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8,주일-오후) "WCF (15) 은혜 언약" / 창 3장 15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05 장, 446 장
161218-은혜 언약-고한율목사.pdf
우리는 지난 시간에 언약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언약이 성경 전체를 하나로 꿸 수 있는 중요한 주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특히 언약이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통해서 우리를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언약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합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과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언약을 신앙고백서에서는 ‘행위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 이유는 선악과를 먹느냐 먹지 않느냐 하는 행위로 언약을 지키는 것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언약을 지켜서 선악과를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생명, 영생을 주실 것입니다. 반대로 언약을 깨뜨려서 선악과를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죽음이 주어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우선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과 언약을 맺으셨다는 자체가 큰 은혜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창조자이신 하나님께 영생을 포함한 그 어떤 복과 은혜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에 불과한 우리들은 그저 하나님이 명령하시면 따를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스스로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와 주셨고,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을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언약을 맺었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큰 은혜라는 것을 우리는 꼭 기억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아담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깨뜨리고 맙니다. 선악과를 먹어버린 것입니다. 그 결과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 이상 행위언약을 통하여 영생을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죽음의 지배 아래에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아담에게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담은 그를 통해 태어날 모든 인류를 대표로 하여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아래서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문제는 이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이런 비참한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되었습니다. 늪에 일단 빠지면 빠져 나오기 위해서 몸부림칠수록 더 깊이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즉 힘을 쓰면 쓸수록 더 힘든 상황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늪에서 빠져 나오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밖에서 건져 주는 것입니다. 밖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도저히 나올 수 없습니다.
행위언약을 깨뜨리고 죽음의 늪에 빠진 인간의 상황이 이와 같습니다. 스스로 절대로 구원을 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착한 일을 많이 해도, 아무리 재물을 많이 모으고, 권력이 크다 해도 그것으로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아담 이후 모든 인간이 처한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황입니다.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처지에 있는 우리에게 구원의 손이 다가왔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새로운 언약을 다시 맺으신 것입니다. 최초의 언약인 행위언약이 실패하자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인간과 새로운 언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처럼 새롭게 맺는 언약은 행위언약과 달리 인간이 깰 수 없는 언약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행위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에 똑같이 행위언약을 맺으시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셨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언약을 맺을 때는 인간이 깰 수 있는 행위언약이 아닌 인간이 깰 수 없는 은혜언약으로 하셨습니다.
신앙고백서 7장 3항에 보시면 지금 말씀드리는 은혜언약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19쪽). 먼저 앞부분을 먼저 보고록 하겠습니다. “인류는 범죄 하였으므로 행위 언약으로는 생명에 이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둘째 언약을 맺어 주시기를 기뻐하셨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은혜 언약’이라고 하는데” 행위 언약으로는 인간들이 생명에 이를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은 인간이 죽음 아래서 망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둘째 언약을 맺어주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가를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아담이 행위언약을 깨뜨렸을 때 하나님은 그냥 내버려 두셔도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행위언약을 깨뜨린 것은 아담이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배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그러므로 행위언약을 깨뜨리고 죽음 아래 비참한 삶을 살게 된 모든 책임은 아담과 그의 후손들 자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자신에게 아무 책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 아래 있게 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다시 찾아와 새로운 언약을 맺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처음 맺었던 행위언약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은혜언약이라고 부릅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엇입니까?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창세기 3:1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를 찾아와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하와를 유혹하여 선악과를 따먹도록 한 뱀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한 말씀이 방금 읽은 창세기 3:15절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내용 중에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죄에 빠진 인간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하실 것인지 그 내용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하나님은 뱀과 여자를 원수가 되게 하고,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도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뱀은 그저 동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뱀을 통해 역사한 사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적인 내용은 이것입니다. 뱀의 후손과 여자의 후손이 원수가 되는데, 여자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하게 한다는 말은 부서뜨린다는 뜻입니다. 무엇을 부서뜨립니까? 뱀의 머리를 부서뜨립니다. 즉 사탄의 머리를 부서뜨린다는 뜻인데, 이것은 사탄이 여자의 후손으로 말미암아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뱀도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입니다. 하지만 발꿈치는 머리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여자의 후손이 사탄을 완전히 파괴하고, 사탄은 여자의 후손에게 약간의 상처를 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여자의 후손은 바로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무엇보다 사탄의 머리를 깨부수는 일을 하였습니다.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 죄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죄의 결과가 죽음인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죽음의 권세가 깨졌다는 뜻이고, 이것은 곧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사탄의 머리를 깨는 일을 하였습니다. 사탄이 가지고 있던 가장 큰 힘인 죽음의 권세를 깨뜨림으로 사탄이 아무 힘도 못쓰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탄이 그저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사탄도 예수님을 공격했습니다. 그래서 발꿈치를 상하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지 발꿈치를 상하게 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창세기 3:15절은 하나님께서 앞으로 죄인들을 어떻게 구원하실 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셔서 사탄의 권세를 깨뜨려 우리를 구원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 안에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이 다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이 말씀이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하자마자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처음부터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창세기 3:15절 말씀이 우리에게 언약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말씀을 방금 살펴보았지만, 이전에 맺었던 행위언약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일단 내용도 다르지만, 더 결정적인 차이는 행위언약 안에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했습니다. 우리의 행위가 꼭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창세기 3:15절에는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 전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이 이 안에 담겨있습니다.
