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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10/30,주일-오전) "세례의 의미" / 골 2장 11 ~ 12절 / 고한율목사

(10/30,주일-오전) "세례의 의미" / 골 2장 11 ~ 12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2 장, 68 장, 436 장, 54 장 // 교독문 89번(세례)

161030_세례의의미-고한율목사.pdf



 전에 사역했던 교회에 군선교를 담당하는 부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서가 하는 가장 중요한 일 중에 하나가 군인들에게 세례를 주는 일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 일 년에 몇 차례씩 전방에 있는 한 부대의 신병훈련소를 방문하였습니다. 세례를 주는 주일 한 주 전에 미리 가서 세례를 신청한 훈련병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한 주 후에 가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게 됩니다. 


 저도 순서가 되어서 몇 번 갔는데, 갈 때마다 많게는 100명씩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마치 붕어빵 찍어내듯이 병사들이 앞으로 차례로 나오면 세례를 베푸는 식이었습니다. 물론 아주 귀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이렇게 하는 것이 맞나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식을 하기 전에 설교를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리 긴 설교가 아님에도 많은 병사들이 머리를 숙이고 잠을 잡니다. 


 그리고 세례식을 베푼다고 하면 자던 병사들이 우르르 나오는 것입니다. 물론 그 중에는 정말 믿음으로 세례를 받는 병사들도 있었겠지만, 많은 경우에는 세례를 받을 때 주는 피자와 콜라를 먹기 위해 받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해 초겨울이었습니다. 이번에도 순서가 되어서 세례를 베풀기 위해 갔는데, 교회 안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일단 복장부터 달랐습니다. 이전에는 조금은 편한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당장이라도 전투에 나갈 수 있을 것 같이 준비된 복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 달랐던 것은 얼굴 표정이었습니다. 이전에는 대부분이 자거나 쉬려고 앉아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지금은 그 얼굴이 너무나 비장하였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그렇게 집중해서 듣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얼굴 숙이는 병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있느냐고 군종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지금 병사들이 유서를 쓰고 왔다는 것입니다. 세례식을 하기 얼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면 많은 분들이 기억하고 있을 텐데, 북한이 연평도를 공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온 나라가 난리가 났고, 전방부대는 실제로 전쟁에 대비하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런 상황 속에 유서까지 쓰고 교회에 왔으니 병사들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제가 세례를 베푸는데 받는 병사들이 얼마나 간절한지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장 어떻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정말 간절하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저는 어떤 면에서 이 병사들이 하나님께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평소 같았으면 얼렁뚱땅 피자나 콜라 얻어먹기 위해 세례를 받았을 텐데, 위기의 상황 때문에 하나님을 의지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세례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세례의 의미 가운데는 죽음과 생명이 담겨 있는데, 그것을 피부에 와 닿게 체험하였다는 점에서 특별한 은혜를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교회에서 학습과 유아세례, 세례식이 있는 날입니다. 세례는 우리 성도가 평생에 단 한 번 받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는 매우 중요한 성례이지만, 한 번하고 나면 끝이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에는 별 관심을 갖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세례 안에는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 그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는 당사자는 물론이고 이미 세례를 받은 성도님들도 이 세례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 보는 것은 꼭 필요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세례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말씀을 함께 듣고자 합니다. 먼저 세례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보다 먼저 떠올려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가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세례는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믿음은 어디에서 나는 것입니까? 로마서 10: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믿음이 어디에서 난다고 말씀합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습니다. 즉 말씀을 통해 믿음이 생기고, 그 믿음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아니면 믿음이 생길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때 귀로 듣는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눈으로 볼 수 있는 말씀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례입니다. 여기 성례 안에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세례가 있고, 또한 우리가 사경회 마치고 그 다음 주에 하게 될 성찬이 있습니다. 교회는 두 가지 성례를 지키는데, 바로 세례와 성찬입니다. 혹시 천주교회를 다녀보신 분이 계시다면 거기에는 성례가 우리보다 훨씬 많은 일곱 가지, 7성례가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개신교는 오직 두 성례만을 지킵니다. 그 이유는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이 지키라고 명령하신 성례가 바로 이 두 가지, 세례와 성찬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오직 예수님이 명하신 두 가지 성례만이 참된 것으로 알고, 세례와 성찬만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세례와 성찬을 지키라고 하셨는데, 우리는 이것을 성례라고 부르며, 이 성례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바로 보이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성례 자체가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세례를 행할 때, 성찬을 행할 때 실제로 우리들은 그것을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세례를 행할 텐데,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례를 통해 하나님은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주십니까? 무엇보다 세례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것을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세례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먼저 할례를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둘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구약성경의 할례가 신약성경의 세례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세례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 할례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할례는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창세기 17:10~11절에 보면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몸에서 날 모든 후손들이 다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할례는 남자의 생식기 피부를 칼로 자르는 것인데, 이것을 언약의 표징이라고 말씀합니다. 쉽게 말하면 할례는 이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시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남자의 생식기 피부를 베는 할례에는 두 가지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첫째, 할례는 죄를 자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피부를 자르는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은 죄를 잘라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할례를 육의 몸을 벗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육의 몸이란 단순히 우리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있는 죄된 본성을 뜻하는 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 죄된 본성을 잘라서 더 이상 죄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처럼 거룩하게 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세례에서도 똑같이 보게 됩니다. 세례는 할례처럼 몸의 일부분을 칼로 자르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물을 몸에 뿌립니다. 그런데 물을 몸에 뿌릴 때,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이 씻어주신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까? 여전히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죄 가운데 살면서 성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 모든 죄가 씻어진 사람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고, 성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모든 죄가 씻어졌음을 우리에게 말씀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 혹은 세례를 받는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씻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우리의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우리의 착한 행실로 우리의 죄를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 헌신과 봉사를 통하여 죄를 조금이라도 없이할 수 있을까요? 절대 불가능합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죄를 해결할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 않으셨다면, 우리 중에 어느 누구도 죄 씻음을 받을 수 없고, 그렇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심으로 그 피로 우리의 흉악한 죄가 다 씻어진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뿌리는 그 물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며, 그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함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성도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우리들은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의 모든 죄가 깨끗이 씻어졌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피로 씻겨지지 않는 죄는 없습니다. 그 어떤 흉악한 죄라도 예수님의 피가 그 위에 뿌려지면 깨끗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예수님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가 씻어졌음을 믿고, 더 이상 죄의 노예로서 죄에 끌려 다니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둘째, 할례는 그 사람이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인 것을 의미합니다. 할례를 행할 때, 몸의 살을 잘라냄으로써 그 흔적이 영원히 그 몸에 남게 됩니다. 이와 같이 그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할례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세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이 말씀에는 세례를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단어가 나옵니다. 바로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세례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살아나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연합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과 결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할례는 몸의 흔적을 통해 하나님과 우리가 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면, 세례는 예수님과의 연합을 통하여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은 성도는 더 이상 혼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연합되어서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을 살게 됩니다. 이러한 사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말씀이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우리는 무엇보다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죽음을 경험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우리 옛사람이 죽었다고 표현합니다. 우리 옛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인생의 주인을 자신이라고 여기고, 이 세상의 것들을 사랑하며, 자기 욕심과 탐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이 그럴 듯하게 보여도 그 결국은 멸망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없이는 그 어떤 인생도 참된 만족을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탕자의 이야기를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서 외국에 나가 방탕하게 살다가 재산이 다 떨어져서 비참한 삶을 살았던 아들이 다시 아버지에게 돌아오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아들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아버지를 떠났다는 것이 이 아들의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아버지를 떠나 비참한 삶을 산 아들에게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었습니다. 좋은 친구나, 일자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잠시 잠깐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단 하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탕자 이야기를 하고자 하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아담 이후로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간은 탕자처럼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 근본적인 해결책이 무엇이냐? 세상 사람들이 말하듯이 돈이나 권력, 사람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단지 임시 치료책은 될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근본적인 해결책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올 때 죄와 비참의 삶에서 구원받을 수 있게 되고,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은혜의 박사라는 별명을 가진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 첫 장에서 고백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 안에 들어올 때에야 비로소 안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몰아내고 내가 주인인 삶을 사는 사람은 결단코 이 세상에서 참된 만족과 안식을 얻을 수 없습니다. 


