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29,주일-오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 (2)" / 고전 9장 1 ~ 18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 장, 35 장, 452 장, 171장 1절 // 교독문 16번
160529_성숙한그리스도인의 삶2-고한율목사.pdf
지난 주 시간에 살펴본 고린도전서 8장 말씀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성도가 과연 먹을 수 있느냐의 문제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로 말미암아 고린도 교회 안에 분쟁이 생겼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고, 다른 우상들은 모두 헛된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닌 일이 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으면 우리가 불결해지거나 혹 귀신의 역사가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성도는 우상에게 바쳐진 불결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렇게 고린도 교회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로 말미암아 둘로 나뉘어져서 다투었습니다.
이 때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 문제를 풀어갑니까? 먼저 사도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밝힙니다. 그것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전혀 상관없다는 것입니다. 8:4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오직 한 분이고, 그러므로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므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도 문제가 될 것이 전혀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된다고 주장하는 성도들의 편을 드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이 또한 이렇게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8:10~12절입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어떤 성도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는 먹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여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 성도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성도가 옆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마음껏 먹는 모습을 보고, 자기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가 생각해 보니 자신이 못할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었으니 내가 더럽혀 진 것이 아닌가? 혹시 귀신이 내게 역사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만 시험에 들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만약 이런 일이 생기면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은 성도가 시험에 든 형제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물론 자신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지식이 있었기 때문에 떳떳하게 행동했지만, 그 행동 때문에 형제가 시험에 들었음으로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8:13절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울 자신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 성도라도 자신 때문에 실족하는 일이 생긴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형제를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겠다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은 우상에게 바친 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먹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까? 헷갈리죠? 지난주에 한 초등학생이 제 설교를 다 듣고 난 후에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그래서 고기를 먹으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저는 이 초등학생의 말에 바울이 하고자 하는 핵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간단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옳은지를 안다고 해서 무조건 그렇게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죠. 어떨 때는 내가 아무리 옳은 지식을 가지고 올바르게 행동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고, 실족하게 하여 죄를 짓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상의 제물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제일 먼저 한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8:1절을 보세요.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지식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식은 무너뜨리는 일을 하고 사랑은 세우는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작은 마을에 교회와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교회 목사님이 술에 취해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크게 소리 지르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교회 다니는 성도들이 집에서 창문을 열고 목사님을 쳐다보면서 “아니 어떻게 목사가 술을 마실 수 있지...” “술을 마시는 것을 보니 저 목사는 삯꾼이 분명해...” “저러고도 목사라니 당장 교회에서 쫓아내야 겠어” 이렇게 수군 수군거렸습니다. 그리고 모두 창문을 닫고 외면하였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이번에는 성당의 신부님이 술에 취해서 거리를 돌아다니며 크게 소리 지르고 노래를 부르는 일이 생겼습니다. 이때도 성당에 다니는 신도들이 창문을 열고 다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신부님을 향해 욕하거나 비난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두들 안타까운 눈으로 신부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당에 다니는 신도 하나가 밖으로 나와서는 신부님을 부축하면서 “신부님이 얼마나 힘드셨으면 이러실까”하고 자기 집으로 모시고 들어가서 보살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상반된 결과가 나왔을까요? 물론 술을 마시는 문제에 있어서 로마 천주교는 우리 개신교보다 훨씬 더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술을 마시느냐 마시지 않느냐의 문제는 아닐 것입니다. 이것은 지식과 사랑의 문제입니다. 교회 다니는 성도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대로 목사를 판단하였습니다. 목사가 해서는 안 될 일을 했기 때문에 욕하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천주교인들은 어떠했습니까? 사랑이 앞섰습니다. 