이것이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의 결정적인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행위언약에 실패한 인간에게 똑같은 행위언약을 주시지 않고, 은혜언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은혜언약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우리가 지켜야 할 행위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3:15절에 보면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든지, 어떤 행위를 해야 한다든지 하는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약속만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보내 사탄을 깨부숨으로 구원을 주시리라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은혜언약은 행위언약처럼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에 보면 은혜언약에 대해서 3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3항에 가운데 있는 (1)을 보세요. “(1) 죄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영생과 구원을 거저 제공하셨고” 행위언약에서는 우리가 선악과를 따먹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래야 영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은혜언약은 전혀 다릅니다. 은혜언약에서는 우리가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 우리가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거저 제공하신다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값없이 거저 영생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생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다고 할 때 하나님께서 정하신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2)을 보시기 바랍니다. “(2) 사람들이 이 구원을 받으려면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되도록 하셨고” 은혜언약 안에서 우리는 영생을 값없이 거저 받게 되는데, 그 받는 방법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영생을 얻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 유명한 요한복음 3:16절에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누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까? 그를 믿는 자, 즉 예수님을 믿는 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결국 내가 믿음을 가지고 있어야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냐? 이 믿음이라는 것이 결국 행위와 같은 것이 아니냐고 따지는 분이 계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믿으면 구원받고, 내가 믿지 않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고 한다면 믿음이 곧 행위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결코 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가진 믿음조차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을 보세요. “(3) 영생을 얻기로 예정된 자들에게 성령을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자원하여 믿도록 해 주신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자원하여 믿도록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은혜언약이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값없이 영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조차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믿음을 은혜로 주십니다. 이렇게 보면 은혜언약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즉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고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해 주십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언약의 이름을 은혜언약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이 언약은 절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홀로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어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하셨고, 부활시킴으로 우리의 죄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홀로 다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예수님이 이루신 죄 사함의 은혜와 영생을 우리에게 주시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믿음, 그 믿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다 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고 분명하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구원은 우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합니다.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다는 말의 뜻은 우리가 무엇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우리에게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와 은혜언약을 맺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홀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아는 것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만약 은혜언약이 아니라, 우리에게 행위언약이 주어졌다면 우리 중 어느 누구도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늘 내가 무엇을 잘못하거나 어기지 않았나 두려워하며 신앙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항상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자신이 제일 잘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은혜언약 안에 있어서 우리의 구원을 하나님께서 다 이루셨다는 사실을 믿는 성도는 이런 불안과 공포 가운데 신앙생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다 이루셨기 때문에 반드시 우리의 구원이 완성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는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더 크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신앙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우리가 은혜언약 안에 있다는 것이 우리가 막 살아도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어차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텐데 열심히 신앙생활해서 뭐하나 이렇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분명 구원받지 못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은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와 사랑의 크기와 깊이가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알기 때문에 감히 그것을 이용할 생각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크고 깊은 사랑과 은혜 때문에 더욱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 살려고 힘쓰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살았던 모습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에 보면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데, 그 은혜 때문에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새긴 사람일수록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스스로를 자랑하는 것이고,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르게 안다면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더욱 더 주님을 자랑하고, 주님을 위해 수고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늘 우리 모두가 은혜언약을 통해 우리에게 영생과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은혜와 사랑 때문에 더욱 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악함과 연약함을 아시고 은혜언약을 맺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과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항상 감사하며, 그 언약의 하나님을 찬양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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