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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05/22,주일-오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 / 고전 8장 1 ~ 13절 / 고한율목사

(05/22,주일-오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 / 고전 8장 1 ~ 13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1 장, 31 장, 218 장, 171장 1절 // 교독문 15번

160522_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삶-고한율목사.pdf


 저는 가족과 함께 지난 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교직자 수련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속해 있는 합신 교단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함께 모여서 말씀을 배우고, 교제를 나누는 수련회였습니다. 전국에서 약 350명 정도가 함께 모였습니다. 집회 장소에 들어가 보니 정말 다 목사님이고, 다 장로님이었습니다. 


 여러분 목사님들과 장로님들만 모인 수련회가 어떨 것 같습니까? 굉장히 은혜로울까요? 아니면 다른 수련회와 다를 바 없을까요?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예비군 훈련을 간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일반대학교 학생들과 신학대학원 학생들이 섞여서 같이 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내심 신학대학원 학생들은 달라도 뭔가 다르겠지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군복을 입혀 놓았더니 똑같아졌습니다. 누가 신학생인지, 누가 일반대 학생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말도 함부로 하고, 행동도 함부로 하였습니다. 적잖이 실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련회는 달랐습니다. 다들 얼마나 말을 잘 듣는지 모릅니다. 수련회 일정이 어느 정도 빡빡했습니다. 오후 자유시간을 제외하고는 계속 특강과 예배가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곳까지 와서 공부만 하냐 하는 말이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강의만 시작되면 어느 새 자리가 다 찼습니다. 저도 한 번 빠지지 않고 아주 성실하게 다 참석했습니다.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원래는 다른 교단에 계시다가 이번에 우리 교단에 들어와서 수련회에 참석하신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수련회에 대한 소감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합신 교역자 수련회에 대한 소감. 참 말들 잘 듣는다. 계속 이어지는 강의에 강의에도, 강의시간이 되면 알아서 다들 앉아 있는다.” 저는 수련회를 마치면서 참 많은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말씀을 통한 은혜도 많이 받았지만,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이 보여준 성숙한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자기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하여 행동했기 때문에 수백 명이 모였는데도 불구하고 수련회가 잘 진행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배려할 수 있는 것이 성숙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어느 모임이든 이런 성숙한 사람이 많을수록 그 모임은 행복하고 은혜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교회가 교회답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모든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하는 것입니다. 성숙한 성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교회는 든든하게 세워져 가게 되고, 교회다운 모습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신앙적으로 성숙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무엇이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만들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이 그것에 대해 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무엇이 우리의 신앙을 성숙하게 만드는지를 알아보고, 성숙한 신앙으로 교회를 든든히 세워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고린도전서 8장의 말씀은 우상의 제물에 대한 교훈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사도 바울에게 우상의 제물에 관하여 질문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그 질문에 대해 지금 답하는 것입니다. 8장부터 10장까지가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입니다. 


 그러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 왜 사도 바울에게 질문을 했을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고린도에는 많은 우상들의 신전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짐승을 신전에 가져가서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물로 바친 고기는 바친 사람이 먹기도 했지만, 그 양이 많았기 때문에 다시 시장에 내다 팔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당시 고린도 시장에 나온 고기들은 대부분이 신전에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진 고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고기를 사먹는 것과 관련해서 고린도 교회 안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한 부류의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상관없다고 주장했습니다. 


 먼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 사람들은 구약성경을 그 예로 들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니엘이 바로 그런 경우였습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망할 때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에게 뽑혀서 특별교육을 받게 됩니다. 나중에 왕을 도울 신하로 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에게는 왕이 먹는 음식이 주어졌습니다. 굉장히 큰 특권을 받게 된 것이죠. 그런데 다니엘은 왕의 음식을 거부하고, 대신 채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 이유는 왕의 음식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왕이 먹었던 음식은 먼저 우상에게 바쳐진 후에 먹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왕의 음식은 제사음식이었습니다. 다니엘이 왕의 음식을 거부한 이유는 그 음식이 우상에게 바쳐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우상에게 바쳐진 음식으로 자신을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이죠. 


