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25,주일-오전) "위로부터 난 지혜" / 약 3:13-18 / 고한율목사
주일 1,2부 예배 |
본문 : 약 3장 13 ~ 18절 |
2017년 6월 25일 |
야고보서 강해(13) 위로부터 난 지혜 |
찬송가 : 1 장, 15 장, 452 장, 54장 // 교독문 61번
한국교회 역사 안에는 그야말로 별처럼 빛나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많이 계십니다. 그 중에 한 명이 손양원 목사님입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금은 한센 병이라고 불리는 나병 환자들을 보살폈던 분이셨습니다. 여수에 있는 애양원이라는 곳에서 수백 명의 나병환자들을 그야말로 가족처럼 돌보셨습니다. 그런데 1948년에 애양원이 있는 여수에서 여수순천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때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하였습니다. 이 때 목사님의 두 아들인 동인, 동신 군도 함께 희생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고등학생이었던 두 아들의 죽음은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러나 손양원 목사님은 두 아들의 장례식을 마칠 때 조문을 온 사람들 앞에서 그 유명한 ‘열 가지 감사’를 말하였습니다. 그 중 몇 가지만 말씀드리면 이렇습니다. (1)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6) 미국 유학 가려고 준비하던 내 아들,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내 마음이 안심되어 감사합니다. (7) 나의 사랑하는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 실제로 두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손양원 목사님은 용서하고, 그의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안재선은 신학공부까지 하였고, 현재 안재선의 아들이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9) 이 같은 역경 중에서 이상 8가지 진리와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기쁜 마음, 여유 있는 믿음 주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손양원 목사님의 10대 감사를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아마도 두 가지 생각이 드셨을 겁니다. 하나는 이렇게 대단한 믿음의 사람도 있구나. 정말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다. 다른 하나는 나는 절대로 이렇게 못하겠구나.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저는 또 한 명의 사람을 더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 분은 한국 의학계에서도 별과 같이 빛나는 훌륭한 의사이자 신앙인입니다. 바로 부산 복음병원의 원장이셨던 장기려 박사입니다. 장기려 박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할머니의 영향으로 평생 믿음의 삶을 사셨습니다. 그는 의대에 진학하면서 “제가 의사가 되면 의사를 한 번도 못보고 죽어가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뒷산 바윗돌처럼 항상 서 있는 의사가 되겠다”고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가 드린 기도처럼 평생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는 의사가 되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간 연구의 권위자였습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풍족한 가운데 인정받으며 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가난한 환자를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난 후 장기려 박사는 뜻 맞는 사람들과 함께 부산에서 무료 천막병원을 열었습니다. 이 병원이 지금의 복음병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환자 중에는 치료비를 낼 형편이 못되는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장기려 박사는 자신의 월급에서 대신 치료비를 내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병원운영까지도 힘들어지게 되고, 결국 병원에서 회의가 열려 장기려 박사가 임의로 무료진료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장기려 박사는 어려운 환자가 나타나면 치료를 다 한 후에 한 밤 중에 병원 뒷문을 열어주어 도망치게 해 주었다고 합니다. “당신이 가장인데 가서 일해야 가족들이 먹고 살 것이 아니냐” 하며 도망치도록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장기려 박사가 머물렀던 집은 복음병원 본관 7층 옥탑방이었습니다. 약 20평 되는 곳에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사 중 한 사람으로 얼마든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 수 있었지만, 그는 가난한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바쳤습니다. 참으로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한 훌륭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장기려 박사의 삶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앞서 말씀드린 손양원 목사님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두 가지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첫째는 정말 대단한 믿음이다. 둘째는 나는 절대 그렇게 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위대한 신앙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 감동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나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것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삶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옳다는 생각은 들지만, 실제로 그렇게 살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상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런 우리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들은 인생이 꽤 복잡하여서 생각해야 할 것도 많고, 따져야 할 것도 많다고 말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삶이 두 종류의 길 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마태복음 7:13~14절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14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예수님은 모든 인생이 가는 길이 두 길밖에 없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좁은 문을 통하여 가는 좁고 협착한 길이고, 다른 하나는 큰 문을 통하여 가는 넓고 편한 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이 그리 복잡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가는 길은 두 길 가운데 하나입니다. 좁고 불편한 길을 가든지, 아니면 넓고 편한 길을 가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아주 단순하지요.
