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 설교

(05/14,주일-오전) "참된 경건" / 약 1:26-27 / 고한율목사

(05/14,주일-오전) "참된 경건" / 악 1:26-27 / 고한율목사

 

주일 1,2부 예배

본문 : 126 ~ 27

2017514

야고보서 강해(7) 참된 경건

찬송가 : 5 , 73 , 211 , 53// 교독문 55

 

지난 주 화요일에는 대한민국 19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선거가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신이 선택한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 기뻐하셨을 것이고, 또 다른 분들은 그렇지 않아서 실망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결과가 나온 이상 우리들은 자신의 선택과 다른 분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특히 믿는 자로서 대통령이 국정을 잘 이끌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지난 한 주 동안은 새로 뽑힌 대통령의 행동 하나 하나가 큰 뉴스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새로 뽑힌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크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가령 대통령이 자리에 앉으려고 할 때, 옆의 비서가 옷을 벗겨 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자기 옷은 자기가 벗겠다고 하며 직접 벗었다고 하지요. 그리고 청와대 관저가 미처 준비가 되지 못하여서 이전에 살던 집에서 출퇴근을 하는데, 출근길에 많은 주민들이 얼굴을 보려고 기다렸나 봅니다. 이 때 대통령이 차를 타고 출발했는데, 갑자기 차가 멈췄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대통령이 차에서 내려 자신을 기다린 주민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고 합니다. 함께 사진도 찍었다고 합니다.

 

지난 금요일에는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근무하는 기술직 근로자들과 함께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한 것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비서실장이 청와대 근로자들에게 대통령이 함께 식사를 하려고 하니 와 달라고 하니까 처음에는 믿지를 않았답니다. 지금까지 그런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청와대에서 수십 년 일해도 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취임한지 3일도 안 돼서 대통령과 함께 식사를 하니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이와 같은 대통령의 행동들을 보며 대체로 많은 국민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대통령이 지난 대통령들과는 달리 권위적이거나 고압적인 자세가 아닌 소탈하고 친화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의례히 대통령처럼 권력을 가진 사람은 이러이러하다는 편견을 지금 대통령은 바꾸고 있는 것이죠. 이런 점에서 저는 지금 대통령이 우리 사회에서 큰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갑질사회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조금의 힘만 있어도 권위의식을 가지고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고 듭니다. 하지만 이런 갑질이 횡횡하는 사회에서 진정한 권력은 군림이 아닌 섬김과 봉사를 위해 주어진 것임을 현 대통령이 잘 보여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분명 보다 더 공정하고 아름다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현재 대통령이 진정한 권력이 군림이 아닌 섬김과 봉사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관련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참된 경건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권력을 군림이라고 오해하는 것처럼 교회 안에서도 경건에 대한 오해가 많습니다. 경건을 단지 눈에 보이는 어떤 종교적인 행위나 어떤 자리를 얻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어떤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보통은 교회를 성실히 다니고, 성경읽기와 기도생활에 충실하며 직분을 받아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을 떠올릴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결코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이런 모습은 경건한 성도라면 당연히 가져야 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외적인 모습만을 가지고 그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제 생각이 아니라, 우리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 가장 경건하다고 인정받았던 사람들이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율법을 연구하고,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특히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이틀은 금식을 하였고,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철저하게 드렸으며, 안식일을 목숨처럼 지켰습니다. 일반 백성들이 볼 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경건한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평가를 내렸습니다.

 

마태복음 23:27~28에 보면 그들을 향한 예수님의 평가가 나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8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를 하였습니다.

 

회칠한 무덤이란 무엇입니까? 무덤을 아름답게 꾸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는 이게 무덤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쉽게 말하면 죽은 시체에 예쁜 화장을 하고, 값비싼 옷을 입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핏 보면 너무 너무 아름다운 사람이 누워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죽은 시체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런 짓을 한다고 책망하였습니다. 즉 그들의 경건은 예쁘게 꾸민 죽은 시체와 같습니다. 그래서 겉만 보면 정말 경건하게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온갖 외식과 불법으로 가득합니다.

