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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설교

(05/08,주일-오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 빌 2장 1 ~ 11절 / 고한율목사

(05/08,주일-오후)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 / 빌 2장 1 ~ 11절 / 고한율목사

찬송가 : 320 장, 455 장

160508-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한율목사.pdf

 오늘 여전도회 헌신예배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게 됨을 감사드립니다. 어느 교회나 마찬가지겠지만, 우리 여전도회의 수고가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교회가 하는 모든 행사나 일들에 언제나 앞장서서, 묵묵히 일들을 감당하는 것을 보면서 항상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사실 성경이나 교회 역사를 보면 여성도들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제가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지만, 예수님을 따라다녔던 것은 열 두 제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여자들이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사역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러한 여성도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사역이 원활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셨는데, 이 놀라운 부활 사건의 첫 증인이 바로 여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주일 새벽에 주님의 무덤에 와서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은 마리아로부터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성을 부활의 첫 증인으로 세우셨다는 것은 교회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분명히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 보면 복음전파에 있어서 지대한 공헌을 세운 많은 여성들이 등장합니다. 대표적인 예로 우리가 새벽기도회 때 빌립보서를 함께 보고 있는데, 유럽의 첫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여성도인 루디아의 집에서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루디아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서 만난 브리스길라는 아굴라라는 사람의 부인이었는데, 바울의 위대한 선교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에 있어서 여성의 역할은 참으로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한국교회사를 배웠는데, 아주 인상적으로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전도 부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선교사들을 통하여 조선에 복음이 들어왔는데, 그 복음을 전국 곳곳으로 전한 사람들이 누구인가 하면 바로 “전도 부인”이었습니다. 이들은 선교사들이 갈 수 없는 전국의 마을 곳곳에 들어가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그래서 곳곳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전도 부인”들의 역할이 없었다면 이처럼 한국에 복음이 속히 전파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과 교회역사는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우리 모든 여성도님들이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역할이 크다는 것을 깨닫고, 더욱 더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이처럼 교회 안에서 여성의 역할이 크다 보니까 그 부작용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빌립보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빌립보서 4: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여기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이 두 사람은 그 이름의 형태로 보아서 여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여성도 두 사람의 이름을 딱 써놓고는 뭐라고 말씀합니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서로 다른 마음을 가지고 다투고 있으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평범한 성도였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 이름을 쓸 정도면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다 아는 유명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우리 식으로 하면 “유오디아 권사님과 순두게 권사님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세요”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빌립보 교회의 여성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지도자가 서로 마음이 달라서 서로 다투니까 교회가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심각하게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이 세상 가운데 세우신 목적을 심각하게 훼손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왜 세상 가운데 세우셨습니까? 그 이유는 중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세상 가운데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쇼 윈도우 아시죠? 백화점이나 옷을 파는 상점에 가면 큰 유리 뒤에 마네킹이 멋진 옷을 입고 포즈를 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쇼 윈도우라고 합니다. 


 쇼 윈도우를 설치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보고 마음이 끌려서 상점에 들어와 같은 옷을 사라는 것이죠. 물론 모델같이 몸매가 좋은 마네킹이 옷을 입고 있어서 그렇게 멋진 건데, 우리는 우리가 입어도 멋질 것이라 착각하게 되고, 결국 그 옷을 사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마치 쇼 윈도우와 같은 목적으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아무리 말해도 그것이 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복된지를 말로 설명한다고 알 수가 없습니다.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뭐냐? 그러면 교회를 보라는 것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쇼원도우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우리 교회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쇼윈도우인 교회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겠습니까? 이 세상과 다른 정말로 하나님 안에서 사랑과 은혜와 용서와 기쁨이 넘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만약 옷을 사러 갔는데, 마네킹이 망가져 있고, 옷도 다 찢어진 채로 그렇게 매달려 있다면 여러분은 그 상점에 들어가서 옷을 사시겠습니까? 절대 안 사지요.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맨날 치고 박고 싸우면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고 싶어 하겠습니까? 그렇게 좋은 데는 너희나 가라고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다투는 일을 가벼운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교회를 세운 목적을 생각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빌립보서를 쓴 것입니다. 물론 이 일 때문만은 아니지만, 이 두 여성도의 다툼이 빌립보서를 쓴 이유 중에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빌립보서는 무엇보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것이 교회를 세운 목적을 이루기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말씀은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한 마음이 될 수 있는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2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 


 바울은 2절에서 모든 성도가 한마음을 품어야 함을 4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 하는 것, 같은 사랑을 가지는 것, 뜻을 합하는 것, 한마음을 품는 것. 사실 이 네 가지는 모두가 똑같은 뜻입니다. 한마음이 되라는 것이죠. 한마음이 되라는 것을 이렇게 네 번 다르게 말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가 한마음이 되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만약 우리 힘으로 되는 일이라면 교회에서 왜 다툼과 분열이 끊임없이 일어나겠습니까? 우리의 힘만으로는 한 마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 힘으로는 안 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마음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1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절에 보면 우리가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4가지 것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권면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위로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넷째는 긍휼과 자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네 가지를 모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네 가지를 잘 사용함으로 한 마음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첫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권면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신 권면의 말씀을 뜻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 되기를 정말로 바라십니다. 요한복음 17:22절입니다.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데, 어느 정도의 하나가 되기를 바라시냐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하나인 것처럼 하나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우리 예수님이 가장 바라시는 일입니다. 이 명백한 말씀 앞에 우리는 절대 다른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로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예수님의 소원대로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되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둘째로 사랑의 위로입니다. 이 사랑의 위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위로입니다. 우리 주님은 실패한 우리들을 사랑으로 품어주시고, 끊임없이 위로해 주십니다. 