신부님이 잘못했다는 것보다 그 마음이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럴까를 먼저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물론 저는 이 이야기가 지어낸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교회 성도들이 이처럼 사랑이 없이 지식대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천주교인들이 이와 같이 사랑이 풍성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는 우리 모두가 한 번쯤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쉽게 우리의 생각이 옳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들을 상처주고, 실족하게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서로 누가 옳은지를 가지고 너무 많이 싸우지는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 상처를 받건, 실족하건 나는 옳은 대로 행동했을 뿐이니까 괜찮다고 말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지식은 무너뜨리고, 사랑은 세운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지식이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요하고 또한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우리가 가진 지식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럴 때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성숙한 신앙을 가진 성도가 교회에 많으면 많을수록 교회는 아름답고 든든하게 세워져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에릭 리들이라는 분을 아십니까? 이분은 1924년에 열린 파리 올림픽 육상 400M 경기에서 금메달을 딴 영국 선수입니다. 그런데 원래 에릭 리들이 400M 선수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주 종목은 100M 경기였습니다. 그는 100M 경기에서 우승할 가능성이 제일 높은 선수였습니다. 강력한 금메달 후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100M 경기의 결승에도 나가지 못하고 중간에서 떨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100M 예선 전 경기가 주일에 열렸기 때문입니다. 에릭 리들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한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일은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는데 사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릭 리들은 주일에는 경기를 뛰지 않았습니다. 요즘에 가게들 보면 “주일에는 쉽니다” 이렇게 붙여놓은 것을 자주 볼 수 있지요? 이 분이 원조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100M 예선이 주일에 잡히게 되자, 에릭 리들은 경기를 포기합니다. 그리고 그 날 경기에 나가는 대신에 교회에 나가서 하루 종일 예배드리고 봉사를 하였습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당시 영국은 기독교 국가였습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그런데도 대부분의 국민들이 에릭 리들을 편협하고 옹졸한 신앙인이라고 비난하며 공격하였습니다. 어떻게 예선이 주일에 잡혔다고 뛰지 않을 수 있느냐고 엄청난 공격을 퍼부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에릭 리들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100M 경기는 나가지 못했지만, 400M 경기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거기에서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우승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에릭 리들은 우승 소감을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처음 200M는 죽을 힘을 다해 뛰었고, 나머지 200M는 주님이 저를 도와서 뛰었습니다.” 아주 감동적인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지금부터입니다. 에릭 리들이 선수생활을 마치고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선교사로 파송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중국은 일본의 침략을 받을 때였습니다. 에릭 리들은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일본군 포로수용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주일날 포로수용소 안에 있던 아이들이 축구시합을 하였는데, 그만 큰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경기에 심판이 없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서로 자기가 옳다고 우기며 싸웠던 것입니다.
이 때 에릭 리들이 싸우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했을까요? “얘들아 주일에는 축구시합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혼냈을까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에릭 리들은 그 다음 주일에 아이들이 하는 축구시합에 직접 나와서 심판을 봐 주었다고 합니다. 에릭 리들에게 주일은 올림픽 금메달하고도 바꿀 수 없이 귀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에릭 리들은 아이들이 사이좋게 지내도록 하기 위해 주일 날 경기장에 나왔던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이란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를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옳은지 알고, 옳은 대로 행동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사랑과 함께 해야 합니다. 사랑이 우리의 지식을 통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사랑이 있으면 쉽게 정죄하지 않습니다. 쉽게 판단하지 않고, 쉽게 야단치지 않습니다. 대신 기다려줍니다. 용납해 줍니다. 그리고 온유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가르쳐줍니다. 그래서 결국 상대방이 성장하도록 돕습니다. 이것이 사랑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9장도 이와 똑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지난주와 똑같이 했습니다.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 2. 사도 바울은 우상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문제에 대해 지식과 사랑이 함께 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제 9장에서는 자신이 사도로서 가진 권리와 관련해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사도 바울, 사도 바울이라고 부르니까 바울이 당연히 사도라고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고린도 교회 성도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베드로나 요한과 같은 예수님의 12제자 중의 한 명이 아니었고, 더욱이 예수님이 활동하던 당시 같이 있었던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울은 예수님과 교회를 열심히 핍박하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완전히 변화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바울이 복음전도자는 맞지만, 예수님이 복음전파를 위하여 특별히 세운 사도로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 가운데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이 분명 사도가 맞다고 주장합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 즉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다는 사실이 자신이 사도임을 증명해 준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사도가 아니라면 어떻게 고린도에서 교회를 개척할 수 있었겠느냐는 것이죠. 