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06,주일-오후) "생명에 이르는 회개" / 마가복음 1:14-15 / 고한율 목사
오후찬양 예배 |
본문 : 막 1장 14 ~ 15절 |
2017년 8월 6일 |
WCF (34) 생명에 이르는 회개 |
찬송가 : 354 장, 279 장
옛날 한국영화 중에 투캅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안성기 씨와 박중훈 씨가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로서 꽤 흥행이 되었습니다. 영화 내용은 두 사람이 형사인데 한 팀이 되어서 악당들을 물리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안성기 씨가 맡은 고참 형사 역은 정말 부패한 형사였습니다. 업주에게 가서 돈을 뜯어가고, 피해자에게 가서 잘 해주겠다며 수고비를 챙깁니다. 반면에 박중훈 씨가 맡은 신참 형사 역은 정말 정의로운 형사였습니다. 그러니까 부패한 형사와 정의로운 형사가 한 팀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사건건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온갖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고참 형사는 새로 온 정의로운 신참 형사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지금까지 마음껏 부정을 저질러 왔는데, 이제 신참 형사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부정을 저지르는 고참 형사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어느 날 예배를 드리는데, 목사님이 설교하기를 권력을 가지고 약한 사람을 괴롭히는 사람은 철저하게 회개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말씀에 고참 형사가 눈물을 흘리며 은혜를 받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다 마치고 나오면서 그 부인에게 “목사님 말씀 틀린 거 하나 없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고참 형사가 스스로 죄를 깨닫고 회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을 괴롭히는 신참 형사를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자신이 저지른 죄는 회개할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죄를 지적하는 신참형사가 회개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영화 속의 우스운 장면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우리 성도를 바라보는 아주 냉정한 시선이 들어있기도 합니다. 우리가 교회 와서 회개한다고 하지만 정말로 회개하고 있는가 그것을 묻는 것이죠. 정말 우리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왜 세상에서 이처럼 교회와 성도들이 비난을 받는 것일까?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은 신앙고백서 15장 생명에 이르는 회개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를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먼저 15장 1항을 같이 읽겠습니다(36쪽).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복음적 은혜이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자들은 누구든지 그것을 그리스도 신앙의 교리와 마찬가지로 전파해야 된다.” 먼저 회개는 복음적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회개가 우리의 의지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야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의 영적인 상황과 관련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2:1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는데, 어떤 상태에서 살리셨다고 말씀합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을’이 아닌 이미 죽은 우리를 살리셨다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들의 영적인 상황은 시체와 같습니다. 우리의 영적인 상황이 시체와 같다는 것은 영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였습니다.
그렇기에 당연히 우리들은 우리들이 죄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세상 사람들 중에 나는 아무 잘못도 없다, 떳떳하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그들이 그렇기 때문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죄를 지었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스스로 회개를 할 수 없습니다. 그저 우리 속에 있는 양심으로 말미암아 죄책감은 가질 수 있고, 후회는 할 수 있지만 철저하게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거듭나지 않고는 결코 회개할 수 없습니다. 즉 영적으로 죽은 우리가 다시 살아나야만 회개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회개는 하나님께서 은혜로 거듭나게 하시고,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않고는 회개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회개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첫 단계가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보통 언제 구원 받았습니까? 질문을 하면 많은 성도들이 눈물, 콧물 흘리면서 회개했던 날을 구원받은 날로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날은 구원을 받은 날이 아니라, 구원 받았음을 깨달은 날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회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회개하였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거듭났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회개는 구원의 첫 단계가 아니라, 구원을 받은 후 나타나는 열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우리에게 진정한 회개가 없다면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는 뜻이고, 구원을 받지 않았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즉 회개는 구원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회개한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까요? 신앙고백서 2항에서 설명합니다(36쪽). “생명에 이르는 회개로 말미암아 죄인은 다음과 같이 행한다. (1) 자기의 죄가 위험할 뿐 아니라, 더럽고 추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의로운 율법에 위배됨을 느끼게 되고, (2) 그리스도 안에서 회개자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깨닫게 되고 (3) 따라서 자기의 범죄한 것을 비통하게 생각하면서 그 죄를 미워하고 (4) 그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목적은 그가 하나님과 함께 모든 계명대로 행하려는 것이다”
무엇보다 참된 회개를 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가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만약 우리가 나중에 받을 심판이나 형벌이 두려워서 우리의 죄를 회개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런 회개는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는 회개이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양심을 따라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합니다. 하지만 참된 회개는 이런 회개와는 전혀 다릅니다. 무엇보다 참된 회개는 하나님 앞에서 내 죄의 심각성을 분명히 깨닫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시편 51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후에 나단 선지자로부터 책망을 받고 회개하면서 쓴 눈물의 기도이며 시입니다. 그런데 그는 이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51:3~4절입니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4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를 분명히 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죄를 지은 대상은 분명 밧세바와 그의 남편 우리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내가 주께만 범죄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고백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모든 죄가 하나님과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그 어떤 죄도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없습니다. 물론 우리가 일차적으로는 사람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죄가 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며, 모든 만물을 그 뜻대로 다스리는 주관자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어떤 죄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회개는 언제나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더럽고 추악한지를 깨닫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 참으로 가증한 것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들은 회개한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긍휼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오늘날 교회의 불행이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 강단에서 회개하라는 설교가 점점 더 줄어들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제일 큰 교회를 담임하는 목사는 설교 중에 ‘죄’라는 말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대신 ‘부족함’, ‘연약함’으로 대신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죄를 말하고, 죄를 지적하면 성도들이 싫어하고 마음에 부담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용기를 주고 소망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죄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는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 용기를 주고 소망을 주고, 격려를 주는 설교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설교도 분명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도 용기와 소망과 격려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설교도 해야 하지만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도 함께 해야 합니다. 