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 설교

(06/18,주일-오후) "칭의(3)" / 고후 5:21 / 고한율목사

(06/18,주일-오후) "칭의(3)" / 고후 5:21 / 고한율목사

 

오후찬양 예배

본문 : 고후 521

2017618

WCF (29) 칭의(3)

찬송가 : 331 , 488

 

오늘은 칭의세 번째 시간입니다. 우리는 앞서 두 번에 걸쳐 칭의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칭의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는 것이 칭의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칭의가 중요한 이유는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의 가장 기초적인 내용이 바로 칭의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건물을 세운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건물을 얼마나 높고, 아름답고, 멋있게 짓는가 그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건물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멋진 건물을 짓는다고 해도 기초가 튼튼하지 못하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든든한 기초가 있어야 그 다음에 멋지고 아름다운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받은 구원의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면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고, 항상 의심하고 불안해 하면서 엉뚱한 짓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구원의 기초가 되는 칭의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칭의는 무엇입니까? 칭의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죄인인 우리가 예수님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재판을 받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재판장이 되십니다. 그리고 사탄이 검사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피고, 즉 죄인으로 심판을 받습니다. 검사인 사탄은 우리의 모든 죄를 하나님 앞에서 다 폭로합니다. 우리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작은 죄부터 우리가 알지 못하고 지은 죄까지 전부다 재판장 앞에서 고발합니다. 검사의 고발을 듣는 우리들은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두 맞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당연히 유죄 판결을 받아 영원한 지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결론이 난 재판입니다.

 

그런데 이 때 변호석에 있던 한 분이 나섭니다. 바로 우리 주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으로 나가셔서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의로운 재판장이신 하나님, 지금 검사가 하는 모든 말들은 맞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지옥에 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변호인인 제가 이 사람을 위해 한 일을 봐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아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간이 되어 이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할 모든 일들을 하고, 또한 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제가 이 땅에서 모든 율법을 지킨 것과 십자가에서 죄인을 위해 대신 죽은 것을 통해 얻은 제 를 이 사람의 것으로 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저 죄인을 판결하실 때, 저 죄인이 제 를 가진 자로 여겨 판결해 주십시오.

 

검사와 변호인의 말을 다 들은 하나님께서 판결합니다. “피고는 분명 검사의 말대로 온갖 죄를 지었으므로 영원한 지옥으로 가야 마땅하나, 변호인인 예수가 자신의 의를 이 죄인의 것이 되게 하였으니, 예수의 의로 말미암아 죄인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다.” 여러분, 이것이 칭의입니다. 우리가 분명 죄인이지만, 예수님의 의 때문에 우리가 무죄하게 여김을 받는 것,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 것이 이것이 칭의입니다. 바로 이 칭의로 말미암아 항상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신앙고백서 113항에서는 칭의의 근거가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제가 앞서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칭의의 근거는 두 가지인데, 첫째는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순종하신 것이고, 둘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신앙고백서 113항 첫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30).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순종과 죽으심에 의하여 칭의되는 자들의 죄값을 충분히 지불하셨다. 그 결과로 그들을 위하여 하나님의 공의를 적합하고 참되고 충분한 보상으로 만족시키셨다.아담 이후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죄 가운데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결코 죄인을 용납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심판을 하셔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대신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순종과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의 공의가 만족되었고, 우리에게 구원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1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를 짊어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서 의로운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질문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셔서 우리 대신 율법을 순종하시고,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예수님께 그럴 필요가 무엇이 있는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무슨 빚을 지거나 사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는가? 여기에 대해 신앙고백서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3(1)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부께서는 값없이 그리스도를 그들에게 주셨고, 또 그리스도의 순종과 그의 만족한 속상을 값없이 그들 대신으로 수납하신 것이다. 이것은 그들 안에 있는 무엇 때문이 아니다. 이러므로 그들의 칭의는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말이 길지만 핵심 단어만 찾으면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핵심단어는 값없이”, “거저 주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성취하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을까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신앙고백서가 하는 말처럼 우리 안에 있는 무엇 때문이 아닙니다. 즉 우리가 너무 사랑스럽다거나, 우리의 덕을 보시려거나, 우리가 불쌍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 쪽에는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죄인 가운데 사셔야 했습니까? 왜 율법을 만드신 분께서 율법 아래에서 순종하는 삶을 사셔야 했습니까?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죄와 죽음 아래서 신음하는 사람들 곁에 계셔야 했습니까? 왜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습니까? 그 어떤 설명으로도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입니다. 여기에 대한 합당한 답은 단 하나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그 어떤 노력이나 공로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칭의를 받은 우리들은 오직 하나님을 찬양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신앙고백서 113항 마지막 부분을 보겠습니다. “(2) 그러니 만큼 하나님의 엄정하신 공의와 그의 풍요하신 은혜는 죄인들이 받은 칭의로 인하여 영광을 나타내신 것이다.칭의를 통해 우리들은 하나님의 엄정하신 공의와 풍요하신 은혜 두 가지를 동시에 봅니다. 공의와 은혜를 함께 붙여 놓는 것이 어색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공의롭게 하면 은혜가 없는 것 같고, 은혜가 있으면 공의롭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이렇게 꼭 말씀하는 분이 계십니다. “모든 것을 은혜로 합시다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어떤 문제가 있어도 눈감아 주자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은혜를 이처럼 공의를 희생시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지만,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공의와 은혜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희생될 수 없습니다. 이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가 동시에 드러난 곳입니다.

