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일 설교

(10/23,주일-오전)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고린도전서 14:20~24 / 고한율목사

(10/23,주일-오전)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 고린도전서 14:20~24 / 고한율목사

161023-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한율목사.pdf


찬송가 : 2 장, 67 장, 366 장, 54 장 // 교독문 35번



 보통 한국교회 성도들은 참 순수하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꼭 좋은 의미로만 사용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순수하다는 것은 딴 생각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뜻인데, 나쁜 쪽으로 생각해 보면 아무 생각 없이 주는 대로 덥석 받아들인다는 뜻도 됩니다. 작년에 우리 남전도회원들과 함께 어떤 기도원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가서 저녁 집회에 참석했는데, 곳곳에서 많은 성도들이 참석을 하였습니다. 


 함께 뜨겁게 찬양하고 강사 목사님이 나와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몇몇 분들이 목사님의 말이 끝날 때마다 아주 크게 ‘아멘’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보면서 ‘참 뜨겁고, 간절한 심정으로 말씀을 듣는구나’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이 말씀을 전하다가 조금 샛길로 빠져서 자기 가족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딸이 어떻고, 아내가 어떻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에도 몇몇 분들이 아주 크게 “아멘” “아멘” 하였습니다. 


 제가 조금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아멘”의 뜻은 무엇입니까? 아멘은 “참으로 그렇습니다.” “틀림없습니다.” 이런 뜻입니다. 그런데 단순한 동의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우리 예수님께서 어떤 사실을 강조할 때, 이 말씀은 정말 틀림없이 중요한 말씀이라고 하실 때, 꼭 덧붙였던 말이 있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여기 두 번 반복되는 진실로, 진실로가 바로 아멘입니다. 성경 원어로 예수님은 “아멘, 아멘, 레고 휘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입니다. 


 그러니까 아멘은 아무데나 막 붙이면 안 됩니다. 절대 틀림없는 말씀에만 붙여야 하는데, 그것은 하나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 외에 틀림없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을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그렇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아멘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엉뚱한 말에 아멘을 하는 잘못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처럼 신앙이 순수하다는 것은 참 좋은 말이지만, 그것이 아무 생각 없이 덮어 놓고 믿는다는 것을 뜻한다면 결코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결코 덮어 놓고 믿는 것을 바른 믿음이라고 가르치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또한 그것을 분명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20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지혜는 더 정확하게 말하면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생각하는 일에 있어서는 아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신 생각하는 일에 장성한 사람, 다시 말하면 어른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는 말씀을 덧붙입니다. 생각하는 일에는 어른이 되고, 악에는 어린 아이가 되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의 뜻을 그 유명한 솔로몬의 재판이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렸던 왕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이 세상 어느 누구도 가지지 못한 놀라운 지혜를 소유했던 것으로 유명한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창기, 즉 몸을 파는 여인 두 명이 왕 앞에 나와서 재판을 받았습니다. 재판의 내용은 이랬습니다. 한 집에 사는 두 여인이 공교롭게도 똑같이 임신하여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사흘 간격으로 둘 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밤에 잠을 자다가 그만 자신의 아들 위에 몸을 올리게 되었고, 아이가 질식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딱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아이가 죽은 것을 확인한 후에 다른 여인이 자고 있는 방으로 가서, 죽은 자기 아이와 자고 있는 여인의 아이를 바꿔치기 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어 아이에게 젖을 물리려고 하니 아이가 죽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까 자기 아이가 아니었습니다. 아무리 갓난아이라도 엄마는 자기 아이를 알아보는 법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아이를 바꿔치기한 여인에게 가서 따졌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바꿔치기한 여자는 오리발을 내밀면서 살아 있는 아이가 내 아이가 맞다고 우겼습니다. 만약 요즘에 이런 일이 있었다면 사실 문제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DNA 조사를 하면 금방 나오겠지요.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 이야기입니다. 서로가 옳다고 우기면 결코 풀기가 쉽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사정을 들은 솔로몬 왕이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됩니까?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유명한 판결을 내립니다. 칼을 가져와서 살아 있는 아이를 반으로 쪼개어 각각 여인들에게 나눠주라는 것이죠. 