 베드로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예수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체포되시자, 베드로는 세 번 예수님을 부인했고, 심지어 저주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런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베드로가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웠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 물으셨습니다. 그리고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 사명을 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배신한 베드로를 버리지 않고, 오히려 회복시켜 그의 사도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이 사랑의 위로는 베드로의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사랑의 위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 이 사랑의 위로가 이미 주어졌습니다. 셋째는 성령의 교제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 모두에게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를 하나로 묶는 끈과 같이 역사하십니다. 에베소서 4:3절에 보면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십니다. 


 넷째로 긍휼과 자비입니다. 이 긍휼과 자비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면 자기의 죄로 말미암아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들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자비를 베푸셔서 그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을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받았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서로 한 마음이 되도록 하나님이 주신 귀한 것들이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가 그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 한 마음이 되지 못할 때마다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우리에게 주신 풍성한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권면과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과 자비를 우리가 기억할 때 우리는 다시 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은 잊어버리게 만들고, 계속 사람만을 주목하도록 만듭니다. 문제만을 생각하도록 만들지요. 우리는 이런 사탄의 계략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미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큰지 그것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처럼 우리가 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이미 받은 것들을 생각하라고 말씀하면서, 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세 가지로 말씀합니다. 3~4절입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4각각 자기의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교회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하지 말아야 할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다툼입니다. 이 다툼은 편을 나눠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나만 옳다는 생각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나는 옳고, 다른 사람은 틀렸다고 생각할 때, 편이 생기고,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성경이 말씀하는 진리의 문제가 아니면 무엇이 옳고 그른 것에 대해 너무 단정적으로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상대방이 왜 그렇게 생각하고 말하는지를 깊이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서로에 대한 이해가 생기게 되고, 연합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는 허영입니다. 허영은 헛된 영광을 구하는 것으로, 자신을 과장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과장하여 남에게 자신을 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허영으로 살면 반드시 위선을 할 수밖에 없고, 결코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되기 위해서는 서로 진실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영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겸손하여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긴다면 분명 한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왜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판단하는 말을 하게 됩니까? 그 사람이 나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판단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은 하나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리는 잘못을 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 스스로 겸손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이나 못난 점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장점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 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자기의 일만을 돌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마음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의 일만을 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도 함께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한 마음이 된다는 것은 같이 짐을 진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서로의 어려움과 아픔을 함께 지려고 한다면 그 짐이 얼마나 가벼워지겠습니까? 이 세상 사람들은 서로 경쟁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나만의 짐도 지기에 벅차합니다. 하물며 다른 사람의 짐을 지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부름 받은 우리들은 함께 서로의 짐을 질 때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선다싱에 대한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옵니다. 어느 추운 겨울에 선다싱이 산을 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한 사람을 만나서 함께 길동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길을 조금 가다가 쓰러진 한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선다싱은 그 사람을 가엽게 여겨서 동행하는 사람에게 같이 부축해서 가자고 얘기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그러면 다 같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면서, 혼자 가버렸습니다. 선다싱은 어쩔 수 없이 혼자 낑낑대며 그 쓰러진 사람을 데리고 걸었습니다. 


 그런데 마을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에 길 가에 한 사람이 얼어서 죽은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자세히 보니 아까 같이 길을 가다가 먼저 간 사람이었습니다. 선다싱은 한 사람을 데리고 오느라 온 몸이 더워졌지만, 홀로 간 사람은 강추위에 얼어 죽었던 것입니다. 함께 짐을 지는 것은 결코 낭비이거나 어리석은 것이 아닙니다. 함께 짐을 지는 것을 통해 우리는 하나가 될 때 주어지는 풍성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다툼과 허영, 자기 일만 돌아보는 것을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런 것들을 피하고, 하나가 되기 위해 힘쓰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권면합니다. 5절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우리가 하나 되기 위해 반드시 품어야 할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입니까? 바로 예수님의 겸손입니다. 6절부터 11절까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지극히 낮추셨음을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자신을 낮춘 예수님을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같은 겸손한 마음임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나의 명예, 나의 자존심을 지키려고 하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나를 내려놓으면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셨고, 인간이 낮아질 수 있는 가장 낮은 자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갇히는 자리까지 내려가셨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높여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며 은혜를 주십니다. 이것은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겸손히 낮출 때 하나님께서 높여주실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높이려 하면 낮아지지만, 우리가 낮추면 주님이 높여주십니다. 그럴 때 우리들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아름다운 하나 된 모습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라기는 오늘 헌신예배 하는 우리 모두가 겸손히 낮아져서 서로를 섬기며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나를 높이지 않고,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섬김으로 하나님 안에서 하나 된 우리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하나 된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시고, 또한 그런 우리를 통해서 복음이 더욱 힘 있게 증거 되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든 여전도회 회원들이 예수님처럼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고 섬김으로 하나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더욱 은곡교회를 든든히 세워 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