 

먼저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난 곳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에서 우리 인간의 죄가 심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죄인인 우리가 십자가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대신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절대 죄를 눈감으실 수 없습니다. 반드시 죄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 대신 그의 아들 예수님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끔찍한 죄가 심판 당한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난 곳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난 곳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으심으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자신의 가장 귀한 독생자를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드러난 놀라운 곳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바르게 아는 성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와 은혜를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보다 우리가 감사하고 찬양해야 할 것이 또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6:14에서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나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깊이 알고, 그 은혜와 사랑에 항상 감사드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얼마나 크고 강력한지를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항상 깊이 체험하며 감사드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한편 신앙고백서 114에서는 우리에게 주어진 칭의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31).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하나님은 영원 전에 모든 택한 자들을 의롭다 하시기로 예정하셨고, 그리스도는 때가 차매 그들의 죄를 인하여 죽으셨다가 그들의 칭의를 위하여 부활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이 의롭다 함이 되는 것은 성령께서 실제로 적당한 때에 그리스도의 은혜를 실시하심으로 비로소 실현된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각각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성부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모든 택한 자들을 의롭다 하시기로 예정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영원 전부터 모든 택한 자들을 의롭다 하시기로 예정했다는 것은 구원이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전적인 은혜라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기로 예정된 택자들을 위해 정하신 때에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택자들에게 전달할 의를 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령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적당한 때에 우리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의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즉 성부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계획하셨고, 성자 예수님께서 그 구원의 계획을 실현하셨고, 성령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인 각자에게 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칭의를 얻는 것, 구원을 받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구원을 받은 것에 대해 단지 예수님만을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 모두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역사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찬양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 하나님께 올려야 마땅한 것입니다.

 

한편 신앙고백서는 칭의를 받은 성도들, 즉 하나님께 이미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이 죄에 빠졌을 경우 어떻게 되는지에 대해서 설명해 줍니다. 5입니다. “의롭다 하심이 된 자들이 혹시 죄를 범해도 하나니은 그들의 죄를 계속적으로 용서하신다. 비록 그들이 범죄한다 해도 칭의된 상태에서 떨어지게 되는 일은 없다. 그러나 그 범죄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의 부성적 분노를 당하게 된다. 그런 때에 그들이 스스로 낮아져서 죄를 자백하며 용서를 빌고, 믿음과 회개를 새롭게 하기까지는 하나님의 얼굴빛을 자기들에게로 회복하지 못한다.

 

긴 말씀이지만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미 칭의를 받은 성도는 절대 칭의를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를 계속 지어도 괜찮은 것이냐? 물론 이렇게 묻는 것은 우리가 정말 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참 의미를 깨닫는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대답하자면 죄를 계속 지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하나님의 징계는 마지막 날 심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신앙고백서는 이 징계를 부성적 분노, 즉 아버지의 분노라고 표현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죄를 짓는 우리 성도들을 아버지로서 야단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 이미 구원받은 우리들은 절대로 구원을 잃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죄를 계속 지어도 괜찮으냐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죄를 짓는 우리들을 징계하셔서 결국은 죄를 짓지 못하도록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때려서라도 우리를 칭의 받은 성도답게 만드십니다. 그러니 하나님께 맞고 싶으면 계속 죄를 지어도 됩니다. 하지만 곧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우리는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 정도로만 이해하면 안 됩니다. 죄를 안 지으면 훌륭한 성도라고 생각하면 너무 초라한 것입니다. 가령 훌륭한 자녀가 누구인가? 그저 밖으로 싸돌아다니지 않고 집에서 아무 말썽부리지 않는 것이라고 하면 너무 초라한 것입니다. 훌륭한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해 부모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 이것이 훌륭한 자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단지 죄를 안 짓는 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실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우리는 매우 적극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이미 구원을 받았으니 내 마음대로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 어떻게 됩니까? 신앙고백서가 가르치는 대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빌고 믿음과 회개를 새롭게 하기까지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꼭 기억하고 단순히 죄를 짓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신앙고백서 116을 보겠습니다. “구약 제도 아래 있던 신자들의 칭의는 모든 면에 있어서 신약제도 아래 있는 신자들의 칭의와 동일하다.이 말씀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 구약시대에 살던 성도들이나 예수님이 오신 후 신약시대에 사는 성도들이나 그 구원은 다르지 않고, 정확히 똑같다는 뜻입니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 모두 예수님을 믿음으로 칭의를 얻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구약시대의 성도들은 앞으로 오실 예수님을 믿었다면,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이미 오신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차이 뿐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신앙고백서가 가르치는 칭의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았습니다. 처음에 말씀드린 대로 칭의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오늘 말씀을 잘 새겨서 우리에게 주신 칭의의 은혜가 얼마나 복된 지를 깨닫고, 그 은혜에 항상 감사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께 항상 영광을 돌리고, 든든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