이 또한 성경에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죄를 지적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설교를 하지 않으면 우리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흉악한 죄를 지었는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증한지를 깨달을 때, 우리들은 하나님의 용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죄에 대해 무감각해지면 하나님의 용서와 긍휼도 그저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에 대한 감격은 사라지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복주시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우리의 죄가 얼마나 흉악한지를 제대로 알고, 그래서 하나님이 베푸신 긍휼과 용서가 얼마나 큰지를 분명히 깨닫고 있습니까? 그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는 마음이 있습니까?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다시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고 불만하며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회개를 한 성도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크게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결과 이제는 죄 짓는 것을 슬프게 생각하며, 죄를 미워하게 됩니다. 여러분 참된 회개를 한 성도는 이전에 느끼던 죄의 달콤함이 이제는 역겹게 느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간혹 담배를 끊었다는 성도의 간증을 듣습니다. 저는 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담배가 굉장한 중독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담배 끊은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지독한 사람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어려운 담배를 끊은 성도님이 계신데,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이전에는 담배가 그렇게 달콤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서 끊기로 결단한 후에는 그렇게 달콤했던 담배가 역겨워졌다는 거예요. 담배 연기가 너무 너무 고약해지더랍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멀리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령님의 귀한 역사겠지요.
그런데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전에는 그렇게 즐겁고 재미있었는데, 회개한 후에는 그것이 역겹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래서 죄를 미워하게 되는 것이죠. 저를 포함한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도 죄가 역겨워지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물론 이 일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어떤 죄들은 달콤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항상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을 의지할 때 성령께서 죄의 달콤함을 역겨움으로 바꿔주실 줄 믿습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죄를 미워하게 되고 멀리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죄를 미워하는 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참된 회개의 마지막 열매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것은 죄를 짓는 삶에서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을 뜻합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깨닫고 반성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편 신앙고백서는 회개의 필요성에 대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3항입니다. “회개가 죄에 대한 속상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혹은 죄인이 용서받는 원인도 될 수 없다. 사죄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행위이다. 그러나 회개 없이는 누구든지 사죄를 기대할 수 없을 만큼 회개는 모든 죄인들에게 절대 필요하다” 회개는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일까요? 정답은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입니다.
먼저 어떤 점에서 회개는 구원을 받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가 회개를 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신앙고백서가 가르치는 대로 회개는 우리가 용서받는 근거나 원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뉘우치고 반성한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죄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피로만 씻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회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구원을 받는 데 있어서 회개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회개하는 사람에게 죄 사함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비록 회개 그 자체가 우리의 죄를 없애지는 못하지만 죄 사함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해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그래서 오순절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는 사람들에게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행 2:38)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회개 그 자체에는 죄 사함의 효력이 없지만, 죄사함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그 어떤 죄를 짓더라도 회개하면 용서받을 수 있음을 가르쳐 줍니다. 4항입니다(37쪽). “아무리 작은 죄라도 그 범한 자로 하여금 정죄를 받게 한다. 그와 동시에 아무리 큰 죄라도 그것을 참으로 회개하는 자에게는 정죄를 가져오지 못한다.” 이 세상에 심판을 받지 않는 작은 죄는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큰 죄, 작은 죄가 있을 뿐, 모든 죄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참으로 은혜로운 사실은 우리가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그 죄를 회개한다면 용서를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죄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중한 죄인이라 하더라도 참된 회개를 하면 용서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궁금증을 가지게 됩니다. 그것은 성경이 용서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가령 누가복음 12:10절입니다.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받으려니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하리라”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것은 성령을 통해서 증거되는 복음을 완고하게 거부하고 부정하는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은혜를 성령을 통해 증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부정하고 거부하는 사람의 죄는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죄는 참된 회개를 한 성도가 범할 수 없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회개를 한 성도의 심령에는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에 성령을 모독하는 죄를 지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도는 아무리 큰 죄를 짓는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회개할 때 용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회개에 대해서 함께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참된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가증한지를 꼭 깨닫고, 그래서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가 얼마나 큰지를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결과 죄를 미워하게 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회개함으로 죄 사함의 은혜를 누리며 점점 더 죄에서 멀어지고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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