그러면 좁고 불편한 길은 무엇이고, 넓고 편한 길은 무엇일까요? 초대교회에 새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세례를 받으려는 사람을 교육하기 위한 책이 있었습니다. ‘디다케’라는 책인데, 디다케는 ‘교훈’이라는 뜻입니다. 이 디다케는 ‘열두 사도의 교훈’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디다케는 오늘날로 하면 새신자 교육용 책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책은 이런 말로 시작됩니다. “두 길이 있는데, 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사용하지요.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처음 믿은 신자에게 바로 인생에 있어서 두 가지 길이 있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두 길 중 하나는 생명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사망의 길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어떤 길로 가야 한다는 뜻입니까? 당연히 생명의 길이지요. 그러면서 생명의 길이 어떤 길인지를 설명합니다. 전부를 다 말씀드릴 수 없지만 핵심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여러분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른 사람에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저주하는 사람들을 축복하세요. 여러분의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십시오.”
사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7장에서 가르친 산상수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고 불편한 길, 그러나 생명의 길은 예수님께서 주신 산상수훈을 순종하는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상수훈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를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고, 오른쪽 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쪽 뺨을 돌려주는 것,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좁고 불편한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주 적은 사람만이 이 길을 간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길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영생의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길이 아무리 험하고 불편하고 어려워도 우리는 반드시 이 길로 가야 합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탄만 해서는 안 됩니다. 감탄만 하고는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 수 없어, 그렇게 살다가는 이 세상에서 망할 수밖에 없어”라고 말하면서 뒤로 물러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한 그 말씀에 따라 산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서 그저 감탄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직 두 가지 길만 말씀하셨습니다. 좁고 불편한 길이지만 생명을 얻는 길과 넓고 편하지만 멸망당하는 길, 두 길밖에 없습니다. 적당히 이 두 길을 섞어 놓은 길은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에게 제일 먼저 두 가지 길에 대해 설명했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해도 넓고 편한 길을 선택하여 가는 사람은 결국 멸망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좁고 불편하더라도 생명을 얻는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이 있는데, 멸망의 길이 아닌 생명의 길을 선택하게 하는 것, 이것을 성경은 지혜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혜를 반대로 생각할 때가 많지요. 좁고 불편한 길에서 넓고 편한 길로 가도록 하는 것을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참된 지혜는 그저 우리 몸을 편하게 만들고, 풍요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우리 몸이 편하고 풍요로워진다고 해도 결국 그 끝이 멸망이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참된 지혜는 우리가 생각하는 지혜와는 반대로 넓고 편한 길로 가려는 우리들을 끊임없이 깨우쳐서 좁고 불편한 길, 그러나 생명을 얻는 길로 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가 있는 성도는 그 삶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는 모습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보세요.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어떤 사람이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까?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이는 사람입니다. 말이 조금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선행이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기서 선행이란 더 정확하게 “선한 삶의 방식”이라는 뜻입니다. 단순히 착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사는 방식, 스타일, 길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다시 말하면 여기서의 선행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고 불편한 길을 뜻하는 것입니다. 지혜란 무엇입니까? 그 사람이 좁고 불편한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이것이 그 사람이 지혜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안에서 어떤 성도가 지혜 있는 성도입니까? 목소리가 커서 무엇이든 주장하는 대로 되게 하는 성도입니까?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고치도록 하는 성도입니까?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든 자기는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 성도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을 지혜 있는 성도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렇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반대로 말씀합니다. 자신이 손해 볼 것을 뻔히 알면서도 전체를 위해 묵묵히 희생하는 성도, 다른 사람의 허물을 드러내기보다 사랑으로 덮어주는 성도, 내 의견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에 더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성도, 나를 억울하게 하는 사람에게 복수하지 않고 오히려 기도해 주는 성도, 상대방의 미숙함을 참아 줄 수 있고, 곁에서 묵묵히 인내하며 격려해 줄 줄 아는 성도, 나를 높이기보다 옆에 있는 사람을 더 높이기를 힘쓰는 성도. 예수님은 이런 성도가 참으로 지혜롭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이런 성도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하지요. 왜냐하면 세상의 관점으로 봐서는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는 세상의 지혜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14~16절입니다.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야고보는 세상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두 단어로 요약했습니다. 바로 시기와 질투입니다. 이 시기와 질투는 세상의 지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세상의 지혜는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무엇입니까? 나에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이 가졌을 때 그것을 질투하여 결국 빼앗는 것입니다. 시기와 질투는 상대방보다 나를 더 사랑할 때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지혜로 사는 것이 곧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넓고 편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왜 넓고 편합니까? 