 고린도 교회 안에도 다니엘처럼 생각한 성도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으면 더러워지고, 혹 귀신이 역사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고린도 교회 안에는 전혀 다르게 생각한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상에게 바친 음식이라도,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라도 아무 문제가 없으므로 그냥 사 먹으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 편지를 써서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이에 그 답을 오늘 본문에서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된다, 먹으면 안 된다 이렇게 단순하게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바울은 이 문제를 가지고 우리가 어떻게 성숙한 신앙을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해서 설명하는 기회로 삼고 있습니다. 


 먼저 바울은 우상의 제물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두 단어를 설명합니다. 바로 지식과 사랑입니다. 우리가 다시 본문 1절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이 말씀에서 ‘우리가 다 지식이 있다’는 말은 바울의 말씀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성도들의 말입니다. 특히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성도들의 말입니다. 


 이들은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지식입니까? 우상은 이 세상에 없고, 오직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만이 유일한 하나님이라는 지식이 있었습니다. 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을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 여기서 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그러므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도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옳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 옳다는 것입니다.


 이것만 보면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도들을 바울이 편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1절을 다시 보면 뭐라고 말씀합니까?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갖고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맞다고 말씀합니다. 하지만 그 지식이 맞다고 해서, 너희가 옳은 것은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그 지식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교만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10~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믿음이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믿음이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진 성도가 그 지식을 따라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마음껏 먹었습니다. 그것도 우상의 집에 앉아서 먹었습니다.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리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으면 불결해 진다고 생각하는 성도가 그 모습을 보고는 시험에 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을 보고 자신도 따라서 먹습니다. 그런데 먹고 나서는 신앙양심에 가책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시험에 들어서 신앙생활이 엉망이 되는 것이죠. 


 사도 바울이 지금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너는 우상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이 있어서 아무 거리낌 없이 고기를 먹지만, 교회 안에는 그런 지식을 갖고 있지 않은 연약한 성도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연약한 성도들을 무시하고, 자기 지식대로만 행동한다면 그것은 네가 신앙이 좋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한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한국교회 안에 술 문제는 악명 높습니다. 이전에는 철저하게 금지되어 왔습니다. 그래서 혹 성도 중에 술을 마시는 분이 있더라도 몰래 마셨습니다. 절대 드러내 놓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공공연하게 술을 마시는 성도가 많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청년부 담당 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그 날이 마침 임원선거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로 회장이 선출되었는데, 회장이 감사인사를 하면서, 예배 마치고 다 같이 생맥주 집에 가자고 제안을 하더랍니다. 자신이 회장된 기념으로 맥주를 사겠다는 것이죠. 예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들이 이제는 공공연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시는 성도님들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성경 어디에도 술을 마시는 것이 죄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죠. 다만 술 취하는 것은 하지 말라고 하셨으니 안 취하면 술 마시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으로 말하면 이들은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술은 취하지 않고 마시면 괜찮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런 지식을 가진 성도들이 거리낌 없이 술판을 벌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가운데는 성도가 술을 마셔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성도들이 분명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술을 마시는 성도들 사이에 있다가 자신도 술을 같이 마시게 되는 것입니다. 괜찮다고 하니까 같이 마셨습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마음에 가책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다고 생각이 드는 것이죠. 그래서 이 일 때문에 시험에 들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사도 바울은 지식이 있다고 하는 너희가 올바르지 않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비록 너희가 가진 지식은 맞다고 하더라도, 그 지식 때문에 성도가 시험에 들고 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 된다는 것이죠. 12절을 보세요.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너희는 너희가 옳다고 생각하는 지식대로 행동했을지 모르지만, 그 결과 다른 성도가 상처를 받게 되고, 시험에 들게 된다면 그것은 너희가 형제와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라고 분명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른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 지식대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덕을 세운다는 말은 정확하게 하면 집을 세운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가정이 바르고 행복하게 세워지려면 지식만으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제가 착각했던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아내와 대화를 할 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저는 분명 바른 말을 하는데, 아내가 들으려고 하지를 않는 것입니다. 제가 말하는 것이 분명 정답입니다. 그런데 정답을 말하는데도 안 들어서 싸워요. 처음에는 너무 답답했죠. 왜 정답을 말했는데도 받아들이지 않을까? 