 이 때 두 여인의 반응이 전혀 다르게 나타났습니다. 진짜 아이의 엄마는 어떻게 했습니까? 절대 그러면 안 된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포기할 테니 아이를 살려만 달라고 했습니다. 반면에 아이를 바꿔치기한 여인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이를 반으로 쪼개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공평하게 해 달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런 두 여인을 보고 솔로몬은 아이를 죽이지 말라고 한 여인이야말로 진짜 어머니라고 말하고 아이를 그 여인에게 주라고 판결하였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어른처럼 생각한다는 것, 즉 성숙하게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어른처럼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내가 아닌 상대방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을 뜻합니다. 아이의 진짜 엄마와 아이를 바꿔치기한 여인의 차이가 무엇이었습니까? 진짜 엄마는 자기보다 아이를 더 생각하였습니다. 성경에 보니까 “여자가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았다”고 말씀합니다. 진짜 엄마는 자신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아이만을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아이를 바꿔치기한 여인은 어떻습니까?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습니다. 아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나에게 유익이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저는 이처럼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솔로몬은 이러한 사실을 꿰뚫어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칼로 반으로 나누라고 명령함으로써 누가 아이를 진정으로 생각하는 엄마이며, 반대로 누가 악한 마음을 품은 여인인지를 밝히려 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장성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자기중심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성도의 모습입니다. 반대로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는 말씀은 자기중심적인 삶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생각하는 일에는 어린아이와 같고, 악에는 장성한 어른과 같은 신자가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기보다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신자가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다툼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해 준다면 교회 안에 다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툼과 분쟁이 왜 일어납니까? 결국은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더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까? 내 알량한 자존심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니까 미움이 사라지지 않고, 누가 더 잘 났는지 싸우게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방언과 예언에 대해 말씀하면서 이 문제를 계속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왜 방언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까? 그 근본적인 이유에는 다른 성도들보다 자신을 더 높이려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더 우월하고, 성숙한 신자라는 것을 방언을 통해 증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과시하듯이 방언으로 기도하고, 방언으로 찬양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볼 때 이것은 악한 일이었습니다. 아니 예배 시간에 방언을 하는 것이 어떻게 악한 일이 될 수 있습니까? 성령의 은사를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잘못된 일이 될 수 있습니까? 하지만 사도 바울은 악한 일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중요하게 생각한 것, 자기중심적인 그것이 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이 죄입니다. 첫 인간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이 첫 범죄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이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먹었을까요? 뱀이 뭐라고 꼬셨습니까? 그것을 먹으면 너희가 하나님처럼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의 진정한 의미는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면 하나님 없이도 너희 마음대로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것이 죄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보다 이웃보다 자기 자신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것,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성령의 은사인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마음의 동기가 다른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기를 높이려고 한 일이라면 그것은 악한 일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방언을 통해 자기를 과시하려 했던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범했던 잘못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은 방언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많은 봉사를 하고, 헌신을 하며, 많은 것을 드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국 나를 높이기 위함이고, 자신을 자랑하기 위함이라면, 그 일이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할지라도 결국은 악한 것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무엇을 하든 자기중심적인 태도에서 벗어나서, 먼저는 하나님, 먼저는 다른 사람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살펴본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사랑이 아니면 아무리 대단한 것도 소용없다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사랑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단히 말하면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벗어난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0:24절에서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된다는 것의 실제 예를 자신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전에 고린도전서 8장을 보면서 이미 이야기한 내용입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느냐 마느냐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니까 먹어도 상관없다고 하는 성도들과 그래도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으면 우리가 부정해질 수 있으니까 먹어서는 안 된다는 성도들이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누구 편을 듭니까? 먹을 수 있다는 편을 듭니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맞습니다. 우상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 또한 그냥 먹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한 후에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8:13절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울은 고기를 먹어도 괜찮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전혀 거리낌 없이 없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내가 고기를 먹으므로 시험을 당한다면 나는 그 형제를 위해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지혜에 장성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성도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자기보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이것이 지혜에 장성한 자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예배 중에 방언을 말함으로 다른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렸던 사람들에게, 성숙한 신앙은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한편 오늘 본문 21절부터는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행동이 될 수 없는 것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방언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성격 때문입니다. 2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에 기록된 바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다른 방언을 말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그들이 여전히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이 말씀은 구약성경 이사야서 28: 11~12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서 심판의 의미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말씀을 하셔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듣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택한 최후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다른 방언을 하는 자들을 데리고 와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내 아이가 지독하게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무리 말하고, 심지어 때려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럴 때 부모가 최후의 방법으로 어떻게 합니까? 말 안 듣는 아이 앞에서 깊은 한 숨을 쉽니다. 


