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1,주일-오후)"칭의" / 롬 3:21-24 / 고한율목사
오후찬양 예배 |
본문 : 롬 3장 21 ~ 24절 |
2017년 5월 21일 |
WCF (27) 칭의 |
찬송가 : 325 장, 421 장
오늘은 신앙고백서 제11장 칭의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칭의는 매우 중요한 교리입니다. 종교개혁자인 마틴 루터는 이 칭의 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 교리로 말미암아 교회가 서기도 하고 무너지기도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즉 칭의를 바르게 이해하면 교회가 든든히 서는 반면에, 칭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교회가 결국 무너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생존과 관련된 교리가 바로 칭의 교리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내용은 우리가 주의해서 잘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칭의 교리를 잘 이해함으로 우리의 믿음이 더욱 더 확실해지는 은혜가 임하기를 바랍니다.
그럼 칭의가 무엇인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신앙고백서 11장 1항의 첫 문장을 보시기 바랍니다(29쪽). “하나님께서는 효과적으로 부르신 자들을 값없이 의롭다고 간주하신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 효과적인 부르심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 모든 인간은 죄 가운데 전적 부패의 상태에 있게 되었습니다. 전적 부패의 상태는 곧 구원을 얻는 일에 있어서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1절에 보면 우리들은 뭐라고 표현하냐면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라고 합니다.
죄와 허물로 죽을 너희가 아니라, 죽은 너희입니다. 즉 영적으로 보면 우리 모두는 시체라는 것입니다. 시체라는 것은 전적으로 무능하다는 뜻이지요. 구원을 얻기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와 생명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절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아와 생명을 주신 것을 우리는 효과적인 부르심이라고 했습니다. 성령께서 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죽은 우리들을 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어떤 말씀을 통해 우리를 살리십니까? 복음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성령께서 역사해 주셔서 우리가 그 복음을 믿어 구원을 얻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는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구원자로 오셔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성령께서 이 복음을 믿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믿을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의롭다고 간주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매우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의롭다고 간주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실제로 의로워지지는 않았는데, 의로워졌다고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칭의’라고 부릅니다. 의롭다고 칭한다입니다. 이처럼 칭한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실제로 의로워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의롭지 않은데 의롭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칭의입니다.
자 이것을 우리가 잘 이해해야 합니다. 칭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는 구원을 받았어도 항상 죄책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예수님을 믿고 나서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죄를 단번에 끊으셨습니까? 더 이상 죄의 유혹이 없던가요?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십니까? 그런 사람이 우리 가운데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분명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는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구원을 받기 전이나 받은 후에나 죄를 짓는 일에 변화가 없다면 구원을 받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죄를 계속 짓는 것을 보면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이 거짓이 아닐까? 이런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게 됩니다.
이런 고민이 종교개혁자였던 마틴 루터에게 있었습니다. 마틴 루터는 원래 법률가가 되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친구와 마차를 타고 가다가 번개를 맞았는데, 그만 옆에 있던 친구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루터는 수도원에 들어가 수도사가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말씀연구와 기도뿐만 아니라, 특히 회개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는 의로워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바로 고해성사를 하기 위해 신부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남김없이 철저하게 다 고백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몇 시간씩 고해성사를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고해성사를 듣는 신부가 얼마나 피곤했겠습니까? 하지만 루터는 필사적으로 의로워지기 위해서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루터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루터의 마음에는 자신이 의로워지고 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그 어떤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로워질 수 없다는 사실에 루터는 절망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절망하던 루터에게 강력한 빛이 비춰졌습니다. 그것은 바로 로마서 1:17절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루터는 하나님의 의가 두려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를 어떤 노력으로도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의로 말미암아 자신이 심판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방금 읽은 로마서 말씀을 읽고 그 생각이 완전히 변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루터는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의 의를 얻으려고 몸부림을 쳐 왔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 말씀은 루터가 그토록 얻고자 했던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루터처럼 인간의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얻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 사실을 깨닫고 루터가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즉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루터는 이 사실을 깨닫게 된 후로 죄책감과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이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인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루터는 비록 자신이 여전히 죄를 짓는 삶을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복음을 믿는 자신을 이미 의롭다고 인정하셨음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이 분명 죄인이지만, 동시에 의인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인 것(simul iustus et peccator), 이것이 칭의의 핵심입니다. 칭의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 실제로 의로워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여전히 죄를 짓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십니다.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여전히 죄를 짓는 우리들을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근거가 무엇일까요? 신앙고백서 다음 문장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칭의의 근거는 그들 속에 의를 주입하심이 아니라,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더 나아가 그들의 인격을 의롭다고 간주하시어 기쁘게 받아 주심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심은 그들 안에 무엇이 이루어졌거나 그들이 무엇을 성취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 때문이다.”
