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04,주일-오전)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약 2:14-19 / 고한율목사
주일 1,2부 예배 |
본문 : 약 2장 14 ~ 19절 |
2017년 6월 4일 |
야고보서 강해(10)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찬송가 : 1 장, 9 장, 204 장, 54장 // 교독문 58번
2013년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에서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 보고서’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보고서에는 한국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는지가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령 예배 시간을 제외하고 성경을 한 번도 읽는 않는 성도의 비율이 어떻게 되느냐? 41%라고 합니다. 즉 한국교회 성도 10명 중 4명은 예배 시간 외에는 성경을 한 번도 펴보지 않고 신앙생활합니다. 기도를 한 번도 하지 않은 성도는 29%, 10명 중 3명은 기도를 전혀 하지 않는 성도입니다. 1년간 신앙서적을 한 권도 읽지 않는 성도도 61%라고 합니다.
4년 전에 발표한 보고서이지만 지금과 그리 다를 것 같지 않습니다. 참 충격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말씀과 기도가 신앙생활의 가장 기본이라고 할 때, 기본이 없는 성도가 30~40%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더 씁쓸한 내용도 있습니다. 많은 성도들이 대형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어느 교회를 다니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형교회에 다니고 싶다는 대답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대형화 되는 것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실제 신앙생활은 좀 더 편리하고 잘 갖춰진 대형교회에서 하고 싶은 것입니다.
한 때 유체이탈 화법이라는 말이 유행했습니다. 자기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남 이야기하듯 하는 말을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유체이탈 화법은 일부 몰지각한 정치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성도들 사이에도 퍼져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우리의 표정이 항상 밝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듣기 좋은 축복의 말씀은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듣지만, 책망과 비판의 말씀은 내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김집사, 박집사에게 주신 말씀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전형적인 유체이탈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은 많은 데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교회가 대형화 되는 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압니다. 하지만 대형교회가 편하고 누릴 것이 많으니까 아무 생각 없이 다니는 겁니다. 물론 저는 대형교회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대형교회가 가진 부정적인 점이 많은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그런 것을 알고 비판하면서도 편리하고 모든 것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에 선호하는 것이죠. 이것이 유체이탈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함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충분히 성숙하지 못하고, 여전히 어린 아이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은 유체이탈식의 자세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기 때문입니다. 내게 주신 말씀으로 심각하게 받지 않으니까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가령 누가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비유 이야기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무화과나무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열매가 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관리인에게 내가 3년을 지켜봤는데 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하니 그냥 찍어서 버리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인이 올해만 기다려 달라고 합니다. 자신이 거름도 주고 정성껏 관리해 볼테니 1년만 더 참고, 만약 1년 후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 때 찍어버리라고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이 간단한 비유이야기는 사실 무시무시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는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삶 속에 열매, 즉 변화가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3년을 지켜보았다는 것은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는 뜻합니다. 게다가 1년을 더 주지요. 그런데 변화가 없습니다. 열매를 맺을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찍어 내버림을 당하게 됩니다.
여러분 지금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그냥 그렇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둘 중에 하나입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남의 이야기로 듣던지, 아니면 우리의 마음이 이미 굳어버렸던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변화가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는 분명 능력이 있습니다. 히브리서 4: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는데 마치 칼과 같습니다. 어떤 칼이냐면 유능한 의사의 손에 들린 수술용 칼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문제들을 다 들춰내서 제거해 버립니다. 아무리 딱딱하게 굳은 덩어리라도 깨끗하게 제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칼끝이 우리를 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능한 의사의 수술용 칼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수술을 거부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칼끝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하도록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들을 때 나에게 주시는 것으로 듣지 않습니다. 마치 우리가 평론가나 심사위원이 된 것처럼 듣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듣고 난 후에 ‘이번 주 설교는 괜찮았어’, ‘이번 주 설교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이렇게 말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듣는다면 이렇게 말할 수 없겠지요.
한 때 오디션 프로그램이 한참 유행했습니다. 심사위원들 앞에서 참가자가 노래를 부르고, 끝나면 심사위원들이 평가를 하지요. 그 때 참가자들이 어떻게 평가를 듣습니까? 참가자들 중에 심사위원의 말을 듣고, ‘거참 평가 한 번 잘 하시네요’, ‘아주 은혜로운 평가였습니다.’ ‘당신 평가는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네요’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사위원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얼마나 집중하는지 모릅니다. 특히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세상을 다 가진듯한 표정을 짓고, 잘못을 지적하는 말을 들으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습니다. 심사위원의 말을 내게 주는 말로 듣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을 때, 설교를 들을 때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말씀의 당사자가 아닌 평론가일 때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삶이 변화되지 않고, 그저 지식만 늘어가는 데에는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한 것처럼, “주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듣기 시작할 때 그 말씀은 유능한 의사의 손에 들린 수술용 칼이 되어 우리를 변화시킬 것입니다. 우리의 심령을 새롭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성숙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본문에서 야고보가 우리에게 간절히 바라는 것이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 말씀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신앙생활의 근본을 점검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믿음 외에 다른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에베소서 2:8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또한 로마서 10:9절에 보면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님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인 야고보서는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이 말씀은 믿음이 있다고 해도 행함이 없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보면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종교개혁자였던 마틴 루터는 야고보서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고까지 말하였습니다. 쓸데없다는 것이죠. 루터는 중세 로마카톨릭 교회의 잘못된 신학과 가르침을 앞장서서 배척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카톨릭교회는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믿음만이 아니라, 선행과 공로도 있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오직 믿음이 아닌 것이죠. 그 결과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자신의 선행과 노력, 공로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생각 가운데 나온 것이 면죄부 판매였습니다. 면죄부를 사면 죽은 조상이 연옥에서 빨리 나와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루터는 이런 생각이 반성경적인 것을 깨닫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성경의 가르침을 전파하였습니다. 우리의 그 어떤 선행이나 노력, 공로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주어지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루터가 오직 믿음만을 외쳤는데, 그런 그가 야고보서를 읽어보니까 믿음만으로는 아니고 행함도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서신이라, 별 가치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루터의 판단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서가 다른 성경과 달리 구원은 오직 믿음이 아니라, 행함으로 받는다고 가르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도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에는 동의합니다. 다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할 때, 그 믿음이라는 것이 어떤 믿음이냐는 것이죠. 야고보서는 믿음이라고 해서 다 같은 믿음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14절 말씀을 잘 보시면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하지 않고,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말씀합니다. 즉 그런 믿음을 가지고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죠. 여기서 그런 믿음이란 행함이 없는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믿음과 행함의 관계를 잘 알아야 합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느냐, 행함으로 구원을 받느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야고보 또한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행함은 무엇인가? 여기서 행함은 믿음의 열매를 뜻합니다. 즉 나무와 열매로 비유를 하면, 믿음은 나무이고, 행함은 그 나무에서 나는 열매입니다.
