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8,주일-오전) "바르게 말하는 것이 경건이다" / 약 3:1-12 / 고한율목사
주일 1,2부 예배 |
본문 : 약 3장 1 ~ 12절 |
2017년 6월 18일 |
야고보서 강해(12) 바르게 말하는 것이 경건이다 |
찬송가 : 1 장, 11 장, 342 장, 54장 // 교독문 60번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한 달 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 때를 생각해 봐도 말이 얼마나 중요하고 큰 영향력을 가지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얼마 전에 여론조사를 했는데, 이번 19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를 선택할 때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것이 무엇이냐를 물었습니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이 ‘TV토론’이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TV토론에서 후보자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 후보를 선택할지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몇몇 후보들은 토론에서 말실수를 하는 바람에 큰 곤혹을 치우어야 했습니다. 반면에 어떤 후보들은 말을 너무 설득력 있게 잘해서 이전보다 훨씬 호감도를 높이기도 하였습니다. 그야말로 말로 흥하고, 말로 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말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성경보다 더 강조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은 전체 성경에서 말의 중요성을 가장 잘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너희는 선생이 되려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말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본문인데 조금은 생뚱맞은 말씀 같습니다. 하지만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과 말의 중요성은 아주 깊이 연관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선생은 언제나 많은 말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말을 통해서 일을 합니다. 그러므로 당연히 다른 사람보다 많은 말을 하게 되고, 많은 말을 하면 당연히 실수도 많이 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말실수가 많으면 그만큼 더 많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 기억하지 못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6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여러분 우리가 내뱉는 별 실없는 말이라도 심판 날에 모두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아십니까? 사실 이것만 우리가 잊지 않고 기억해도 우리가 하는 말실수를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그냥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먹이나 발로 때려야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말의 폭력이 더 잔인하고 무섭습니다. 몸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지만, 말로 당한 폭력은 평생 그 마음에 상처를 남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한 말이 반드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런 점에서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는 사람은 온전한 사람이라고 말씀합니다. 2절을 보세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여기서 온전한 사람이란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완성에 이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목표하는 완전함에 도달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말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그 몸도 제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진 혀가 얼마나 대단한지 아십니까? 혀를 제어할 줄 알면 우리의 온 몸도 제어할 수가 있습니다. 야고보는 오늘 본문 3~4절에서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무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4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첫 번째 예는 말의 재갈입니다. 여러분 말 타 보셨습니까? 제주도에 있는 조랑말 같이 작은 말 말고, 정말 큰 말 있잖아요. 어떤 말들은 사람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런데 그런 큰 말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을까요? 말의 입에 물린 재갈을 통해서입니다. 아무리 큰 말이라도 입에 물린 조금만 재갈과 그 재갈에 연결된 끈을 통해서 원하는 방향대로 말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예는 바다 위의 떠 있는 배입니다. 배의 종류에 따라 그 크기가 다양하지만, 대형 유람선이나 혹은 항공모함 같은 배는 축구장을 몇 개 연결시킨 것보다 더 큽니다. 정말 어마 어마한 크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큰 배를 어떻게 움직일 수 있을까요? 우리가 영화 같은 데에서 보면 멋진 모자를 쓴 선장이 “배를 우현으로”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 그 옆에 있는 조타수가 마치 자동차 핸들처럼 생긴 배의 키를 오른쪽으로 돌립니다. 그 때 그 큰 배가 오른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배의 엄청난 크기를 생각할 때 배의 키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작은 배의 키로 큰 배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가 바로 이와 같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몸의 크기에 비하면 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작은 혀가 온 몸을 좌지우지할 수 있습니다. 5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그 크기로는 작은 지체에 불과하지만, 몸의 어떤 지체보다 큰 영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는 말의 위력입니다. 그런데 말을 하는 혀가 이처럼 중요한데, 문제는 혀를 잘못 사용하면 너무나 큰 비극이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방금 읽은 5절 하반절에 보면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생각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나라도 최근까지 많은 산불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산불이 한 번 나면 엄청난 면적의 산이 황폐해집니다. 그런데 그 큰 산불이 처음에 무엇으로 시작이 됩니까? 처음부터 큰 산불은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버린 담배꽁초 하나가 큰 산불로 발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담배꽁초의 불, 그 자체는 정말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옮겨 붙으면 온 산을 다 태워버리는 무서운 불이 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우리의 혀가 이와 같은 불과 같다고 말씀합니다. 6절을 보세요.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혀는 곧 불이라고 말씀하며서 얼마나 끔찍한 불이냐?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고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삶의 수레바퀴란 인생을 말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말이 인생 하나를 완전히 불태워 버릴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의 혀를 불이라고 하면서 그 불이 어디서 나왔느냐? 바로 지옥에서 나온 불이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입에서 지옥 불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너무 과장된 말인가요? ‘내가 썰렁한 말은 할 줄 알아도 지옥 불 같은 말은 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야고보는 우리의 혀가 지옥 불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만큼 우리가 하는 말이 큰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가족이든, 친구이든 사람들에게 많은 상처를 받았을 텐데 그 대부분의 상처가 말로 받은 것이 아닙니까? 