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3,주일-오후) "성화 2" / 갈라디아서 5:16-17 / 고한율 목사
오후찬양 예배 |
본문 : 갈 5장 16 ~ 17절 |
2017년 7월 23일 |
WCF (32) 성화2 |
찬송가 : 347 장, 191 장
지난 시간에 이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중 하나인 성화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성화는 말 그대로 “거룩하게 되다”는 뜻입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이면서,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단순히 천국에 들여보내려고 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함임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지난주 살펴보았던 레위기 11:45절에 보면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종살이에서 구원하신 이유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하나님이 누구냐 곧 거룩하신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그들도 거룩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자신을 닮은 백성, 즉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화는 구원 그 자체이면서, 구원의 목적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의 중요한 특징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성화는 100%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또한 100% 우리의 책임이라고 했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우리들은 결코 성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성화되기 위해 반드시 중생이 필요합니다. 즉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우리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중생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화는 100%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성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성화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12절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구원은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뤄가야 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원을 이뤄간다고 할 때 바로 성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중생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새 마음과 새 영을 주십니다. 그리고 성화를 이뤄갈 수 있도록 말씀과 성령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고, 말씀과 성령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일에 관심이 없고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성화는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뤄진다고 해도 아주 미미한 정도에 그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화는 100% 우리의 책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성령을 등한시 하고 거룩해 지는 일에 무관심하다면 성화는 절대 이뤄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중에 많은 분들이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월이 지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입니다. 여러분 다른 것은 몰라도 신앙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세월이 지난다고 해서 자연적으로 신앙이 성숙되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제가 심방을 하면서 연세 많은 성도님들에게 제일 많이 듣는 소리가 뭔지 아십니까? ‘나이만 먹었지 신앙생활은 아직 어려요’입니다. 물론 우리 한국 사람들은 남들 앞에서 지나치게 겸손을 떨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는지 모르겠지만, 실제로 그런 경우들이 적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을 오래하였지만 영적으로는 여전히 어린 아이 수준에 머무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시간이 흐른다고 믿음이 저절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어쩌다 보면 내 믿음도 괜찮아 지겠지’ 아닙니다.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성경은 머뭇머뭇 거리지 말고 선택하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당장 성화를 이루기 위해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기로 결단하고, 예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다음부터 해야지’, ‘기회 되면 해야지’ 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지 말고, 지금 당장 시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하게 되는 일, 성화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런 사실을 우리가 꼭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말씀과 성령으로 성화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우리는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을 따라 성화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신앙고백서 13장 2항을 먼저 보도록 하겠습니다(33쪽). “이 성화는 신자의 인격에 전면적으로 작업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아직 금생에는 불완전하여 그의 모든 지체에 부패의 어떤 잔재들이 남아 있다. 거기서 화해 없는 전쟁이 계속 일고 있으니, 육체는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은 육체를 제어하시는 전쟁이다.”
먼저 ‘성화는 신자의 인격에 전면적으로 작업하고 있다’라고 가르칩니다. 이 말은 성화라는 것이 단지 어느 특별한 부분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전인격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성화를 오직 종교적인 모습하고만 연결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즉 성경을 많이 읽는다거나, 기도를 많이 한다거나, 예배에 참석을 잘한다거나, 봉사를 잘한다거나 이런 것만을 성화의 결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물론 이런 모습들 또한 성화의 결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꼭 종교적인 모습에서만 성화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우리가 하는 생각이나, 우리가 하는 말, 그리고 행동 속에서도 성화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에서는 정말 훌륭한 성도인데, 집이나 직장에서는 엉망인 사람은 결코 성화된 사람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화가 아니라 위선에 불과합니다.
성화의 모습은 교회 안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가정과 일터, 우리가 활동하는 세상 한 가운데서 함께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 행동이 변화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로마서 12:1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너희 몸”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몸이란 그야말로 우리의 생각, 말, 행동 모든 것을 다 포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거룩해져야 할 부분이 우리의 전부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평소에 어떤 생각을 많이 합니까?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들을 아무 거리낌 없이 생각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입술은 어떻습니까? 교회만 벗어나면 온갖 상소리를 다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행동은 어떻습니까?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행동입니까?
