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8,주일-오전) "하나님 나라의 법을 이루라" / 약 2:8-13 / 고한율목사
주일 1,2부 예배 |
본문 : 약 2장 8 ~ 13절 |
2017년 5월 28일 |
야고보서 강해(9) 하나님 나라의 법을 이루라 |
찬송가 : 5 장, 8 장, 452 장, 54장 // 교독문 57번
1990년대 젊은이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던 한 남자 가수가 있었습니다. 노래와 춤도 참 잘했지만, 근육으로 다져진 몸도 인기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건강한 청년이라면 피할 수 없는 문제를 그 가수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군대였습니다. 사실 그 가수는 12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미국영주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곧 미국시민권을 취득하면 미국시민이 되어 한국 군대에 들어갈 의무가 사라집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대중들은 이 가수가 과연 미국시민권을 포기하고 군대에 들어갈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관심은 대한민국 청년으로 꼭 군대에 갈 것이라고 약속한 그의 말 때문에 더욱 커졌습니다. 하지만 이 가수는 자신의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가 군대 갈 날짜가 가까워지자 미국시민권을 취득하였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 가수를 향한 대중의 사랑은 분노와 미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치 나라를 배신한 사람처럼 낙인이 찍혔습니다.
군대 업무를 관할하는 병무청은 법무부에 요청하여 그 가수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막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수는 무려 15년 이상 한국 땅을 밟지 못하는 그런 비운의 가수가 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워낙 유명한 사건이라 많은 성도님들이 이 가수가 누구인지 아실 것입니다. 이 사건을 두고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습니다. 병역을 피하기 위해서 미국국적을 취득한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는 강경론과 그래도 15년 이상을 한국에 못 들어오게 하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는 동정론이 있었습니다. 어느 의견이 맞는지는 각자가 판단할 일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이 사건을 통해 국민의 의무가 얼마나 엄중한 것인가를 우리가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국가는 국민의 삶과 가정, 산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국가의 역할입니다. 반면에 국민은 그런 국가가 제 기능을 할 수 있도록 국민에게 부여한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만약 국민이 자신의 의무는 소홀히 하고 국가의 책임만을 강조한다면 그 국가는 제대로 기능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런 이유로 국가가 병역을 일부러 기피한 남자 가수에게 조금은 혹독한 징계를 해도 많은 국민들이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이것을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면 어떨까요? 여러분,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가 사실은 이중국적자라는 사실을 아십니까? 무슨 말이냐 나는 대한민국 국적만을 갖고 있는 사람인데, 무슨 이중국적이냐? 이렇게 생각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우리들은 분명 이중국적자들입니다. 빌립보서 3: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러분, 우리의 시민권이 어디에 있어요? 하늘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대한민국 시민권만이 아닌 하나님 나라 시민권을 함께 갖고 있으니 분명 이중국적자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대한민국 시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여러분 우리가 대한민국 사람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우선 대한민국의 헌법과 법률 아래 있다는 뜻입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남자 가수가 왜 군대 갈 날짜가 가까워 오자 미국시민권을 취득하였을까요? 미국시민권을 취득하면 더 이상 대한민국 법률 아래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병역의 의무가 사라지는 것이죠. 이처럼 우리가 한 나라의 시민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그 나라 법의 통치를 받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 나라 시민이라고 할 때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도 분명해 집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 시민이라면 하나님 나라 법의 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줄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눈에 보이는 시민권이 있습니까? 천국 주민등록증이 있나요? 하나님 나라에는 없습니다. 대신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면서 사는가를 통해서입니다.
비록 눈에 보이는 주민등록증은 없다고 하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은 분명 하나님 나라 시민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반대로 말하면 아무리 자신이 하나님 나라 시민이라고 말해도 하나님의 나라의 법과 상관없이 산다면 그 사람은 결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일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하나님 나라 시민이 아닙니다. 교회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무슨 뜻이에요?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하나님 나라 시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 나라 시민입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가리라” 즉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 나라 시민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입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자신이 하나님 나라 시민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법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주는 온갖 혜택에만 관심이 있고,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법과 의무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세상을 점점 닮아갑니다. 이것을 교회의 세속화라고 합니다. 이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가장 심각한 현상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같아지는 것보다 더 큰 재앙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교회가 세속화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점점 줄어들고, 세상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보면 하나님 나라의 향기가 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냄새만이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해야 교회의 세속화를 막을 수 있고,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의 향기를 내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여러분 맑은 샘물에 진흙이 쏟아져서 혼탁해 졌다고 생각해 보세요. 어떻게 하면 다시 맑은 샘물을 만들 수 있을까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혼탁해진 샘물로 깨끗한 물을 계속 공급하는 것입니다. 깨끗한 물이 계속 공급되면 결국은 다시 맑은 샘물로 회복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속화된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향기를 뿜는 교회가 될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 하나님 나라 시민이 점점 더 많아지면 됩니다. 세상의 방식으로는 사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하나님 나라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그저 말로써 떠드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나라의 법을 실천하는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의 주제입니다. 오늘 본문 8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여기에 나오는 ‘최고의 법’이라는 단어는 더 정확하게 번역할 필요가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왕국의 법”입니다. 즉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의 법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여러분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법입니다. 그런데 이 법에는 짝이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두 계명을 말씀하셨는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두 계명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면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면 온 율법과 선지자의 모든 말씀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야고보서가 말한 대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님 나라의 법이면서, 말 그대로 최고의 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까?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자신의 몸과 같이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가지를 행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두 계명이 하나님의 성품에서 나왔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하나님’ 하면 제일 먼저 무엇이 떠오르십니까?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 요한에게 이 질문을 하면 지체 없이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요한1서 4:16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사도 요한은 확신 있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말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를 위해 먼저 보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원해서 예수님이 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요청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예수님이 필요한지도 몰랐습니다. 