 이 깊은 한 숨은 천 마디의 말보다 더 강력한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는 것이죠. 이렇게 부모가 아무 말 안하고 깊은 한 숨을 쉬면 그 때는 돌아와야 합니다. 적어도 지혜로운 아이라면 그렇게 해야 합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다른 방언을 하는 사람들을 데려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한 것은 이와 같은 것입니다. 말을 듣지 않으니까 알아듣지 못하는 말로라도 경고를 주는 것이죠.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 방언조차도 듣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보면 방언은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을 위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22절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아니하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나 예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는 자들을 위함이니라” 방언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입니다. 여기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한다는 말은 방언이 그들에게 유익이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사실을 표시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방언을 예배시간에 하는 것은 예배에 참석한 아무에게도 유익되지 않습니다. 


 2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온 교회가 함께 모여 다 방언으로 말하면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 사도 바울은 여기서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듭니다. 만약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좋아하는 방언을 모든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한다고 치자, 그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느냐 하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방언의 은사를 받지 않은 사람들과 또한 초대를 받아 예배에 참석한 믿지 않는 사람이 이 광경을 보고 모두 미쳤다고 하게 될 것입니다. 


 즉 방언 그 자체가 예배에 참석한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아무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성도들이 미쳤다는 인상만을 주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반면에 예언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예언이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24~25절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 만약 예배 시간에 모든 성도들이 예언을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예배에 참석한 성도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도 예언을 통하여 책망을 받고,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을 전파하게 될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란 미래의 일들을 미리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 말씀을 풀어 설명하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풀어 가르칠 때 그것을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책망을 받게 되고, 판단을 받게 되며, 그 마음에 숨겨진 죄가 드러나게 되어 하나님 앞에 굴복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고, 그 하나님을 전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7절에 보면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야고보서 1:21절에 보면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씀합니다. 이 두 말씀 모두 말씀을 듣는 것, 즉 예언을 듣는 것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구원을 준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언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고, 책망하고 판단하여, 하나님께 나오게 하고, 믿음을 가지게 하여 구원을 얻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불신자들로 하여금 미쳤다는 평가를 받게 하는 방언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책망하고, 믿음을 주어 결국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예언을 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왜 방언을 했다고 했습니까? 자신을 드러내고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성숙한 신자인지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지혜에는 장성한 어른이 되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 중심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서 다른 사람을 먼저 위하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으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예배 시간에 방언이 아니라, 예언을 하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더 유익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태도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지혜에는 장성한 사람이고, 악에는 어린아이입니까? 아니면 반대로 지혜에는 어린아이이고, 악에는 장성한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만약 나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지혜에는 어린아이요, 악에는 장성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는 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나의 만족을 위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높이기 위해서, 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나를 자랑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먼저는 하나님을 위해서, 먼저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생각하고 섬기고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 것입니다. 더욱 우리를 귀히 여겨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자기를 위하여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이고, 주님을 위하여 낮추는 자는 높아질 것이라고 우리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틀림없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위해, 이웃을 위해 항상 생각하고, 섬기며 산다면 그 사람이야말로 우리 주님의 눈에 보시기에 가장 성숙하고, 훌륭한 성도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해 먼저 생각하고, 섬김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성숙한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