 돈과 사람을 쫓아가고, 온갖 쾌락에 몸을 맡겨 보지만 결국은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무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목마른 사람에게 바닷물이 더한 갈증을 일으키는 것처럼, 이 세상의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더 갈증나게 하고, 더 배고프게 만들 뿐입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우리는 참된 만족을 얻게 됩니다.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 옛사람이 죽어야 합니다. 나를 주인으로 삼는 삶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대신 예수님을 우리 인생의 주인으로 모셔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새사람으로 사는 삶이라고 표현합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참된 만족과 평안을 얻게 될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에 다시 돌아올 때 참된 만족과 평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예수님과 함께 우리의 옛 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부활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 새사람이 된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마땅하겠습니까? 더 이상 옛사람으로 행하던 때와 같이 자기 마음대로 살려고 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세례를 받을 때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새사람으로 거듭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데, 바로 성령께서 이 일을 하시고, 또 그 성령님이 계속해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으라 그리하면 성령의 선물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성령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데, 그 성령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옛사람이 아닌 새사람으로 살도록 힘과 능력을 더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 우리가 새사람이 되었다고 할 때,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새사람으로 살 능력 또한 같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새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곧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세례를 받은 우리들에게 성령님을 선물로 주셔서, 새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은혜와 능력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령님의 능력과 인도를 받아 새사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례는 우리가 예수님과 연합하여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으로 사는 것을 뜻하고, 성령을 선물로 받아 새사람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이며, 또한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모두가 세례의 의미를 바르게 깨닫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세례를 받은 자로서 죄를 멀리하고, 예수님과 연합하여 옛사람은 죽고, 이제 새사람이 되었음을 알고, 성령을 따라 항상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례 받은 자로서 더 이상 세상을 쫓아가지 않고,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참된 만족과 평안을 얻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주신 죄 사함의 은혜와 새사람으로 살아가는 능력을 충만히 받아 누리는 오늘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