그만큼 깊은 죄악 가운데 빠져서 멸망당할 날만 기다렸던 것이 우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우리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먼저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셔서 우리를 죄에서 건지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아무 자격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멸망 받아 마땅한 원수인 우리들을 위해 그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의 생명을 주게 하셨던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볼 때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요한1서 4:10절에 보면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가장 끔찍한 원수를 위해 자신의 독생자도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그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법이 바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하나님 나라의 법은 책상 위에서 만들어진 그런 법이 아닙니다. 그 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몸소 실천해 보이신 법입니다. 그렇기에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실 때 우리가 사랑해야 할 이웃은 누구입니까? 너무 너무 미워하는 원수까지도 포함하는 그야말로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가 원수까지도 사랑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저 하나님 나라의 법이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원수인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런데 말로만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우리를 위해 내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 사랑을 우리가 받았습니다.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놀라운 사랑을 받은 우리가 다른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입으로만 우리에게 명령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닮으라고 말씀합니다. 자신을 따라서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할 때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인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의 법은 하나님 자신의 성품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법을 따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닮는 것,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참된 경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뭘 지켰느냐 안 지켰느냐로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주일을 지키면 훌륭한 성도이고, 안 지키면 그렇지 않은 성도다, 술과 담배를 안 하면 훌륭한 성도이고, 하면 그렇지 않은 성도이다, 십일조를 하면 훌륭한 성도이고, 안 하면 그렇지 않은 성도이다.’
우리는 이러한 기준들을 많이 만들어 두고 그것을 지키면 훌륭한 성도, 지키지 못하면 별로인 성도라고 판단을 합니다. 물론 주일을 성수하고, 경건한 삶을 위해 술, 담배를 절제하고,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며 드리는 십일조는 매우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신앙의 규칙이 되어서 그저 보이는 모습으로만 지키려고 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장 많이 책망하셨던 사람들이 누구였습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보다 이러한 규칙들을 잘 지킨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은 반드시 금식을 하였습니다. 아주 작은 수입이 생겨도 십일조를 반드시 하였습니다. 안식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규칙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그들은 달인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들을 얼마나 많이 책망했는지 모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그저 보이는 모습으로만 그 규칙들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은 온갖 외식과 탐욕으로 가득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보며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덤인데 겉모습만 예쁘게 칠해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면 매우 아름다운 모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속은 시체가 썩어가는 무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앙생활은 단순히 법과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법과 규칙을 지키되 그 법과 규칙을 만드신 하나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 없는 주일성수, 금주, 금연, 십일조는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의 법을 지키는 이유는 그 법을 주신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정직한 사람이 되거나 의로운 사람, 깨끗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닮은 사람, 예수님을 닮은 사람 되는 것이 우리의 가장 큰 목표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야고보는 우리가 지난주에 살펴보았던 차별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9절을 보세요.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왜 우리가 차별해서는 안 됩니까? 그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차별이 율법에 어긋나는 일이 될까요? 율법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차별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차별한다면 그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닮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일은 결코 작은 일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하는 일에 대해서 그게 무슨 큰일이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살인도 아니고 간음을 한 것도 아닌데 그런 사소한 일을 가지고 따지느냐고 말할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은 전혀 다른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10~11절입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여러분,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는 작은 율법은 없습니다. 사람 차별하는 일을 작게 여기는 사람들에게 야고보는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기 때문에 비록 간음을 하지 않고 살인만 했더라도 그 사람은 온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율법은 각각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율법이 곧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눠질 수 없듯이 율법도 나눠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에 하나님을 닮아가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도록 힘써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을 야고보는 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여기서 자유의 율법이라는 말씀이 참 인상적입니다. 우리는 항상 율법을 무겁고 차갑고 두려운 것만으로 생각합니다. 법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법원에 가야 한다고 하면 다 싫어합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자유의 율법이라고 말씀합니다. 아주 긍정적으로 말씀합니다. 그 이유는 율법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을 닮아가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우리를 벌주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자유를 빼앗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하나님을 닮아서 복된 삶을 살도록 하기 위해 주어졌습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자유의 율법이라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율법은 귀하고 복된 것이지만 분명 그 안에는 심판의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닮도록 하지만, 그것을 불순종했을 때 우리에게 심판이 주어집니다.
하지만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힘써서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한다면 우리가 잘못을 한다고 해도 율법은 우리를 심판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13절을 보세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이 심판을 이긴다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힘쓰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셔서 심판을 이기도록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하고 부족한지를 잘 아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제대로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을 다 아십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에 우리가 순종하려고 힘쓰고, 또한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심판이 아닌 긍휼로서 대하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완벽한 우리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힘쓰는 우리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려고 하는 우리들을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이것을 알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힘쓰는 사람이 곧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법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이 많아질 때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세상 가운데 나타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런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우리를 불러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꼭 기억하고 모든 일에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 닮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겉으로만 괜찮은 이름뿐인 성도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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