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9,주일-오후)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 / 사사기 7:1~8 / 고한율 목사
안수집사 헌신예배 |
본문 : 삿 7장 1 ~ 8절 |
2017년 7월 9일 |
하나님이 원하시는 헌신 |
찬송가 : 313 장, (헌금) 213 장, 425 장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을 헌신된 성도라고 부릅니까? 남들보다 더 열심히 봉사하는 성도, 더 많은 물질과 시간을 바치는 성도, 더 열정적으로 일하는 성도, 이런 분들을 우리는 흔히 헌신된 성도라고 부릅니다. 즉 헌신을 열심과 크기, 열정과 비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들이 크면 클수록 더 헌신적인 것이고, 이런 것들이 적으면 적을수록 덜 헌신적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헌신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지 열심과 크기, 열정만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헌신의 방향입니다. 즉 무엇을 위해 헌신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가령 우리가 지금 대전을 가려고 합니다. 이 때 이용할 수 있는 이동수단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자동차, 기차, 비행기입니다. 이 세 가지 중 가장 빠른 것은 당연히 비행기이고, 그 다음 기차(KTX)이고, 마지막이 자동차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타시겠습니까? 이왕이면 가장 빠른 비행기겠죠.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비행기와 기차는 모두 강릉으로 가는 것이고, 가장 느린 자동차만 우리가 가려는 대전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타시겠습니까? 당연히 자동차입니다. 자동차가 아무리 느리다 하더라도 우리가 가려는 목적지로 데려다 주는 것이 이것 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을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동수단을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빠르냐, 얼마나 편리하냐? 얼마나 저렴하냐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도 당연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가느냐입니다. 아무리 비행기가 빠르고 편리하다 하더라도 내가 원하는 대전이 아니라, 강릉으로 간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른 무엇보다 방향이 중요합니다.
헌신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방향이 가장 중요합니다. 얼마나 열심히 하느냐, 얼마나 많이 하느냐, 얼마나 열정적으로 하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방향이 잘못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대전이 목적지라면 아무리 빠르고 편리하더라도 강릉 가는 비행기를 타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교회 역사를 보면 헌신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가령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이 그런 잘못된 헌신을 가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 바울은 교회와 성도를 핍박하는 일에 가장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빌립보서 3:6절에 보면 바울이 자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바울은 자신이 열심을 가지고 교회를 박해했다고 고백합니다. 즉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헌신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이 헌신을 기쁘게 받으셨을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방향이 잘못된 헌신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잘못된 헌신은 오늘날 이단에 속한 사람들 속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주나 그가 따르는 단체를 위해서 부모를 버릴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부모를 고소 고발하는 일까지도 벌어집니다. 열심을 따지자면 이보다 더 헌신적일 수 없겠지요. 하지만 방향이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헌신은 결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완전 잘못된 헌신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극단적으로 잘못된 헌신은 아니지만, 교회 안에서도 방향이 잘못된 헌신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헌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것을 드립니다. 그런데 그 목적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자신에게 있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헌신된 성도인지를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하는 헌신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나 자신을 위한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쉬운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어떤 일을 열심히 했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인정해 주지 않을 때 어떤 마음이 드는가를 통해서입니다.
만약 내 마음이 섭섭하고, 그래서 더 이상 열심히 하지 말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든다면 그 헌신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다면 사람이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는 그리 큰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에 섭섭한 마음이 들고, 그래서 일할 의욕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의 헌신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에 불과한 것입니다.
또 우리는 농담 비슷하게 이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써 주지 않으면 하나님 손해지 내 손해인가?” 이 말 속에는 마치 하나님께서 나를 꼭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이 나 없이는 일을 못하시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방향이 잘못된 헌신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는 방향이 올바른 헌신은 어떤 헌신일까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이야기입니다. 사사 기드온이 300명의 군사를 데리고 13만 5천명의 미디안 대군을 이긴 내용입니다. 사실 300명이 13만 5천명, 무려 50배 가까이 많은 대군을 이길 수 있는 것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 오늘 말씀의 중요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기드온이 이끈 군대가 처음부터 300명의 군사로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보다 100배 많은 3만 2천명의 군사였습니다. 물론 13만 5천명의 미디안 대군에 비하면 3만 2천명의 군사는 여전히 적은 숫자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해 볼 수 있는 숫자이기도 했습니다. 한 명의 군사가 5명의 적군을 물리치면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이죠.
하지만 전쟁 역사상 가장 황당한 명령이 하나님으로부터 기드온에게 내려왔습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기드온에게 이르시되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내리신 명령은 네 군사가 적으니 내가 더 많이 보내주겠다가 아니었습니다. 정확히 그 반대였습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네 군사가 너무 많다고 하셨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하나님의 수학은 우리의 수학과는 전혀 다른 것 같습니다. 13만 5천명과 3만 2천명 누가 봐도 3만 2천명이 터무니없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너무 많다고 하십니다. 우리의 계산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쨌든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무 많다고 하시면서 3만 2천명의 군사 중에서 전쟁이 두려운 사람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는 명령을 내리게 합니다.
