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2,주일-오후) "신앙고백서(30) 양자됨" / 갈 4:4~5 / 고한율 목사
오후찬양 예배 |
본문 : 갈 4장 4 ~ 5절 |
2017년 7월 2일 |
WCF (30) 양자됨 |
찬송가 : 337 장, 40 장
여러분 구원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교회에 가면 구원을 받는다는 데 구원이라는 것이 뭐요?” 라고 묻는다면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물론 맞는 대답입니다. 구원은 천국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100% 정답이기는 하지만, 충분한 대답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훨씬 더 풍성한 내용을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바울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은 사도였습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사도만은 아니었지요. 이것만으로 불충분합니다. 바울은 선교사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목회자였습니다. 바울은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역에 있을 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가죽을 가지고 물건을 만들 수 있는 기술자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율법에 능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정통 히브리어를 할 줄 아는 히브리인이었습니다. 또 바울은 부모님으로부터 로마시민권을 부여받은 로마시민이었습니다.
우리가 보통 바울을 사도로만 알고 있지만, 이처럼 바울은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목회자, 가죽 기술자, 바리새인, 정통 히브리인, 로마시민 등 바울이라는 사람을 설명하려면 이처럼 많은 설명들이 필요합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단지 천국에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 훨씬 더 많은 설명을 해 주고 있습니다. 가령 구원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살펴본 것처럼 구원은 믿음으로 의롭게 칭함을 받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은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구원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풍성히 누리기 위해서는 구원이 무엇인지를 성경을 통해 배워야 합니다. 구원을 단지 천국 가는 것만으로 이해하면 그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이것은 마치 뷔페에 간 어린 아이가 김만 실컷 먹고 나오는 경우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떤 아이도 아주 어렸을 때 뷔페에 가면 밥에다 김만 싸 먹고 올 때가 많았습니다. 산해진미가 눈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직 밥과 김만 먹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구원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풍성한 신앙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신앙고백서를 통해 구원이 무엇인지를 잘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살펴볼 신앙고백서는 제12장 양자됨입니다. 우리는 지난 시간을 통해 칭의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양자됨은 칭의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구원의 은혜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양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내용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신앙고백서 12장 첫 문장을 같이 읽겠습니다(32쪽).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 분 때문에 의롭다 함이 된 모든 자들로 하여금 양자 되는 은혜에 참여케 해 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의롭다 하는 은혜, 즉 칭의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칭의는 비록 우리가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는 것이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죄인인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재판장에서 무죄판결을 받습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그런데 구원은 칭의만이 아닙니다. 칭의를 받은 우리들은 또한 양자가 되는 은혜에 참여하게 됩니다. 여기서 양자란 원래 아들이 아닌데, 아들로 입양되는 것을 뜻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의 자녀로 입양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단지 우리 죄를 속량하는 것뿐만 아니라,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즉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 삼기 위해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을 통해서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12절에 보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서 천국에 가고, 또한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상속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로마서 8:17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상속자가 무슨 뜻입니까? 그 부모의 유산을 받는 자녀를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곧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가장 잘 알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 이야기입니다. 한 부자 집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망나니였습니다. 그는 빨리 독립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가서 나중에 주실 유산을 미리 줄 수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이것은 정말 폐륜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멀쩡히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는 것은 아버지가 어떻게 되든 아버지 재산만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을 끔찍이 사랑하는 아버지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거액의 유산을 미리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둘째 아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외국으로 가버립니다. 자신의 꿈을 펼칠 때가 왔다고 생각하고 거침없이 행동하였습니다. 하지만 큰돈을 가진 미숙한 젊은이가 보통 그러하듯이 이 둘째 아들도 유흥을 즐기느라 돈을 다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빈털터리가 되니까 그 많던 친구들도, 사람들도 모두 떠났습니다. 당장 먹을 한 끼를 걱정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고된 일을 해야 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싫은 돼지 치는 일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고도 먹는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돼지의 사료인 쥐엄열매를 먹었는데, 그마저도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비참한 신세가 된 것입니까? 상황이 이렇게 되자 둘째 아들은 지난날들을 추억했습니다. 아버지 집에서 부요하게 살았던 때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아버지 집에 있는 종들이 얼마나 풍성하게 사는지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리게 되지요. 아버지에게로 다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지만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감히 아들로 돌아가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이 아닌 종으로 들어가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집으로 어려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집 근처에 왔는데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바로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집을 나간 이후로 매일 집 밖에 나와 아들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멀리 아들이 오는 것을 보고는 달려왔던 것이죠. 아버지를 만난 아들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버지는 아들이 뭐라고 말하는지 전혀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대신 종을 시켜서 아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새 신을 신겼습니다.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다가 잔치를 열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손에 가락지를 끼었다는 것은 매우 의미 있는 행동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이 자신의 아들이라는 징표가 되기 때문입니다. 즉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를 종이 아닌 아들로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 상속자가 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이 탕자 이야기는 사실 아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처음 창조되었을 때 아담은 하나님이 만드신 복된 세상에서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마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에서 풍성한 삶을 살았던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뱀의 유혹을 받고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지요. 이것은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요구한 것과 같습니다.