여러분 사과나무가 있다고 생각해 보세요. 그러면 당연히 무엇을 기대하겠습니까? 가을이 되어 탐스러운 빨간 사과 맺기를 기대합니다. 그 사과나무가 살아 있다면 이 기대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무나무가 가을이 되어도 사고를 맺지 못한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이 나무가 죽었거나 혹은 심각한 병에 든 것이죠. 분명 나무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가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분명 믿음이 있다고 하는데, 그 믿음에 열매인 행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믿음은 죽은 믿음이나 혹은 심각한 문제가 있는 믿음이 아니냐는 것이죠.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에 문제가 있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 또한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저 말로만 믿음이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구원받은 성도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죠. 그러면서 한 예를 들어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15~16절입니다.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주일이 되어서 성도들이 예배당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옆 자리에 앉은 성도를 보니까 한 주간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였습니다. 또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탓에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 ‘따뜻하게 옷 입으세요, 밥을 잘 챙겨 드세요’ 라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무 소용이 없지요. 물론 이런 따뜻한 말도 안하는 경우가 요즘에는 많기 때문에 그게 어디냐라고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사과나무가 사과를 맺지 못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플라스틱으로 만든 장식용 사과를 붙여놓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진짜 사과를 맺은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실제로 따서 먹으려고 하면 실망하게 되지요. 여러분 이것이 오늘날 믿음이 있다고 하는 우리들의 모습이 아닙니까? 겉으로는 멀쩡합니다. 하는 말만 들으면 정말 믿음이 있는 사람처럼 보여요. 하지만 진짜 열매는 없어요.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그런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17절입니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여러분 우리는 이 말씀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 중 많은 분들이 그저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자신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삶 속에는 믿음의 열매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 밖에만 나가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살아갑니다. 이것은 단지 술 마시고, 담배 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생각하는 것이나, 그 말하는 것이나 그 행동하는 것이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반드시 행함이라는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속에 참된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은 반드시 변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변화는 비록 사람마다 그 속도가 다르지만, 반드시 일어난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10년이 지났는데도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삶에 있어서 차이가 전혀 없다면 우리는 매우 심각하게 우리 믿음을 점검해 봐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10년 째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를 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삶의 변화가 없는 믿음은 결코 정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단지 여러분이 어느 정도의 성경지식이 있고, 교회에 오래 다녔고, 교회 생활에 익숙하며, 심지어 어떤 직분을 받은 것 그것으로 믿음이 있다고 단정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 본문 19절을 보세요.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미안한 말씀이지만 귀신들도 하나님을 믿습니다. 게다가 귀신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정확히 알기 때문에 그 앞에서 벌벌 떱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벌벌 떨지도 않잖아요.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건방지게 살아갑니까? 내 마음대로 말하고, 고집대로 행동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면 어떻게 그렇게 살겠습니까? 사실상 귀신보다도 더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아무 문제가 없는 듯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잘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죠.
여러분 오늘 말씀은 어느 누구가 아닌 나 자신에게 주신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만약 이 말씀을 외면하고 계속해서 행함 없는 믿음, 죽은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결국 마지막 날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보면 마지막 심판 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천사와 함께 영광의 보좌에 앉게 되고,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각각의 사람들을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좌우편으로 나누실 것입니다.
그 때 우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복 받을 자들이여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으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마 25:35~36)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때 우편에 있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내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왼편에 있는 사람들의 상황은 전혀 달랐습니다. 주님은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또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오른 편에 있던 사람들과 정반대였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대에 마시게 하지 않았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 돌보지 않았다.”
그러자 왼편에 있는 사람들이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언제 그렇게 하였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마지막 심판 날에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가진 자였는지, 죽은 믿음을 가진 자였는지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들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스스로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참된 믿음이 아닌 죽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삶에는 행함의 열매가 없었고, 마지막 심판 날에 그것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는 변화가 있습니까? 점점 더 예수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세월만 흘러갈 뿐 똑같은 모습은 아닙니까? 겉으로는 훌륭한 성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마귀보다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우리 모두가 자신의 믿음을 진지하게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전혀 변화되지 않는 모습을 하나님 앞에서 겸손히 인정하고, 하나님 말씀의 칼로 우리를 새롭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그 말씀을 내게 주신 말씀으로 들을 수 있도록 영적인 눈과 귀를 뜨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이 지나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막연한 마음을 버리고, 갈급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처럼 기도하는 우리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닮아가며, 구체적인 삶의 변화가 있도록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예배드리는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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