기도 많이 한다고, 성경을 많이 안다고,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성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화는 우리의 전 인격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입술, 행동이 점점 더 거룩해져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것에서 멀어지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데에 가까워져야 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화되는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의 성화가 전 인격적으로 이뤄져야 하는데, 이것이 한 번에 이뤄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 점이 성화가 칭의나 양자됨과는 완전히 다른 점입니다. 칭의나 양자됨은 즉시 이뤄집니다. 하지만 성화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지속이 됩니다. 그리고 그 완성은 우리가 죽음을 통과할 때 일어나게 됩니다. 이처럼 죽어서 성화가 완성되는 것을 다른 말로 영화(glorification)라고 표현합니다. 영광스럽게 된다는 뜻입니다. 즉 성화의 완성이 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에 이르기 위해서 우리는 평생 성화의 과정을 지나야 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여전히 죄의 부패성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에 ‘머리 없는 닭 마이크’(Mike the Headless Chicken)라고 불리던 닭이 있었습니다. 1945년 9월 양계장을 운영하던 올슨이라는 사람이 늘 하던 대로 닭을 죽이기 위해 어느 닭의 머리를 잘랐습니다. 그런데 머리를 자르면 죽어야 정상인데, 멀쩡이 살아서 움직이는 것입니다. 곧 죽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이 닭은 마치 머리가 있는 것처럼 깃털도 정리하려고 하고, 놀랍게도 모이도 먹으려고 하였습니다. 이 장면을 보고 주인이 죄책감을 느끼게 되어 살아 있을 동안 보살펴 주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없으니까 목으로 바로 먹이를 집어 넣어줬습니다. 그런데 길어야 며칠 살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 멀쩡이 살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 이상한 닭에 대한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게 되었고, 기획사를 하는 사람이 와서 이 닭에게 이름을 지어주고 전국 순회공연을 하자고 제안하였습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 마이크라는 이름이었습니다. 머리 없는 닭 마이크. 이 닭으로 말미암아 주인은 벼락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려 2년을 더 살다가 죽었습니다. 이 때 수많은 양계장 주인들이 마이크와 같은 닭을 기대하고 엄청난 닭의 머리를 쳤는데, 더 이상은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머리가 잘리면 당연히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죽지 않고 이처럼 끈질기게 살아남았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 속에 있는 죄성과도 같습니다. 아무리 죽이려고 해도 다시 살아나서 우리를 괴롭힙니다. 바로 이런 남아 있는 죄성 때문에 우리의 성화가 방해를 받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치열한 전쟁터가 어디인 줄 아십니까? 바로 성도의 마음속입니다.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정욕과 성령이 늘 전쟁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흔히 영적 전쟁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영적 전쟁이 무슨 절에 가서 몇 바퀴를 돈다거나, 어디 무당 집을 돈다든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영적 전쟁터는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육체의 정욕, 죄성이 우리를 죄와 세상 가운데로 계속 끌고 가려고 합니다. 사실 예수 믿기 전에는 영적 전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마음속에 육체의 정욕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이끄는 대로 살 수밖에 없기 때문에 거기에 갈등이라든지 고민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 난 후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부터 영적 전쟁이 시작된 것입니다. 우리 속에 육체의 정욕과 성령님이 같이 있어서 서로 반대 방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 5:16~1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 안에서 육체의 소욕과 성령이 서로 대적함으로 성화가 쉽게 이뤄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우리가 성도임에도 불구하고 육체의 정욕에 완전히 휩싸여서 마치 불신자처럼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고백서 3항의 내용입니다(34쪽). “그 남아 있는 부패성이 이 전쟁에서 대단한 승세를 일시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거듭난 생명은 성화 시켜 주시는 성령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극복한다. 그렇게 되어 성도들이 은혜로 자라나며,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으로 점점 성결을 완성해 가는 것이다.”
신앙생활하면서 죄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치 내가 불신자가 아닌가 의심하는 상태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사람이 중생한 사람이라면 결콘 완전히 넘어지는 법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결국은 죄를 극복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로마서 7장과 8장입니다. 사도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이 성도이면서도 죄에 굴복하여 거의 넘어질 뻔한 이야기를 합니다. 22~24절입니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23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24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바울은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바울이 중생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법이 아닌 다른 법, 즉 죄의 법이 있어서 그것이 바울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바울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절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바울의 이 고백에서 로마서가 끝났다면 로마서는 복음이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이도 7장에서 끝이 아니라, 우리에게 소망을 주는 8장이 이어집니다. 8: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7장에서 너무나 절망스러운 고백을 했던 바울은 8장에서는 완전히 다른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는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하며 절망하였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결코 죄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이 8장에 가서 완전히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결코 죄성을 이길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키신다는 것입니다. 즉 성령님의 능력으로 죄를 이기고 성화를 이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화를 이뤄가기 위해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성령으로 충만입니다. 흔히 성령충만이라고 말하지요. 우리는 성령으로 충만하기를 항상 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들은 죄의 본성을 이기고, 하나님을 닮아 거룩하게 되는 성화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성령충만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성령충만은 어떤 신비로운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무당이 신내림을 받듯이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충만을 풀어서 말하면, 성령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다스리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갈라디아서 5장 말씀에 따르면 언제나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 바로 성령충만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든지, 말하든지, 행동하든지 성령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성령을 따른다고 할 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하기 위해서 성령충만 받기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순종하는 일에 힘쓸 때 성령님께서 더욱 강력하게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말씀을 멀리하고 성령충만에 무관심한다면 우리들은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게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성령을 소멸하는 사람은 결코 성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죄와의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성화를 이뤄갈 수 있을까요? 성령님을 통해서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죄를 멀리하고 미워하게 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함께 기뻐하며 감사함으로 순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항상 성령충만을 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내 힘으로 죄를 이길 수 없음을 알고 겸손히 엎드려 성령충만을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움으로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안에 강력히 역사하실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또한 성령 안에서 항상 기도함으로 성령께서 우리를 항상 도우시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보내신 보혜사, 즉 우리를 돕는 분으로서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성화를 이루기 위해 이와 같은 성령님의 도움이 꼭 필요합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성령충만하여 매일의 영적 전쟁 가운데 승리하며, 그래서 점점 더 거룩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비록 우리의 연약함으로 죄에 넘어질 때가 있더라도, 성령께서 능력 주심을 믿고, 그 힘을 의지함으로 다시 일어나 성화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성령으로 항상 충만하게 하사 거룩하게 만들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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