 

이처럼 그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가지고 그 사람이 참으로 경건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겉모습만 경건하게 꾸미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회칠한 무덤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얼마든지 속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외모가 아닌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속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기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지름길이 된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사람의 눈을 의식하기보다 언제나 하나님의 눈을 먼저 의식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을 가지는 첫 걸음입니다. 이것을 종교개혁자들은 코람데오’(coram Deo)라는 말로 표현하였습니다. 코람데오는 하나님 앞에서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참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 있다는 의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생각을 품든,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 하나님 앞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에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4:11에 보면 코람데오로 사는 것이 어떤 삶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하밍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저는 우리 모두가 이 말씀처럼 무슨 말을 하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처럼 말하고, 누구를 섬기든지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말과 능력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고 섬긴다면 그것을 통해 우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으로 경건한 삶입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참된 경건이란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종교적인 행동이나 혹은 어떤 직분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능력으로 매사에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우리가 읽은 야고보서 본문은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세 가지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는 첫째, 말을 조심히 하는 것이고 둘째,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이고 셋째,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이 세 가지가 경건의 모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참된 경건을 가지기 위해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인 칼빈은 이 세 가지가 경건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 세 가지 없는 경건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경건에 있어서 가장 필수적인 세 가지라는 것이죠. 이 세 가지를 차례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참된 경건은 말을 조심히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6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자기 혀에 재갈을 물리지 않으면 그 사람의 경건은 헛것입니다. 즉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은 결코 경건한 사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재갈을 물린다고 할 때 재갈은 사람이 타는 짐승인 말을 조정하기 위해서 그 머리에 씌우는 고삐를 뜻합니다. 이 고삐를 통해 말을 원하는 방향으로 가도록 제어할 수 있습니다.

 

고삐를 잡아당기거나 양옆으로 움직일 때 말이 그것을 알아듣고 주인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하지만 고삐가 없는 말은 어떻습니까? 흔히 하는 말처럼 고삐 풀린 말은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말에 탄 사람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위험 속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입에 고삐가 없어서 아무 말이나 막 나오면 그것보다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주먹이나 어떤 도구로 사람을 때리면 상처가 남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이 되어 그 흔적이 없어집니다. 하지만 말로 사람을 때리면 그 상처가 너무나 깊게 새겨집니다. 그래서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회복되지 못하고 남아 있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얼마나 큰 흉기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나중에 살펴보게 될 야고보서 3장에 보면 우리 혀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3:6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분 우리 혀가 얼마나 무서운 흉기인 줄 아십니까?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는, 즉 우리 인생을 다 태워버릴 수 있는 끔찍한 무기가 바로 우리 혀입니다. 그래서 우리 혀를 불이라고 말씀하면서, 그 불이 어디서 나온 불이냐? 지옥 불에서 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실제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경우 말 때문에 상처를 받고, 또한 상처를 주고 있습니까? 사실 가정이나 교회에서 눈에 보이는 신체적인 폭력이 발생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언어의 폭력은 얼마나 자주 일어나고 있습니까? 부부 간에 서로를 무시하는 말을 얼마나 쉽게 내뱉는지 모릅니다. 자녀들에게도 함부로 말하는 부모가 많습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상대의 인격을 무시하는 말은 그 마음에 상처를 반드시 남기는 법입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상처를 받는 대부분의 경우는 말 때문입니다. 특히 상대방의 사정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하는 말 때문에 큰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가 하는 선한 말도 상대에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 27:14에 보면 이른 아침에 큰 소리로 자기 이웃을 축복하면 도리어 저주 같이 여기게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어떻게 축복하는 말이 저주 같이 여기질 수 있을까요? 상황에 맞지 않으면 그럴 수 있습니다.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라도 사정을 알지 못하고 하면 저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욥기에 나오는 욥의 세 친구들을 생각해 보세요. 그들이 한 말은 그 내용만 보면 다 옳은 말입니다. 하지만 욥의 사정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이기 때문에 욥에게는 상처만 주는 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우리가 한 말이 폭력이 되지 않도록 조심 또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시편기자처럼 우리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는 말이 되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남을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잠언 16:24에 보면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꿀송이와 같고 마음에 달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 좋은 약이 될 수 있다면 이보다 더 복된 일이 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오늘 우리 모두가 우리 혀에 재갈을 물림으로 상처를 주는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바른 말을 하는 것, 이것이 곧 참된 경건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우리 입에서 나오는 복된 말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살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우리 입을 항상 주장하여 주셔서 생명과 은혜, 사랑을 전하는 귀한 도구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참된 경건은 어려운 사람을 돌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7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참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특별히 고아와 과부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어려움 당한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즉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것은 우리 주변에 어려움을 당한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을 돌보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경건과 성경이 말씀하는 경건이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경건이라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만을 생각합니다. 즉 예배를 잘 드리고, 말씀과 기도에 충실하고, 받은 직분을 잘 감당하면 그 사람을 경건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참된 경건은 단지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닌, 사람과의 관계 또한 포함합니다. 즉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똑같이 사랑합니다.