 나중에 깨달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정답을 말해주기보다 상대방의 말을 그저 들어주고 편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상대방에게 아무리 정답을 말해줘도 받아주지 않습니다. 그럴 때는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이해해줘서 풀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정답이 필요합니다. 자녀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이 가장 답답해하는 부모는 정답을 모르는 부모가 아니라, 정답만을 말하는 부모입니다. 


 아이들은 정답만을 말하고 잘못된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모를 너무나 힘들어 합니다. 집을 세우려면 지식만으로는 안 됩니다. 무엇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안아주고자 하는 사랑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지식은 교만하게 하지만 사랑은 집을 세운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지식을 가진 성도들에게 너희의 지식이 틀렸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지식이 맞다고 인정해 줍니다. 하지만 그 지식대로만 행동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지식으로 행동하되, 사랑으로 행동하라고 말씀합니다. 지식만이 아니라, 사랑이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구체적인 예를 들어줍니다. 13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바울에게도 지식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그렇기에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는 것도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바울이 어떻게 행동하겠다고 말씀합니까? 


 만약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즉 내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음으로써 한 사람의 성도라도 시험에 들게 된다면 자신은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지식과 사랑이 함께 하는 모습입니다. 바울은 분명 지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지식대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통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권리가 있었지만, 다른 성도를 위해서 기꺼이 그 권리를 내려놓았던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숙된 신앙이 있습니다. 신앙이 성숙했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많이 알면 성숙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많이 알아도 얼마든지 미성숙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많은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그래서 미성숙한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집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집을 무너뜨리는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의 성숙이란 단지 지식이 많은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사랑에 따라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처럼 자신은 얼마든지 고기를 먹을 수 있지만,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포기할 수 있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성숙된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성숙한 신앙을 갖고 있다면 우리 교회 안에는 결코 다툼이나 분쟁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우리의 권리를 내려놓을 수 있다면 그 속에 어떻게 갈등과 다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지식이 있는 성도들에게 그 지식으로 교회를 무너뜨리지 말고, 교회를 세우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이야말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 그런데 사도 바울은 단지 지식이 있는 성도들에게만 말씀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식이 없어서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지 못하는 성도들에게도 말씀합니다. 그들에게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바른 지식을 가질 것을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 5~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불리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있고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아 있느니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나, 아직도 우상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 세상의 우상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참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음을 가르칩니다. 특별히 우리가 읽은 6절 말씀은 초대교회가 고백한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는데, 그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창조주가 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가 계신데, 그 분은 우리의 구원주가 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예수님을 구원주로 믿는 성도는 이 세상의 많은 신들과 주들이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이 신앙고백을 통해서 우상에 대해 두려워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과 예수님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함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바울은 지식이 있는 성도들에게는 그 지식을 사랑으로 실천하라고 말씀하고, 지식이 없는 성도들에게는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고린도 교회 모든 성도들이 신앙적으로 성숙하게 되고, 그 결과 고린도 교회가 더욱 더 견고하게 설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가진 문제를 통해 성도인 우리가 어떻게 성숙한 신앙을 가지게 될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지식이 있는 성도는 지식대로 행동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땅한 권리라도 다른 성도들을 위해서 내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으로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반면에 지식이 없는 성도는 부지런히 말씀을 배워야 합니다. 바른 지식이 없으면 신앙이 결코 성숙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모든 성도들이 함께 노력한다면 교회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견고하게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바른 지식과 사랑으로 말미암아 성숙한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가 옳으니까 내가 하는 행동이 옳다고 말하는 것을 넘어서서, 아무리 내가 옳더라도 다른 연약한 성도를 실족하게 하거나 어렵게 하는 일이 없도록 사랑으로 주변을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배움으로 바른 지식으로 말미암아 성숙한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소원을 가지고 신앙 생활하고자 하는 우리들에게 사랑과 지식, 지혜를 풍성하게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하나님 보시기에 더욱 더 성숙하고, 복된 모습으로 성장해 갈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