이 칭의의 근거는 그들 속에 의를 주입하심이 아니다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은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 ‘의’를 직접 집어넣으시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주장입니다. 로마 카톨릭은 칭의에 있어서 우리 개신교와 그 개념이 완전히 다릅니다. 로마 카톨릭의 칭의는 실제로 거룩해진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화라고 부르는데, 로마 카톨릭은 칭의와 성화를 구분하지 않고 함께 묶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직접 우리에게 넣어주셔서(이것을 주입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실제로 의로워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칭의를 이해하면 루터가 고민했던 문제로 돌아가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실제로 의로워졌다고 하는데 여전히 죄를 짓는 것이죠. 그렇다면 결국 의로워졌다는 것은 거짓이 되는 것이고, 그렇다면 구원 받은 것도 아니게 됩니다. 그러면 교회를 다니면서도 항상 죄책감과 심판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대해서 신앙고백서는 의가 우리 안에 실제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칭해진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실제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의롭다고 인정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처럼 의롭지도 않은데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앙고백서는 그리스도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즉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고백서 나머지 문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 자체나 믿음의 동작이나 기타 복음적 순종을 그들의 의라고 불러 주심이 아니고, 다만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성취하신 의와 및 그의 만족한 속상을 그들에게 전가시키심이다.”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나 봉사, 헌신 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받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완전히 만족하실 만한 순종이나 믿음, 봉사 등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것은 오직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이것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의를 얻으셨는데, 바로 그 의를 예수님은 우리의 것으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로마서 3:24절의 뜻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율법을 완전히 성취하신 것으로 말미암아, 또한 우리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즉 우리가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우리 때문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 때문입니다.
가령 우리가 마지막 심판 날에 하나님의 심판대에 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재판장은 하나님이시고, 검사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우리 인생에 있었던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다 읊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우리 얼굴이 화끈거릴까요? 어느 누구도 그 앞에서 고개 숙이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두렵고 무서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도 숨김없이 우리의 죄악이 다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검사의 말을 들은 재판장은 어떻게 판결을 내릴까요? 당연히 사형 밖에 없지요. 멸망, 지옥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처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사형, 멸망, 지옥을 선고받을 그 순간에 우리의 변호인인 예수님이 나섭니다. 예수님은 변호인인데, 아주 특별한 변호인입니다. 통상적으로 변호인은 말로만 도움을 주는데, 예수님은 말로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한 일을 근거로 우리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예수님은 심판자이신 하나님에게 죄인들을 위해 자신이 한 일을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근거로 우리의 무죄를 주장합니다.
분명 심판자인 하나님이 우리만 보시면 우리는 당연히 유죄를 받아 멸망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변호인인 예수님을 보십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 죄의 값이 지불되었음을 보시고 우리에게 무죄 선고를 내리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분명 우리가 죄인이지만 예수님 때문에 무죄 선고를 받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칭의입니다. 죄인이면서 동시에 의인인 것이죠.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시면서 우리에게 무죄 선언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을 우리의 변호인으로 모실 수 있을까요? 다르게 말하면 우리들은 어떻게 칭의를 얻을 수 있을까요? 단 하나의 방법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신앙고백서 마지막 문장을 보도록 하겠습니다(30쪽). “이 점에 있어서 그들은 그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의 의를 받아 그 안에서 안식할 뿐이다. 이 믿음 그것도 그들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물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영접할 때 예수님이 얻으신 의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이 믿음은 어디에서 나는가? 우리가 스스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13절을 보시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누가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습니까?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즉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자들만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칭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칭의가 은혜로 주어진다고 할 때 그 방법은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칭의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이것을 한자어로 이신칭의라고 말합니다. 믿음으로써 의롭게 칭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칭의에 대해서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칭의는 교회를 서게도 하고 무너지게도 하는 중요한 교리입니다. 칭의를 잘못 이해하면 성도는 율법주의에 빠지게 되고, 항상 죄책감과 심판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죄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늪 밖에서 우리를 위해 손을 내밀고 계신 예수님을 붙잡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 외에 의롭게 되는 방법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우리는 의로워질 수 있습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죄책감을 주고 심판의 두려움을 줄 때 우리들은 예수님을 앞세워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얻으신 의를 근거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았음을 확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더욱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힘 있게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칭의의 은혜를 깊이 깨달음으로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고, 예수님을 더욱 더 의지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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