즉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고 다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의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죄와 사탄의 통치로 망가진 이 세상을 다시 회복시킬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과 회복하신 세상을 온전히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의 완성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제로 이뤄진 것을 우리는 구원역사라고 부릅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계획대로 구원역사는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구원역사를 알 때 지금 우리가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구원역사의 어느 지점에 있을까요? 성경을 보면 우리는 지금 구원역사가 완성되기 직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은 종말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지금 종말의 때를 살고 있습니다. 물론 완전한 종말, 이 세상이 심판받고,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는 마지막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마지막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부활이 종말을 시작하는 신호가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나오는데, 바로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가 무엇입니까? 가을이 되면 나무에 열매들이 달리잖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모든 가지마다 열매가 동시에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보면 앙상했던 가지에 열매가 하나 매달려 있습니다. 이것이 첫 열매입니다. 첫 열매가 중요한 이유는 이제 곧 가지마다 열매가 달릴 것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첫 열매라고 부릅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예수님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모든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21~22절입니다.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이 범죄한 이후로 모든 사람은 죄 가운데 죽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이 사망이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의학기술이 아무리 발달되고, 건강지식이 크게 는다고 해도 죽음을 정복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죄의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죄의 해결없이는 죽음의 해결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뜻이고, 그 결과 죽음의 권세를 깨뜨렸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죄와 죽음의 시대였지만, 예수님의 부활이후로 영생의 시대가 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마지막 시대, 즉 종말이 시작되었다는 신호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앞으로 남은 것은 무엇입니까? 23~2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종말의 시작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성도들이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 능력을 멸하실 것입니다. 이것은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사탄의 세력을 멸하실 것을 뜻합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후로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왕으로 구원받은 백성들과 회복된 세상을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역사의 마지막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처럼 구원역사가 완성될 것인데, 이 완성의 첫 시작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이제 하나님께서 구원역사를 마무리할 때가 되었고, 그 마무리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구원역사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부활을 설명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부활은 단순히 신기한 사건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그 종말 한 가운데 우리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즉 구원역사는 우리와 상관없는 그저 성경에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 우리가 속한 역사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너무나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의 기준이 나 자신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으면 좋은 예배이고, 내가 별로였으면 별로인 예배가 됩니다. 성경을 읽어도 내게 은혜 되는 말씀만 좋아하고, 어렵고, 딱딱하고, 마음을 찌르는 말씀은 보려고도 안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예수를 믿는 것이 복 받는 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 것이 이 세상에 있는 다른 어떤 신을 믿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게 됩니다. 그저 복 받으려고 예수를 믿는다면 정화수를 떠 놓고 달을 보며 복을 비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지금 우리나라를 뒤흔든 최순실이라는 분이 한 때는 강남에 있는 어떤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교회 주보에 그분이 낸 기도제목이 나와 있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분이 쓴 기도제목이 무엇이냐 몇 개가 나와 있었는데, 모두 하나 같이 잘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빌딩이 잘 팔리게 해 주시고, 딸이 승마경기에서 우승하게 해 주시고, 좋은 대학 가게 해 주시고, 다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교회만 다닌 것이 아니었습니다. 무당도 많이 찾아갔는데, 무당에게 무엇을 부탁했겠습니까? 똑같은 제목을 부탁하지 않았겠어요? 예수를 믿으나 무당을 믿으나 구하는 것이 똑같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문제는 무엇입니까? 최순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나 무당을 믿으나, 부처를 믿으나 다르지가 않습니다.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큰 문제가 아닐까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땅에서 잘 살도록 하기 위해서 구원하셨다고 결코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되기 위해서 예수를 보내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고 부활시켰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그저 나 하나 잘되는 것으로 축소시키면 안 됩니다. 그것은 결코 성경이 말씀하는 믿음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서 잘사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위대한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가득한 죄와 죽음의 세력을 몰아내고, 하나님이 다스리는 새로운 세상을 세워서 거기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히 살도록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해변에 정말 크고 멋진 성을 우리를 위해 세워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성에 관심이 없고 무엇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까? 모래성에만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누가누가 모래성을 크고 화려하게 잘 짓나 거기에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래서 나보다 조금 더 큰 모래성을 쌓은 사람을 보면 열등감을 느끼고, 나보다 못하게 모래성을 쌓은 사람을 보면 우쭐거립니다. 하지만 이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밀물 때가 되어 파도가 덮쳐오면 크든, 작든 모래성은 모두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작년에 만든 모래성이 지금도 잘 있다고 말하는 것을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모래성은 다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모래성을 자랑하지 마세요. 모래성 때문에 너문 애타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머물 크고 위대한 성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역사의 위대한 결말이 이제 막 시작되었음을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부활을 이야기하면서 구원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일들을 이야기해 주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속해 있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바르게 알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앞으로 지구가 몇 백 년 후에 없어질지 모른다고 주장합니다. 환경오염이 너무 심해져서 결국 인류는 다른 세계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보다 더 확실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면 새로운 세상이 세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와 죽음이 제거되고, 사탄이 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오직 하나님이 통치하는 가장 복된 세상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이 세상 사람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겨서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구원역사 속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세상 사람들과 같이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의 일입니다. 일본군이 필리핀까지 진출하였습니다. 하지만 1945년에 전쟁에 패하여 항복하고, 모든 군인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필리핀 루방섬이라는 곳에 파견되었던 일본군 중 오노다 히루 소위는 미군을 피해 정글에 들어갔다가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전해 듣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로 오노다 소위는 약 30년을 정글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여전히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정글에서 버텼던 것입니다.
결국 30년이 지나서 전쟁 당시 오노다 소위의 상관이었던 다니구치 소령의 명령을 전해 듣고는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고 정글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시대가 왔지만, 그것을 알지 못하고 혼자서 30년을 정글에서 혼자 전쟁놀이를 하며 지냈던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원역사를 알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어리석은 일본군과 다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로운 세상을 세워 다스릴 것을 알지 못한다면 우리들은 이 세상 사람들처럼 그저 이 세상의 헛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세상 사람들을 따라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통해서 구원역사의 어느 지점에 우리가 와 있는지를 알려주십니다. 이제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열렸습니다. 이제 곧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죄와 사망의 권세를 가진 사탄의 세력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들은 모두 예수님처럼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새롭게 세우시는 복된 세상에서 우리는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다스리시는 복된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속한 구원역사의 결말이고, 우리 모두의 결말이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믿는다면 오늘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처럼 세상의 헛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구원역사의 위대한 결말을 아는 성도는 결코 세상 사람들처럼 이 땅이 전부인 것처럼 살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구원역사 속에 우리가 있음을 알고, 그 위대한 결말을 소망으로 삼아 이 땅을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우리들에게 지혜와 용기를 항상 부어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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