 

예수님은 가장 중요한 율법이 뭐냐는 질문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율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함께 사랑하는 것이 율법의 가장 중요한 내용이고, 참된 경건입니다. 하지만 바리새인들은 이 사실을 오해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고르반이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고르반이 뭐냐면 부모님에게 드릴 것을 하나님께 드리면 더 이상 부모에게 무엇을 해 드릴 의무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육체의 부모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이단들이나 하는 엉터리 생각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고르반을 주장하는 바리새인들을 심하게 야단치셨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어겼다고 하면서 야단치셨습니다. 참된 경건은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함께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 빠지면 절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경건일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아는 이기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예수 믿는 우리들을 깍쟁이라고 부릅니다. 자기의 이익을 잘 챙긴다는 뜻이죠. 여러분 우리는 깍쟁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더 나누고 더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계산이 너무 빨라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우리 성도들은 고통을 당한 사람들을 향해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마땅히 가져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우는 자와 함께 울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12:15). 성경의 가르침은 단순합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슬픈 자에게 다가가서 위로해 주고, 아파하는 자들을 일으켜 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정치적 고려나 경제적 목적이 들어있지 않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고통과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에게 관심을 주고 그들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를 보면 우려스러운 모습이 보입니다. 얼마 전 교계 신문을 보았는데, 어느 교회에서 청년 하나가 노란 리본을 달고 무대에 서서 찬양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노란 리본은 세월호 참사를 추모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노란 리본을 달고 무대에 섰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 청년은 교회에서 제명을 당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저는 노란리본을 교회에서 할 수 있다 없다를 말씀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노란 리본이나 세월호 참사가 어떤 면에서는 정치적으로 잘못 이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치인들이나, 혹은 일반 국민들이 할 수 있는 문제제기입니다. 적어도 교회와 성도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교회와 성도는 순수하게 우는 자와 함께 울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자녀를 잃은 아픔에 공감하고 그들을 돕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적어도 교회는 세월호 참사가 정치적으로 어떻다느니 경제적으로 어떻다느니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들에게 세월호 유가족들은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맞아 거의 죽게 된 사람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정한 이웃이 되어 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월호 유가족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변에 어려움을 당한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무엇입니까?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긍휼과 자비로 돌보는 것입니다. 하나님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도 함께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사랑을 가지고 나보다 어려운 상황에 있는 사람들을 관심을 가지고 돌아보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참된 경건입니다. 우리 모두가 참된 경건을 가지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들의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셋째, 참된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27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참된 경건은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속이라는 말은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세상은 두 가지 의미로 사용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대상으로서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 3:16절에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은 하나님이 구원하시고자 하는 세상,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 사람들을 뜻합니다.

 

하지만 세상의 두 번째 뜻은 전혀 다릅니다. 세상의 두 번째 뜻은 하나님을 반대하고 거역하는 세상의 질서나 그 안의 사람들을 뜻합니다. 이것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세속에 물들지 말라고 할 때 세상은 두 번째 의미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참된 경건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즉 하나님을 반대하고 거역하는 이 세상을 따라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롯의 아내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롯은 삼촌인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과 고모라에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정말 모든 것이 다 갖춰진 에덴동산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롯은 그 풍요함에 이끌려 소돔과 고모라에 정착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곳 주민들은 얼마나 악했는지 모릅니다. 경제적으로는 부요하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하게 타락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로 작정하셨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생각하여 그의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은 구원하시기로 했습니다.

 

주의 천사가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기 전 롯과 그의 가족들에게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망치라고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곧 소돔과 고모라에는 불과 유황이 비처럼 내려 완전히 초토화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만 보고 도망치던 롯의 아내가 그만 뒤를 돌아보고 말았습니다. 왜 뒤를 돌아보았을까요? 그곳에 남겨진 집과 재물, 소유가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너무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것이 멸망하는 그 순간에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롯의 아내는 세속에 물든 사람의 최후가 어떤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성도들은 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돈과 명예, 권력을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들이 필요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이것들을 사랑하면 하나님을 몰아내고 우리 인생의 주인노릇을 하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대신 돈과 명예, 권력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하지만 그들의 최후는 롯의 아내와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거나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사랑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의지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모심으로 모든 것을 넉넉히 누리는 삶이 바로 참된 경건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사랑하거나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참된 경건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들은 참된 경건이 무엇인가를 세 가지로 살펴보았습니다. 말을 조심하는 것, 어려움 당한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 이 세 가지가 참된 경건의 필수적인 것임을 알고, 마음에 잘 새기고 실천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사람 눈에 보이는 위선적인 경건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참된 경건을 가지고 복되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은혜가 오늘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