상대방이 무심코 한 말이지만, 그 말 때문에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졌던 때가 있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함부로 한 말 한 마디 때문에 시험에 들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교회를 옮기거나 혹은 아예 교회를 가기 싫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 않았습니까? 다들 그런 경험이 한 번 쯤은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말의 파괴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큽니다. 그야말로 인생을 태워버리는 지옥 불이라는 것이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혀가 이처럼 파괴적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길들일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7~8절입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8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우리의 혀가 정말 문제인 것은 혀를 길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요즘 북한 김정은이 세계의 골칫거리가 되지 않았습니까? 모든 나라들이 북한 김정은을 비난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섣불리 건드리는 나라는 없습니다. 모두가 신중합니다. 왜 그럴까요?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길들지 않은 야생마처럼 제 멋대로 날뛰기 때문에 아무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처럼 길들이지 못하는 것은 위험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혀가 바로 그렇다고 야고보가 말씀하고 있습니다. 혀를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혀로 말미암아 끊임없이 문제가 발생합니다. 우리가 말을 하다가 “내 입이 원수다”라고 말하지요. 좀 더 격하게 말하면 내 주둥아리가 원수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다. 말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다 알아요. 그런데 혀를 길들일 수가 없으니 계속 잘못된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혀에서 나오는 말이 그처럼 파괴적이라면, 또한 우리가 절대 길들일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마도 제일 좋은 방법은 입을 아예 다무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침묵은 금이다’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말을 하지 않는 그 자체가 어떤 경우에는 수천 마디의 말보다 더 좋은 영향을 끼칠 수가 있습니다.
제가 목사이다 보니까 상담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성도님들이 말하기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와서 털어놓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제가 아직 젊고 경험이 부족해서 뭐라고 해 줄 말이 없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그저 들어줍니다.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지 들어만 줬을 뿐인데 큰 위로를 받았다고 말씀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제가 한 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위로를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말을 안 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제로 상담학에서는 말하기보다 들어주는 것을 잘하는 사람을 더 훌륭한 상담자로 여긴다고 합니다. 제가 듣기로는 상담의 90%가 들어주는 것이랍니다.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담의 90%가 이뤄지는 거예요. 왜 부부가 항상 으르렁 거립니까? 왜 자녀와 있으면 서로 다투기만 할까요? 많은 경우 각자가 말하기만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려고 하지 않고, 내 말을 먼저 하려고 하니까 으르렁 거리고 다투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먼저 들으려고 하세요. 내가 윗사람이라도 먼저 경청의 자세를 가져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분명 관계의 변화가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말을 하는 것이 문제가 많으니 아예 말을 하지 말고 듣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요? 물론 그렇지 않습니다. 말을 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것은 가능한 일도 아니거니와 우리에게 혀를 주신 하나님의 뜻에도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분명 말을 해야 하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오늘부터 바른 말만 하겠다, 나쁜 말은 하지 않겠다, 다짐하고 결단한다고 해결된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혀를 길들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엇보다 말을 바르게 하는 일이 정말 어렵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윗이 드린 기도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 141:3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다윗 또한 자신의 혀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바르게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다윗은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자신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서 잘못된 말 하려는 것을 지켜 달라고 했습니다. 또한 입술의 문을 지키셔서 바른 말만 나오고, 그렇지 않은 말은 나오지 못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우리 또한 이런 다윗의 겸손한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조차도 자신의 입을 지켜달라고 기도했다면 우리는 더욱 더 힘써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바르게 말하기 위해서 우리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우리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17~1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것은 배로 들어가서 뒤로 내버려지는 줄 알지 못하느냐 18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말을 하는 것은 혀이지만, 그 말이 나오는 곳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르게 말을 하려면 혀가 아닌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즉 마음이 바르고 깨끗하다면 그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바르고 깨끗합니다. 반대로 마음이 더럽고 악하다면 그 사람의 입에서도 당연히 더럽고 악한 말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본문 9~10절입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10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분명 우리의 입은 하나인데, 하나의 입에서 전혀 다른 말들이 같이 나옵니다. 교회에 와서는 얼마나 말이 고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집이나 직장에서는 별소리가 다 나옵니다. 한 입에서 찬양이 나오기도 하고, 욕이 나오기도 합니다. 그런데 야고보가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것이 마땅하지 않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되면 절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을 살다보면 좋은 말도 할 수 있지만 험한 말도 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그런데 야고보와 왜 절대 안 된다고 그럴까요?