왜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까요? 뱀이 뭐라고 유혹했습니까?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처럼 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죄의 근원입니다. 죄는 단순히 나쁜 짓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없이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내 힘으로 사는 것이 바로 교만이고 죄의 뿌리입니다.
둘째 아들이 왜 유산을 요구했습니까? 아버지를 떠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기 힘으로 살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치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던 것처럼 둘째 아들은 유산을 받아 아버지로부터 독립을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들이 바라는 대로 되었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 나서 하나님처럼 되었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고, 하나님으로부터 단절되었습니다. 그 결과 죽음이 들어왔고,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를 떠난 둘째 아들이 결국 돼지를 치며 쥐엄 열매도 없어서 쫄쫄 굶은 상황과 같습니다.
이처럼 아담 이야기가 곧 탕자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런데 탕자 이야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죄인이 구원받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개라고 합니다. 회개는 지금까지 온 길이 잘못 된 것인 줄 알고 완전히 돌아서서 바른 길로 가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이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아버지께로 다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그런데 회개하여 다시 돌아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었습니까? 둘째 아들은 종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종이 아닌 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종이 아닌 아들로 받아들였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아버지를 떠나기 이전 아버지의 모든 것을 소유했던 때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상속자의 의미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천국 입장표를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고, 그것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에베소서 1:18~19절입니다.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의 이 기도를 요약하면 이런 말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 것이 얼마나 풍성하고 복된 것인 줄을 알게 하소서.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분의 상속자가 됩니다. 즉 하나님의 풍성함이 바로 우리의 풍성함입니다.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들을 절대 버리지 않으십니다. 이사야 49:15절에 보면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아이를 낳은 어머니는 결코 아이를 잊지 못합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같이 울어도 어머니는 자기 아이의 울음소리를 알 수 있다고 하지요. 그만큼 사랑합니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가 혹 자기 자식을 잊는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자녀 된 우리들을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얼마나 은혜입니까? 우리가 이 사실을 분명히 믿는다면 아무리 큰 어려움과 고난이 와도 결국은 이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지 않는다면 어찌 이 세상의 것들이 우리를 완전히 넘어뜨릴 수 있겠습니까?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을 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다만 징계할 뿐입니다. 사랑의 매로 우리를 고치십니다. 이것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누리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은 자녀인 우리들을 항상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주십니다. 부모가 능력이 있는데도 자녀를 굶기는 경우는 절대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주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면 어찌 우리가 굶을 것을 걱정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마태복음 6장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 이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이런 미물보다 훨씬 귀한 너희를 하나님께서 먹이시고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이며,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것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기도는 더욱 담대해 질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께 부탁을 드리는 기도가 아닌 자녀로서 부모에게 당당히 요청하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는 더욱 더 담대하게 주님의 뜻을 행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녀를 하나님이 결코 망하게 놓아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반드시 흥하게 만드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분명히 알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특권을 누릴 뿐만 아니라,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자녀가 보여야 할 마땅한 모습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명예를 위해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가 어떤 일을 하고 그 영광을 부모에게 돌릴 때 얼마나 감격스럽습니까? 우리 하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특권을 누릴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아버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목적이며, 우리가 복되고 풍성한 삶을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하나님 자녀의 특권과 의무를 잘 깨달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한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내용을 잘 정리한 신앙고백서의 나머지 내용을 읽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32쪽). “따라서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수효에 들게 되어 자녀된 자유와 특권을 누리며, 그들 위에 하나님의 이름이 기록되었고, 양자의 영을 받아 담대히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며, 불쌍히 여김이 되어, 보호를 받아, 필요한 것을 공급받으며, 아버지의 사랑으로 징계를 받지만, 결코 버림받지 않으며,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아, 약속을 기업으로 누리되, 영원한 구원의 후사(상속자) 자격으로 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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