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 설교

(05/21,주일-오전) "차별하지 않는 것이 경건이다" / 약 2:1-7 / 고한율목사

(05/21,주일-오전) "차별하지 않는 것이 경건이다" / 약 2:1-7 / 고한율목사

 

 

주일 1,2부 예배

본문 : 21 ~ 7

2017521

야고보서 강해(8) 차별하지 않는 것이 경건이다

찬송가 : 5 , 74 , 220 , 54// 교독문 56

 

미국의 어떤 단체에서 재미있는 실험을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뉴욕의 한 거리에 남자 한 명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지갑을 잃어버렸고, 지금 비행기를 타러 공항에 가야 하는데 돈이 없으니 빌려 줄 수 없겠느냐고 말하도록 했습니다. 돈은 나중에 꼭 갚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실험 첫 날에는 당시에 유행했던 베이지 색 옷을 그 남자에게 입혔고, 그 다음 날에는 검은 색 옷을 입혔다고 합니다. 옷만 다르고 모든 조건은 똑같이 해서 실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실험 결과가 어떻게 나온 지 아십니까? 베이지색 옷을 입었던 날이 검은 색 옷을 입었던 날보다 2배나 더 많은 돈을 빌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단지 옷 색깔만 바꿨을 뿐인데 이처럼 큰 차이가 났습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을까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볼 때 그만큼 겉모습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겉모습만 보고 도와줘야 할 사람인지, 피해야 할 사람인지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의 외모가 사람을 차별하는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성형수술이 이제는 보편화 되지 않았습니까? 취업 면접을 할 때 잘 보이려고 수술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결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성형공화국이라고 부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처럼 성형수술을 해서라도 외모를 아름답게 꾸미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외모로 차별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사람의 보이는 모습만으로 차별하고, 차별을 받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는 겉모습을 꾸미는데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세상 속에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겉모습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세상에서 우리 성도는 무엇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 그 답을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1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차별이라는 단어는 그 뜻이 얼굴을 따진다입니다. 즉 사람의 얼굴만 보고 그 사람에 대한 대우를 다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별입니다.

 

이러한 차별의 대표적인 예가 구약성경 사무엘상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불순종하는 사울을 버리고 새로운 왕을 세우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무엘 선지자를 베들레헴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새의 집으로 가서 그 아들들 중에 한 명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사무엘일 명령을 받아 베들레헴 이새의 집에 갔습니다. 집에 들어갔더니 이새의 7명의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왕을 세우기 위한 면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면접이 시작되자마자 면접관인 사무엘의 마음이 한 사람에게 쏠렸습니다. 바로 이새의 첫째 아들인 엘리압이었습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자마자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여기에 있다고 감탄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즉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무엘상 16: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사무엘이 엘리압에게 반한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그의 용모와 키 때문이었습니다. 즉 사무엘은 얼굴을 따졌습니다. 차별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뭐라고 말씀합니까? 나는 사람과 같이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을 본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중요한 것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 즉 그 사람의 마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의 외적인 모습은 예수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그 사람의 마음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붙여진 별명이 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평소에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종교지도자들이 지어준 별명이었습니다. 이 별명은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을 평소에 가까이 하셨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사람의 얼굴을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그 사람이 어떤 외모를 갖고 있는지, 직업은 무엇이고, 얼마나 재산이 많고, 학력은 어떠한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으십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심은 언제나 그 사람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51:17에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가 되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가 무엇입니까? 상한 심령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크고 근사한 제물보다 비록 세상 속에서 깨지고 상했을지라도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을 더 기뻐하십니다. 여러분 주일 날 교회 오실 때 너무 멋있게 하고 안 오셔도 됩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것처럼 그렇게 웃으면서 안 오셔도 됩니다.

 

살다보면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온갖 염려와 근심을 떠안고 사는 것이 우리입니다. 그래서 오늘이 토요일인지 주일인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꾸역꾸역 교회에 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때는 이런 상태로 교회 가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나오는 그 자체로 훌륭한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상한 심령을 받으십니다. 우리의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절대 멸시하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차별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멋있고 여유 있고, 행복한 사람들만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심령이 가난하고, 애통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을 환영하십니다. 하나님은 목마른 자는 누구라도 오라고 초청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일날 교회 나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일입니다. 상한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들을 붙들어 주시고 그 마음을 고쳐 주시며, 회복시켜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에 참석한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일까요? 아픈 데 안 그런 척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이 괴로운데 안 그런 척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안 그런 척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솔직해야 합니다. 사람 앞에서야 조심해야 할 것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환자가 의사 앞에서 자신이 느끼는 것을 다 말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환자가 아픈 곳이 있음에도 의사 앞에서 계속 숨기고 괜찮다고 한다면 그 병을 고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계속 괜찮은 척한다면 우리의 영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는 분입니다. 우리가 부족하다고 해서 내치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상한 심령으로 오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나오기를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만 우리의 영적인 문제와 갈증이 해결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고 항상 하나님을 찾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은 우리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우리 또한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차별을 한다면 그것을 분명 바른 믿음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무엇입니까? 성도인 우리 안에, 그리고 교회 안에 여전히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실제적인 예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2~3을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초대교회 안에 분명한 차별이 존재했습니다. 교회에 새 신자가 왔습니다. 두 사람이 왔는데, 한 눈에 봐도 두 사람이 전혀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당시 부의 상징인 금반지를 끼고 빛나는 명품 옷을 입고 들어왔습니다. 한 눈에 부자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뒤따라 들어온 다른 사람은 아주 허름한 옷을 입었습니다. 누구 봐도 가난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부자 성도가 들어올 때와 가난한 성도가 들어올 때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이 전혀 달랐습니다. 부자 성도가 들어오자 교회 안에 있던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좋은 자리로 안내하였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성도가 들어오자 이전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성도들이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할 수 없이 한다는 말이 당신은 어디에 서 있든지 아니면 내 발 아래에 앉으시오라고 했습니다. 아주 굴욕적인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이런 일은 요즘 교회에서는 있어날 수 없는 극단적인 일에 속합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신분이 구분되는 계급사회였습니다. 주인이 있고 종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눈에 띄는 이러한 차별이 그렇게 어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는 아주 엄하게 책망하였습니다. 4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야고보는 교회 안에서 부자를 우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멸시하는 일에 대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는 것이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였습니다.

