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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06/11,주일-오전) "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 약 2:20-26 / 고한율목사

(06/11,주일-오전) "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 약 2:20-26 / 고한율목사

주일 1,2부 예배

본문 : 220 ~ 26

2017611

야고보서 강해(11)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찬송가 : 1 , 10 , 545 , 54// 교독문 59

 

지난 주일에 이어서 오늘도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저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지 않고, 행함이라는 믿음의 열매가 맺혀야 한다고 했습니다. 건강한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하듯이, 건강한 믿음에는 행함이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가령 교회에서 여러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립니다. 그런데 옆 자리에 며칠을 굶은 사람이 벌벌 떨면서 앉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결코 어려운 질문이 아닙니다. 당연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단순히 그 사람이 불쌍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불쌍해서 돕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가 돕는 것은 그저 동정심 때문이 아니라, 그 일을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에 살펴본 야고보서 1:27에 보면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고아와 과부를 돌본다는 것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돕는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세상 사람과 성도가 똑같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다고 하더라도, 그 동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동정심과 연민으로 돕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돕습니다. 이 둘은 겉으로 볼 때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이런 경우입니다. 우리가 여유로울 때는 얼마든지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자신에게 갑자기 경제적인 어려움이 찾아오면 어떻게 됩니까? 그 때에도 이전처럼 어려운 사람을 도울 수 있을까요?

 

흔히 이런 경우 이렇게 말하죠. ‘제 코가 석자인데 누가 누구를 돕습니까?’ 다른 사람을 향한 동정심과 연민이 자기 자신을 향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도울 겨를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는 다릅니다. 성도는 단순히 동정심과 연민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돕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형편이 어렵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을 칭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8:1~2입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한 풍성한 연보, 즉 헌금을 칭찬하였습니다. 이 헌금은 사도 바울이 이방인 교회들에게 요청한 것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어려운 성도들을 돕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이처럼 풍성한 헌금을 한 것은 그들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였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처럼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극심한 가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즉 제 코가 석자인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헌금을 하였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단순히 그들의 동정심과 연민이 많아서일까요? 사도 바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였을까요? 만약 그런 이유라면 적당히 헌금하면 될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헌금을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한 이유를 8:5에서 밝힙니다.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헌금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그들은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헌금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그들의 헌금을 단순히 돈을 드렸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자신을 주께 드렸다고 표현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믿음 아닙니까? 2년 전에 개봉한 영화중에 베테랑이라는 한국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이 형사인데, 자신이 가진 돈과 권력으로 온갖 못된 짓하는 재벌 2세를 혼내 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영화에서 주인공이 한 유명한 대사 하나가 있습니다. 재벌 2세가 자기의 범죄를 숨기기 위해 형사에게 뒷돈을 주었는데, 주인공 형사가 그것을 알고 그 돈 받은 형사에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멋진 말 아닙니까? 돈 때문에 형사 자존심을 버리지 말라는 뜻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헌금한 이야기를 들으면 다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자기 입도 풀칠 못하면서 무슨 저 먼 나라 교회를 위해서 헌금을 다 하느냐고 야단할 것입니다. 그럴 때 아마도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 “성도가 돈이 없다고 성도가 아니냐? 성도라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제일 먼저 앞세워야 하는 거 아니냐?” 아마도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문제가 생기면 꼭 나타나는 현상 하나가 있는데, 교회재정이 부족해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어지러워지면 헌금을 잘하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 교회들을 살펴보고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 현상이 공통적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회 재정이 부족해지면 제일 먼저 줄어드는 예산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교예산과 주일학교 예산입니다. 이것은 재정적인 어려움을 당하는 대부분의 교회에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물론 어떤 교회들의 경우 선교예산이나 주일학교 예산이 전체 예산중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여 어쩔 수 없이 줄여야 하는 경우가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들도 제일 먼저 줄이는 것이 선교예산과 주일학교 예산입니다. 왜냐하면 이 예산들은 줄여도 당장에는 큰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선교예산을 줄이면 당장 선교사들은 타격을 입지만 교회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주일학교 예산도 아이들이 클 때까지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존재 사명이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왜 교회를 이 땅에 세우셨습니까? 많은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하신 가장 중요한 일 세 가지가 있는데, 바로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고, 병자를 고치신 일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사역을 이어 받은 교회이기 때문에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일이 사역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에서 선교예산과 주일학교예산은 교회의 존재목적과 연결되어 있는 가장 중요한 예산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가장 어려울 때 가장 빨리 줄이고, 심지어 없애버리는 예산이 선교와 주일학교 예산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내 코가 석자인데..”정신으로 교회가 운영된다는 뜻 아닐까요? 만약 우리가 내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정신을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할까요? 마게도냐 교회가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헌금을 한 것처럼 교회에 주신 가장 중요한 사명을 포기하지 않고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이처럼 눈에 보이는 현실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비록 현실적으로 볼 때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확신이 들면 그 일을 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상 사람들과 믿음을 가진 성도의 삶은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성도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삶을 살기 때문입니다. 제 코가 석자인데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돌봅니다. 오지랖도 이런 오지랖이 없습니다.