11~12절을 보세요.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12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여러분 샘이 있는데, 같은 샘에서 단 물과 쓴 물이 함께 나올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무화과나무에서 감람열매를 얻을 수 있을까요? 요즘 기술이 좋아져서 이종교배를 통해 그렇게도 된다는 말이 있지만, 자연적인 무화과나무에서는 결코 감람열매를 얻을 수 없습니다. 포도나무에서 무화과가 나지 않는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지금 야고보가 무엇을 말하고 싶을 것일까요? 우리의 마음이 하나인 이상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사실 다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마음에서 어떻게 찬송과 저주가 함께 나올 수 있겠습니까? 포도나무가 사과나 배를 낼 수 없는 것과 같이 한 마음에서 찬송과 저주가 동시에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는 거짓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거짓일까요? 당연히 찬송이 거짓입니다. 왜냐하면 선한 마음은 저주를 할 수 없어도, 악한 마음은 얼마든지 겉으로 찬양의 말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결코 나와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말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만약 우리 입에서 이 둘이 계속해서 문제없이 나오고 있다면 실제로 우리의 마음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이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악한 것만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속으면 안 됩니다. 교회에서 하는 말과 가정이나 직장에서 하는 말이 다른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두 마음을 가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악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같이 나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면 그것은 포도나무에서 사과나 배를 찾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 같이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가 평소에 하는 말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말들이 우리의 마음이 어떤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항상 불평하고, 다른 사람 탓하며, 욕하고 다투는 말을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에는 그런 것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잠시 잠깐 우리의 입에서 고상하고 바른 말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악한 마음도 얼마든지 선한 말로서 자신을 선하게 포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바르지 않다면 우리의 말도 결코 바를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바르게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늘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마음의 열매와도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바르고 깨끗한 마음에서 바른 말, 고운 말이라는 열매를 맺게 됩니다. 반대로 악하고 더러운 마음에서는 오직 악하고 더러운 말만이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 모두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모든 악한 말들이 우리 입에서 사라지고, 오직 바르고 선한 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은 대체적으로 우리가 하는 말의 부정적인 부분을 특히 강조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혀가 파괴적이고 길들일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 혀를 바르게 사용하면 얼마나 복된 열매를 맺게 되는가도 우리는 꼭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주일 학교 선생님 한 분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 분의 말 한 마디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선생님은 부목사님의 사모님이었습니다. 그런데 부목사님이 사역지를 옮기는 바람에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송별회를 열었습니다. 그 때 선생님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아이들에게 해 주다가 저를 콕 집어서 한 마디를 하셨습니다. “넌 참 특별한 아이 같아” 사실 선생님으로서는 별 생각 없이 하신 말씀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지금 만난다면 절대 기억하시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이 제 마음에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힘들고 어려울 때, 특히 어려운 일 앞에 위축될 때 그 격려의 말이 제게 큰 힘이 되는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말의 능력이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여러분 우리의 말이 힘이 있습니다. 권세가 있습니다.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습니다. 잠언 18:21절에 보면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고 말씀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어느 누구를 죽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가 하는 한 마디에 어느 누구는 살아날 수도 있습니다. 이 놀라운 권세가 우리가 가진 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사용하고 싶으십니까? 죽이는 데 여러분의 혀를 쓰시겠습니까? 살리는데 쓰시겠습니까? 당연히 살리고 세우는 일에 우리의 혀를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겸손히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입술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입술의 문을 지켜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을 항상 새롭게 해 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말을 하기보다 먼저는 들어주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말을 할 때 꼭 필요한 말인지 신중하게 먼저 생각하고 말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해도 아예 실수가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다면 분명 우리의 말을 통해 이전과는 달리 관계를 복되게 하고, 사람을 격려하고 세우며 살리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말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사람들은 유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이보다 더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바르게 말하는 것이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사람, 즉 온전한 사람, 경건한 사람이 되는 길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기억하고 항상 바른 말로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항상 바르게 말함으로써 우리의 가정, 직정, 교회가 새로워지는 귀한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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