 

분명 교회 안에서 부자와 가난한 사람을 다르게 대하는 것은 차별입니다. 또한 그것은 악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차별하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히려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항상 더 가까이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부자를 우대하고 가난한 자를 멸시하는 것은 차별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고, 가난한 자를 가까이 하신 예수님에 대한 배신입니다.

 

즉 교회 안에 차별이 있는 것은 단순히 나쁘다 정도의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큰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단순한 도덕적인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입니다. 5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교회 안의 차별이 매우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반대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것들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 모두를 뜻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런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셔서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귀하게 사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성경 전체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놀라는 것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그처럼 위대하게 사용하셨던 사람들이 실제로는 우리와 다르지 않은 연약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아브라함, 모세, 다윗입니다. 물론 그 외에도 위대한 사람들이 많지만, 이 세 사람은 특히 위대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우리처럼 부족하고 연약한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이스라엘의 시조입니다. 자기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바치려고 했던 위대한 믿음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가 하나님께 부름 받을 때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십니까? 그는 달신을 숭배하는 우상숭배자였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불러주시지 않았다면 그는 평생 우상을 숭배하다가 망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런 아브라함을 불러서 위대한 인물로 만드셨습니다.

 

모세는 어떻습니까? 모세는 애굽 공주의 아들로 입양이 되어 40세까지 왕궁에서 자랍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사람을 구하기 위해 애굽 사람을 죽이고 되고 그 일이 드러나서 40년 간 광야에서 양을 쳐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부르실 때 그는 나이가 80세인 양치는 노인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모세를 위대한 구원자로 세우셨던 것입니다.

다윗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윗이 왕이 되었을 때 한 순간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한 여인과 간음을 하게 되었고, 그 범죄가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 여인의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간음과 살인을 동시에 범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그처럼 귀하게 쓰셨던 다윗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이처럼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은 정말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한편으로는 우리와 똑같이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차별하는 분이셨다면 결코 아브라함과 모세, 다윗은 쓰임 받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고, 오히려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아끼고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에 이 세 사람을 선택하여 귀하게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사람을 차별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는 일과는 전혀 반대의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교회 안에서 차별을 한다면 이것은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한 일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 생각할 것 없이 우리 자신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은 정말 하나님의 선택을 받기에 합당한 사람들입니까? 그럴 자격과 조건이 있어서 이 자리에 계신 것입니까? 정직하게 생각해 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물론 사람의 기준으로 하면 꽤 괜찮은 분들도 우리 중에는 많을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말씀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통과해서 이 자리에 계신 분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아무도 안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불쌍히 여겨주셨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은혜와 긍휼을 받은 우리들이 우리보다 못하다 하여 사람을 차별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큰 배은망덕한 일이 되는 것일까요?

 

이러한 사실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26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조금 거칠게 말하면 사도 바울이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너희 꼬라지를 한 번 봐라이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자부심이 참 강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 안에 성령의 은사가 많이 나타났고, 그들을 섬겼던 사역자들이 바울과 베드로처럼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자랑할 것이 참 많은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교만해졌습니다. 자신들이 잘나서 이렇게 좋은 교회를 세웠다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너희 꼬라지를 한 번 봐라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차별하는 분이었다면 이 자리에 너희는 있을 수 없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차별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과 반대되는 일이고, 또한 우리를 선택하신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한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의 겉모습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내 사람과 아닌 사람을 구별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대우하고 또한 대우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차별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차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우리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갖고 사랑하며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또한 기꺼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올라가려고 하면 자꾸 내려갑니다. 하지만 내려가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낮아져서 우리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고 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할 때 교회 안에는 눈에 보이는 차별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교묘한 차별 또한 모두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참된 경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세 가지를 말씀드렸는데, 말을 조심하는 것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고,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오늘의 주제인 차별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차별하는 말을 조심해야 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봄으로서 차별하지 말아야 하며, 세속에 물들지 않음으로 세상이 당연시 하는 차별을 멀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참된 경건은 차별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포용하고, 용납하며 이해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나보다 못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관심과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참된 경건을 추구할 때 우리 교회는 누구나 찾아오는 문턱이 없는 교회가 되고, 하나님 나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런 복된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가 사람을 차별하는 모든 말과 태도를 버리고, 예수님처럼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고 사랑을 베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참된 경건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건을 추구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