하지만 성도들이 이처럼 믿음으로 사는 것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비현실적이거나 자신의 삶에 무책임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살면 하나님께서 그 삶을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시편 37:23~25에 보면 믿음으로 사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하시는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5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성도를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그 삶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 성도를 붙들어 주실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형통함을 더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것보다 더 복된 삶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삶을 기뻐하시고 책임져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내 삶의 우선순위에 하나님의 뜻을 제일 위에 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우선적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반드시 책임져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말씀 마태복음 6:33에 보면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삶의 우선순위를 바르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에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의 삶을 책임져 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믿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로 다짐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단지 말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기가 살고 싶은 대로 사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행함이 없는 믿음이라고 말하면서 헛된 믿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본문 20입니다.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그러므로 우리들은 우리의 삶을 잘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말로만 믿는 성도라고 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마음 속에 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지. 아니면 여전히 내 인생의 주인이 인 것으로 생각하여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 하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잘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야고보는 행함이라는 열매를 통해서라고 말씀합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서, 행함을 확인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무가 살아 있는지 어떻게 압니까? 가장 확실한 것은 열매를 통해서입니다. 열매를 맺는 나무는 당연히 살아 있는 나무입니다. 하지만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라면 그것은 심각하게 병들었거나, 혹은 죽은 나무일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행함이 나타나면 그 믿음은 참된 믿음입니다. 그러나 믿는다고는 하는데, 행함이 전혀 없으면 그 믿음은 병들었거나 혹은 죽은 믿음임이 틀림없습니다. 야고보는 이에 대해서 우리에게 두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줍니다. 바로 아브라함과 라합의 예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1입니다.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그 유명한 사건,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그의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100세에 낳은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명령에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물론 실제로 이삭이 제물로 죽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사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것은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고 할 때 그것을 막으시고는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삭을 바치는 사건은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는가를 시험하신 것이죠.

 

야고보는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잘못 이해하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했기 때문에 의롭게 되었다, 즉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되면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행위로 구원을 받기 때문에 성경 말씀과는 어긋나게 됩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지금 말씀하려는 뜻은 그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쳤기 때문에 그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훨씬 이전에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오늘 본문 23을 보세요. “이에 성경이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훨씬 전인 창세기 15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되었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미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즉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야고보는 왜 이삭을 바치는 행위로 의롭게 되었다고 말씀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행위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위로 나타난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 22의 뜻입니다.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오늘 설교제목이기도 한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는 이 말씀이 참 중요합니다. 이 말씀은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완성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믿음도 필요하고, 행함도 필요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참된 믿음이어야만 구원을 받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참된 믿음이 무엇이냐? 행함이 있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서 의롭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제물로 바치려고 한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에게 참된 믿음이 없다면 이삭을 바칠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하지요. 하나님을 향한 온전한 믿음이 없다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고 한 사건은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참된 믿음임을 증명한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 참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우리의 삶 가운데 순종으로 반드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하나의 예를 더 듭니다. 그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을 할 때 첫 전투지였던 여리고성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여호수아가 전투를 하기 전에 여리고성으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었습니다. 이 때 정탐꾼들이 라합이라는 기생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기생의 집은 여러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니까 사람들의 의심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여리고 왕이 정탐꾼들이 들어왔다는 첩보를 입수하고 그들을 잡기 위해 군사를 보내었습니다. 이 때 기생 라합이 이 두 사람을 숨겨주었습니다. 만약 이 일이 탄로 나면 반역죄로 죽음을 피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라합은 목숨을 걸고 두 사람을 끝까지 숨겨 주었습니다. 라합이 이처럼 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통해 여리고 성을 정복할 것을 듣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라합이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라합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라합의 믿음이 참된 믿음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야고보는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들을 살려준 것에서 알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25입니다.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여기서도 마찬가지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것은 라합의 믿음이 그가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확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26입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사람은 영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혼 없는 몸, 몸이 없는 영혼 모두 참된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가 죽은 후에 반드시 부활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그저 영혼으로 떠다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재림하기 전까지는 영혼으로 존재하겠지만, 재림 후에는 새로운 몸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몸과 영혼을 가진 온전한 인간으로 천국에서 살게 됩니다.

 

이처럼 사람이라고 하면 반드시 영혼과 몸이 있어야 하듯이, 참된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행함이 없이 말로만 하는 믿음이라면 그것은 죽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죽은 믿음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지난주와 오늘까지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에 대해 함께 말씀을 통해 살펴보았습니다. 야보고가 말하는 참된 믿음은 무엇보다 행함이 따르는 믿음입니다. 참된 믿음은 그저 머리의 지식이나 입에서 나오는 말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참된 믿음은 그 사람의 삶 가운데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자신의 뜻대로 사는 삶이 아니라, 매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내 형편과 상황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순종하는 것이 참 믿음의 삶입니다.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가 자신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입으로만 믿는다고 하지는 않습니까? 겉으로 볼 때만 성도 아닙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 싶어 합니까? 우리는 정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요, 헛된 믿음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런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고 경고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 마음에 잘 새기고, 하나님의 뜻에 항상 순종하는 참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믿음의 풍성항 열매들이 맺혀서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게 충만히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