참 낭만적인 명령이 떨어진 것입니다. 세상에 전투를 바로 코앞에 두고 무서운 사람들은 집에 돌아가라니요? 그것도 우리가 도저히 이길 수 없는 대군을 앞에 두고 두려운 사람은 모두 돌아가라니요? 있을 수 없는 명령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그 결과 3만 2천명의 군사 중 무려 2만 2천명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입니다. 결국 3만 2천명의 군사가 1만 명으로 줄어들었습니다. 이제 13만 5천 대 1만, 1대 13의 전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기가 막힌데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직도 많다”였습니다. 기드온이 정말 황당했을 것입니다. 우리의 계산과 하나님의 계산이 틀려도 너무 틀린 것이죠. 적군이 13배나 많은데도 하나님은 우리가 여전히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군사들이 물가에서 물을 먹는 모습을 보고 그 수를 줄이기로 했습니다. 1만 명의 군사 중 9천 7백 명이 물가에서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고, 나머지 300명은 손에 물을 담아 마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중 300명을 선택하셨습니다. 기드온에게 이들과 함께 미디안과 싸우러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300명을 뽑으실 때 그냥 뽑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특별한 자질을 보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다른 군사들처럼 무릎을 꿇지 않고 손으로 움켜서 물을 먹었는데, 이것은 군인의 가장 중요한 임무인 주변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아무나 300명을 뽑은 것이 아니라, 특공대처럼 아주 용맹한 용사 중의 용사를 뽑은 것이라고 어떤 사람들은 주장합니다. 하나님은 오합지졸의 많은 군대보다 잘 훈련된 소수의 특공대를 사용하신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주장은 근거가 약합니다. 하나님은 물을 어떻게 먹느냐를 보신 것이 아니라 어느 쪽이 숫자가 더 적은 지를 주목하여 보셨습니다. 하나님께 중요한 것은 훈련된 특공대가 아니라, 적은 숫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방금 읽은 2절에서 본 것처럼 이스라엘이 많은 숫자로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하면 마치 자신들이 잘해서 승리를 얻은 것처럼 자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승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인데 마치 자신들이 잘해서 승리를 얻은 것처럼 착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런 착각을 아예 하지 못하도록 300명의 군사만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헌신의 올바른 방향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께 헌신을 한다고 할 때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하나님만으로는 안 되니까 우리를 불러서 같이 돕도록 한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큰 착각입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을 지금도 다스리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우리의 도움이 꼭 필요한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을 스스로의 능력으로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혼자 다 하실 수 있는 데 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왜 우리가 헌신하기를 원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의지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가령 저에게 딸아이가 있는데, 어렸을 때 함께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물론 딸아이가 어렸기 때문에 제대로 그림을 그리지 못했습니다. 선도 삐뚤삐뚤, 색깔도 제대로 칠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딸과 같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사실 함께 그린다고 했지만 제가 거의 다 그린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만 생각하면 함께 할 이유가 없습니다. 제가 혼자 하는 것이 훨씬 더 편하고, 더 나은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딸아이와 함께 그림 그리는 것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림을 그리는 것을 통해 아빠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더 친해지고 싶었던 것이죠. 하나님께서 혼자 일하지 않으시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헌신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도움이 꼭 필요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홀로 모든 일을 완벽하게 이루실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부르십니다.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헌신을 하게 하는 목적은 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무리 잘 해도 하나님이 하신 일에 보탬이 될 수 없습니다. 제 어린 딸아이와 함께 그림을 그리면 엄밀하게 말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망치는 것에 가깝습니다. 우리가 그렇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할 때 도움이 되기는커녕 망칠 때가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를 기쁘게 부르십니다. 헌신하라고 하십니다. 일이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일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헌신을 통해 무엇을 얻으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하는 일이 아닌,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가 변화되기를 바라십니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믿고, 의지하는 우리가 되기를 바라십니다. 바로 이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부르시고 일하게 하시며 헌신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디안 군사 13만 5천명을 그냥 물리치실 수 있었습니다. 굳이 기드온과 300명의 군사를 사용하실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사용하신 까닭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보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미디안 군대를 물리치는 그 일 자체가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며, 의지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헌신의 올바른 방향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들은 주님의 일에 헌신을 한다고 할 때 마치 우리 힘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드린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내 도움 없이는 일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일하면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교회 안에서 내 목소리도 커지게 됩니다. 마치 내가 대단한 사람이 된 것처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오늘날 교회 안을 보면 헌신을 잘한다고 하는 사람일수록 권위적이고 사나운 것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헌신을 하나님께 받은 권위나 자랑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방향의 헌신을 한 결과일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올바른 방향의 헌신을 하였다면 우리는 절대 권위적이거나 사나울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과 부족함을 철저하게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의지하는 그런 겸손한 모습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헌신하면 할수록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임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올바른 방향의 헌신을 한 성도가 어떤 고백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사도 바울은 모든 사도보다 자신이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그야말로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이처럼 헌신한 것은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헌신의 참된 의미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 대신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를 높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헌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겸손히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방향의 헌신을 한 결과입니다.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안수집사님들과 우리 모두가 이러한 헌신의 참된 의미를 분명히 깨닫고, 주님의 일에 항상 헌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헌신할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더욱 의지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헌신하는 우리를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헌신의 자리로 불러주셔서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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