그래서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혹 나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너희는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이 사도라는 증거가 바로 고린도 교회 성도들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처럼 자신이 사도가 맞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사도로서 가지고 있는 권리에 대해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4~5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서 가지고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사도인 바울의 삶을 교회가 책임져 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책임은 특별히 경제적인 도움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즉 고린도 교회는 사도인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원활히 수행할 수 있도록 경제적인 도움을 줄 의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사도로서 권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사도 바울은 사도로서 권리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요구할 권리를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바울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당시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에 고린도나 에베소 같은 큰 도시에는 떠돌이 철학자들이 많이 돌아다녔습니다. 이 떠돌이 철학자들은 도시들을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모아 자신이 알고 있는 지혜를 가르쳤습니다. 떠돌이 철학자들은 이처럼 지혜를 가르친 다음에는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였습니다. 강의료를 받는 것이죠. 그들은 이 강의료를 받아서 생활하였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바울과 그 일행들을 생각해 보세요. 바울과 그 일행의 모습이 떠돌이 철학자들과 거의 똑같았습니다. 바울도 도시들을 돌아다녔고, 사람들을 모아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물론 떠돌이 철학자들처럼 세상적인 지혜를 가르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였지만,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 떠돌이 철학자나 사도 바울은 모두 똑같이 보였을 것입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어떻게 복음답게 전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그래서 바울이 선택한 방법이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게 어떤 경제적인 도움도 받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자비량 선교라고 하지요. 자신이 직접 일해서 번 돈으로 생활하고, 복음은 그야말로 무료로 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처럼 아무런 지원도 받지 않고 복음을 전함으로써 떠돌이 철학자들과 자신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시는 그야말로 은혜의 복음인 것을 분명히 보여 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로부터 일체의 도움을 받지 않았습니다. 대신 바울은 자신이 원래 갖고 있던 기술을 사용해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사도행전 18:3절에 보면 바울이 고린도에서 어떤 일을 하였는지가 나옵니다. “생업이 같으므로 함께 살며 일을 하니 그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것이더라” 바울이 무엇을 해서 생활비를 벌었습니까?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가죽을 가지고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루 종일 일터에서 가죽으로 천막 만드는 일을 하였고, 일이 끝난 저녁부터 복음을 전하는 고단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꼭 이렇게 해야 했습니까? 아닙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로부터, 혹은 다른 도시에 먼저 세워진 교회들로부터 얼마든지 경제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권리를 내려놓은 것입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아무 장애가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은혜의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모든 사역자가 자신처럼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사역자가 교회로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거듭 말씀합니다. 9:7절을 보세요.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이 말씀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교회로부터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뜻입니다. 14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교회의 도움을 받는 것은 예수님께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친히 명령하셨습니다.
이처럼 바울은 사역자가 교회의 도움을 받는 것이 당연하며, 권리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을 복음답게 전하기 위해서 그런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숙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돌아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누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서입니다. 이 복음을 전해들을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바울이 자신만을 생각했다면 왜 그런 고단한 삶을 스스로 선택했겠습니까? 하지만 복음을 위해, 복음을 들을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니까 권리를 내려놓는 선택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우리에게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지만, 실족할 형제를 생각해서 영원히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 얼마든지 경제적인 도움을 받으며 편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지만, 복음을 들을 사람들을 위해서 그 권리를 내려놓겠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모범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모범을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었던 것은 바울 또한 그런 모범을 누군가에게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큼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야말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하고 내려놓으셨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과 이 땅에서의 삶, 그리고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 분명히 보게 됩니다. 어느 누구도 예수님에게 우리 죄인을 위해 인간이 되라고, 이 땅에서 고난의 삶을 살라고,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라고 요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기꺼이 스스로 자기를 비우시고, 낮추셔서 인간이 되셨고, 고난의 삶을 사셨고, 우릴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예수님의 모범을 보며, 형제를 위해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하고, 자신의 사도된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우리 또한 바울의 모범을 따라,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 나 중심의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사랑하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성숙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삶 속에 복음의 향기가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고, 우리 교회는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서 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숙한 신앙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를 세워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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