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6,주일-오후) "성화" / 레위기 11:45 / 고한율 목사
오후찬양 예배 |
본문 : 레 11장 45절 |
2017년 7월 16일 |
WCF (31) 성화 |
찬송가 : 341 장, 455 장
우리는 계속해서 구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칭의를 살펴보았고, 양자됨을 살펴보았습니다. 칭의는 비록 우리가 죄인이지만 의로우신 재판장인 하나님께 무죄 선고를 받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죄인임에도 유죄 판결이 아닌 무죄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얻으신 의를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 오셔서 모든 율법을 순종하심으로 의를 얻으셨고, 또한 십자가 죽음을 통하여 의를 얻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얻으신 이 의를 우리의 것으로 간주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죄파결을 내리신 것입니다. 이것을 칭의, 의롭게 칭한다는 것입니다.
이 칭의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금도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배는 하나님 앞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까? 오직 의인만 나올 수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께 나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배드리는 저와 우리들은 모두 의인이라서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 앞에 모여서 이렇게 예배를 드립니까? 칭의의 은혜 때문입니다. 죄인이지만, 하나님께서 의인으로 보시기 때문에 이렇게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뿐만 아니라, 말씀과 기도, 봉사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도 바로 칭의의 은혜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이 우리에게 “네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이렇게 예배 하느냐? 너는 망할 죄인이다”라고 고발할 때 우리들은 이 칭의의 은혜를 힘입어 사탄을 물리쳐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죄인일지라도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인정함을 받았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받은 구원, 칭의입니다.
그리고 양자됨이 구원이라고 했습니다. 양자됨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의미 중 하나는 우리가 상속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러니까 구원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지옥 가야 하는데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상속자로 삼으셔서 하나님의 모든 영광과 부요함을 누리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분명히 알고 세상의 헛된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 안에 있는 부요함과 풍성함을 항상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하늘 아버지가 되심을 믿고 걱정하고 염려하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 양자됨입니다.
오늘은 성화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화는 말 그대로 거룩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거룩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오늘 읽은 레위기 11:45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게 하려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 구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거룩한 하나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떤 백성이 되어야 마땅할까요? 거룩한 백성입니다.
이것을 종합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하신 이유는 자신을 닮은 거룩한 백성으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자꾸 우리 입장에서만 생각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지옥에 가야 하는데, 천국에 가게 되었다 정도로 구원을 이해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구원은 단지 우리를 죄에서 끌어내어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자신을 닮은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해해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왜 율법을 주시고, 성막을 주시고, 또한 광야 40년의 시간을 허락하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구원이 그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라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과 성막을 주실 필요도, 광야에서 40년 동안 지내게 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저 애굽에서 가나안 땅까지 가장 빠른 길로 인도하셔서 들어가게 하시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 나라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율법을 주셨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성막을 주셨고, 또한 광야 40년을 통하여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목적이 단순히 가나안 땅, 천국에 들어가는데 있지 않고, 하나님을 닮은 백성을 만드는데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성화를 구원이라고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인데, 성화, 즉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힘쓰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화를 구원의 은혜로 보기 보다는 구원받은 우리들이 맺어야 할 열매 정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은 구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리가 이뤄가야 할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12절에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구원을 어떻게 하라고 말씀합니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합니다. 구원은 받는 것이지만, 또한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을 이룬다고 할 때 바로 성화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앞서 살펴본 칭의나 양자됨은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칭의나 양자가 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성화는 다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우리 힘이나 노력으로 성화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성화도 분명 구원의 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루십니다. 좀 헷갈리죠? 방금은 우리가 이루어야 한다고 했다가 다시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하니 참 헷갈립니다. 하지만 이것이 성화의 특징입니다. 성화를 간단히 말하면 “100% 하나님의 은혜이고, 100% 인간의 노력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절대 50% 하나님의 은혜, 50% 인간의 노력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화를 이루십니다. 이런 점에서 100%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또한 성화는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런 점에서 100% 인간의 노력입니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이 누구신가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100% 하나님이고, 또한 100% 인간이라고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분명 예수님은 참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또한 참 인간이기도 합니다. 만약 50% 하나님, 50% 인간이라고 말하면 이단이 됩니다. 신비이지요. 성화도 이런 점에서 보면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좀 더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3장 1항 첫 부분을 같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33쪽).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고 중생된 자들은 새로 지어 주시는 마음과 영을 소유하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그들이 실제로 개인 인격적으로 성화되어 간다. 그들이 받는 이 성화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공덕으로 인하여 이루어가게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과 및 그들 안에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실현된다.”