내 중심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다퉈서라도 얻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교회를 다닌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합니다. 제가 군에 있을 때 재미있는 현상을 하나 보았습니다. 군대 안에 교회가 있었는데, 제가 쫄병일 때는 사령관이 불교신자였습니다. 그래서 교회에 별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사령관이 교체가 되었는데, 믿음이 좋은 안수집사님이 사령관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주부터 부대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교회가 엄청나게 부흥했습니다. 부대에 있는 많은 간부들이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 것입니다. 평소에는 얼굴 보기도 힘든 사령관이 교회에 가면 같이 식사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넓고 편한 길을 가는 것이죠. 하나님을 위하여 교회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이용하기 위해 나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로 가고 계십니까? 오로지 자기를 위하여 살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참된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참된 지혜가 있다면 우리는 결코 넓고 편한 길로 가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중심으로 살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속의 참된 지혜가 끊임없이 우리에게 경고를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자동차 운전하기가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저처럼 길에 밝지 못한 사람도 네비게이션만 따라 가면 목적지에 정확하고 빨리 도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가 심방을 가면 성도님이 어떻게 이렇게 잘 찾아왔느냐고 감탄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운전을 한 전도사님이 “저는 네비게이션 말만 잘 듣고 왔습니다”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비게이션이 잘 발달되어 있어 얼마나 편리한지 모릅니다. 그런데 네비게이션이 처음 나오기 시작할 때는 지금처럼 정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목적지로 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교회 행사를 마치고 한 여학생을 집에 태워준 적이 있습니다. 집이 의정부라서 멀었습니다. 그래서 밤도 되고 해서 직접 태워주었습니다. 그 때 길을 모르니까 네비게이션이 지시하는 대로만 갔습니다.
그런데 분명 아파트가 나와야 하는데, 네비게이션은 계속 어두컴컴한 산으로 안내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결국 산 속에 있는 군부대 앞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네비게이션이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안내를 한 것입니다. 다행히 그 차에는 제 아내도 함께 타고 있었습니다. 만약 제가 혼자 여학생을 데려다 주려고 했다면 정말 큰 오해를 살 뻔 하였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네비게이션 말을 잘 따라 가더라도, 네비게이션 자체에 문제가 있다면 절대 목적지에 도착할 수 없습니다. 지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아닌 세상 지혜를 따라 산다면 당장은 넓고 편한 길로 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국은 전혀 엉뚱한 곳, 생명이 아닌 멸망이 기다리는 곳에 우리는 도착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떤 지혜를 가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이 말씀하는 대로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17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우리는 이 땅에 속해 있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지혜가 아닌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며,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합니다. 그리고 편견과 거짓이 없습니다. 이러한 지혜의 특징들은 세상의 지혜의 특징인 시기와 다툼, 즉 자기 중심성과 완전히 반대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지혜의 특징이 우리가 잘 아는 성령의 열매와 매우 비슷하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 5:22~23절입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여러분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겉으로 보이는 어떤 외적인 변화보다는 그 성품에 변화가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고, 봉사 많이 하는 것이 예수 잘 믿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이 넘치고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며,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라도 참아주는 것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묵묵히 주의 일에 힘쓰고, 항상 부드러운 말을 사용하며, 자신의 욕심을 절제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가진 사람이 믿음으로 성숙한 사람이고, 참된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모습을 가질 수 있을까요? 우리 힘으로 이런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노력으로 참된 지혜를 가질 수 없습니다. 위로부터 난 지혜라고 말씀하고, 성령의 열매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늘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을 통해 우리가 참된 지혜를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주시고 그 인도대로 우리가 순종할 때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가 맺히게 되고, 우리는 좁고 불편하지만 그 끝이 생명인 길로 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지혜를 가지고, 생명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갈 때 우리들은 육체의 욕심, 즉 세상의 지혜를 따르지 않게 됩니다. 갈라디아서 5:16절입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육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어떻게 좁고 불편한, 하지만 그 끝이 생명과 영생인 길을 항상 걸을 수 있을까요? 오직 성령을 따라 행할 때입니다.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십니다. 우리가 그 인도하심에 순종할 때 우리들은 생명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우러러 보는 모든 신앙의 선진들이 사실은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이 원래 대단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하나님께 무슨 능력을 받아서 그런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그런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단 하나, 성령님의 인도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단지 위대한 삶을 산 믿음의 선진들을 부러워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을 살려고 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인도에 항상 귀를 기울이며 순종해야 합니다. 그럴 때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좁고 불편한 길, 그러나 영생이 약속된 길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세상의 지혜가 말하는 넓고 편한 길, 그러나 그 끝이 멸망인 길로 가지 말고, 오직 성령이 이끄시는 좁고 불편한 길, 그러나 그 끝이 영생인 길로 나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굳게 붙잡아 주셔서, 생명의 길로만 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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