효과적인 부르심을 받고 중생된 사람들은 새로 지어주시는 마음과 영을 소유하게 됩니다. 중생은 다시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전적인 부패 가운데 있던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옛 사람으로 있을 때는 죄를 항상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선을 행할 능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을 나오지 못하는 것처럼 예수님을 믿기 전 우리들은 죄 가운데서만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후 우리들은 죄의 바다에서 건짐을 받게 됩니다. 죄를 안 지을 수 있게 되었고, 선을 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가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결단코 우리의 힘이나 노력, 다짐으로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선하게 살기 위해서 온갖 고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을 수련하기 위해 수년 동안 누워서 자지 않고 서서 자거나 앉아서 잔 분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분들은 수년 동안 혼자 지내며 명상만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노력하고 애쓰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변화되는 것은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사람 자체가 변화되지 않고는 불가능합니다. 예레미야 13:23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구스인이 그의 피부를, 표범이 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느냐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여기서 구스인은 흑인을 말합니다. 흑인이 노력하고 힘쓴다고 그 피부색을 바꿀 수 있습니까?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표범이 그 몸의 반점을 변하게 할 수 있습니까? 표범으로 태어난 이상 반점은 어쩔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어떤 노력을 해도 하나님 앞에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화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거듭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고백서는 우리가 성화되는데 가장 중요한 수단들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거룩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고, 어떻게 해야 거룩하게 되는지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말씀대로 살게 하심으로 거룩을 이루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힘써야 할 부분이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새 마음과 영을 소유하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주시고 성령을 주셔서 거룩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말씀 듣기를 거부하고, 성령의 인도 받기를 거절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물론 우리가 이처럼 한다고 해서 성화가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성화는 그 속도가 매우 느려질 것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모든 성도들의 신앙성숙이 다 다릅니다. 여러분 교회 오래 다녔다고 해서 반드시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교회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신앙이 반드시 어린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처럼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화의 속도는 말씀과 성령께 순종하는 우리의 모습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그래서 억지로 말씀 듣게 하거나, 억지로 기도하게 하거나, 억지로 예배드리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나태해 져도 하나님께서 즉시 우리를 다그쳐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하지 않습니다.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님과 관련해서도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갈라디아서 5:16절에 보면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강권적으로 우리를 이끄시지 않습니다. 마치 무당이 귀신에 씌여서 귀신이 말하는대로 말하고, 하라는 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힘써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라 살려고 힘쓸 때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십니다. 성령님이 억지로 우리를 이끌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죽하면 성경에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무시하고,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신 성령님을 그렇게 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성령을 소멸하는 일들을 행하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 성령의 음성을 일부러 거절함으로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은 강제적으로 우리를 어떻게 하지 않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화를 이루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화를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화를 이룬다고 할 때 그 내용은 무엇일까요? 1항의 두 번째 부분을 보겠습니다(33쪽). “성화의 내용은 그들에 대한 죄악의 지배 관계가 전체적으로 멸절되고 그들의 여러 가지 정욕이 점점 더 약화되어 죽어 가는 동시에 그들이 구원에 이르도록 하는 모든 은혜로 말미암아 점점 더 생명과 힘을 얻게 되어, 점차 그들의 실생활에 성결이 이루어진다. 이런 성결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점점 더 거룩해질수록 죄악의 지배와 우리 마음속에 있는 악한 정욕이 점점 더 약해집니다. 이전에는 맥없이 죄에 끌려 다녔는데, 지금은 말씀을 통해 죄를 분명히 알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것을 멀리하고 끊게 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우리의 평생에 거쳐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말 구원을 받았다는 가장 분명한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가 점점 더 거룩해 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죄를 아예 안 짓게 된다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죄와의 싸움은 우리가 죽음을 맞을 때까지 끝나지 않습니다. 다만 운동선수가 시간이 지날수록 근육이 생기고 힘이 커져서 운동을 더욱 잘할 수 있게 되듯이, 우리 또한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가 분명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아주 빠른 속도로 신앙이 성숙해 가는 분이 있는 반면, 모태신앙인처럼 눈에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느리게 성숙해 가는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구원받은 성도라면 반드시 성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가 신앙을 점검할 때 나의 삶에 성화의 증거가 조금이라도 없다면 우리는 아주 심각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자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실제로 아이가 자라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는 뜻입니다. 성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성도의 삶에는 분명 성화의 증거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고백서는 성결이 없으면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거룩하게 되는 성화는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거룩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우리를 거듭나게 하셔서 새 영과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우리에게 주셔서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사람이 되기를 소원하는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죄를 미워하고 죄를 미워하며, 하나님의 뜻에 항상 순종함으로 거룩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말씀과 기도로 성령님을 온전히 의지할 때 성령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매일의 삶이 점점 더 거룩하신 주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이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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